무신정변

이 사건 이후의 무신들에 의한 고려 통치 기간에 대해서는 무신정권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武臣政變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묘사된 보현원 사건.[1]

1 개요

고려 의종 24년에 해당하는 1170년 8월에 고려의 무신들이 보현원(오늘날의 북한 장풍군 남단에 있었던 절)[2]에서 들고 일어난 정변으로 쿠데타이다. 당시 상장군 정중부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일으켰기 때문에 정중부의 난 또는 무신의 난이라 부르기도 하나, 실질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단순히 난(亂)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다. 당연히 당대에는 난이라고 보지 않았다. 사극 무인시대에서는 경인년 거병이라고 통칭한다.

최종적으로 무신 정권이 축출당하고 후대 성리학적 사관이 적용되어 이렇게 불리는 것이다. 1170년이 경인년이기 때문에 경인의 난(庚寅亂)으로도 부른다. 경인년의 보현원 정변과 1173년 계사년에 일어난 김보당의 난(계사의 난(癸巳亂)이라고 한다.)를 합쳐 '경계의 난(庚癸─亂)'이라고 부른다.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보현원 사건이라고 한다.

2 정변의 원인

중근대 동북아시아, 아니 사실상 중근대의 모든 나라에서는 혹시나 일어날 지 모르는 군사 반란의 위험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상대적으로 천시하는 사회적인 통념이 있었다. 고려 역시 이러한 통념에 맞게 관료체계가 구성되어 있었으며, 무신은 정3품 상장군이 가장 높이 승진할 수 있는 품계였다. 조선시대라고 별다를바 없어서 무관으로의 최고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이 한계였으며, 그 이상의 품계는 문반품계가 적용되었다. 정3품 절충장군(전라좌수사)이던 이순신한산도 해전을 기점으로 정2품 문반 정헌대부 품계를 받고 사후에 다시 정1품 문반의 대광보국숭록대부 품계를 추서받은 게 그 예시. 그나마 조선시대에는 무관에게 품계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

그리고 실제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정2품의 평장사를 상원수로 임명하여 총사령관직을 맡겼고, 무신의 최고위인 상장군은 부원수에 임명되어 상원수의 지휘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에 한국사에서 유명한 강감찬도 군공으로 인해 장군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문신이었다. 강감찬이 군 임무를 수행한 것은 거란족과의 전쟁 시기 정도로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항목 참조. 여진정벌에 활약한 윤관 역시 무신이 아닌 문신이었다.

이런 문신-무신 차별정책은 사회적 통념상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무신들도 그 이전까지 이런 차별에 대해 큰 불만을 품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인종 재위기의 권신 이자겸이 왕위를 탐내면서 온갖 뻘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왕은 무신들에게 온갖 버프를 넣어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자겸의 난을 토벌한 무신 소드마스터 척미네이터가 그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정2품 품계를 수여받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후 척준경이 숙청당하면서 척준경에 동조했던 무신들이 함께 대거 축출됐다. 척준경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영웅이다 보니, 이자겸의 난 당시 척준경에 동조한 무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축출 다음에는 또 묘청의 난으로 인해 서경에 기반을 두고 있던 무신들이 대거 숙청당하면서 그 세력이 약해지자, 문신들이 대놓고 무신들을 호구 취급하면서 온갖 차별과 무례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이에 무신들의 분노 게이지가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의종 때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막장이나 다름 없었는데 의종은 문신들과 마실 나가면서 허구헌날 호위군인 금군을 대동하였고, 그 때마다 동원된 무신들은 굶어가면서 왕과 문신들이 띵가띵가하는 주변을 지켜야 했다. 한두 번이면 무신들도 참고 넘어갔을 수도 있으나, 이건 하루가 멀다하고 이 난리를 쳐댔으니 무신들은 그야말로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다.

1170년 8월에 의종은 보현원에 왔다가 흥왕사에 머물렀는데, 참고 있던 정중부가 폭발하여 이의방과 이고에게 "다음에 왕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리 말자"고 했다. 그러나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의종도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하게 느낀 모양인지 갑자기 보현원으로 출발하기 전 오문(五門)에서 출발하려는 상황을 멈추고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수박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주려는 의도였다. '수박'은 당시에 현대의 태권도격의 국가적무술로, 이 행사는 일종의 무술 대련 및 시합 행사로 볼 수 있다. 사실 군주제 체제에서 이런 무예 행사는 단순히 무신, 즉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것뿐만 아니라, 군인이 군주의 눈에 띄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행사를 원했다. 군주들도 이러한 행사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서 군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난다. 나이 든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경기를 피하는데, 문신인 기거주 한뢰가 튀어나와 이소응의 뺨을 때리자 이소응이 섬돌에 나가떨어져 뒹군 것이다. 이때 왕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으며 좌승선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는 이소응을 욕했다.

고려 시대의 종3품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2번째로 높은 품계인데다가,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이소응은 당장 군문에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이었다. 즉, 현대로 치면 40대인 5급 공무원이 장성급인 군 원로의 뺨을 때린 격이다. 무신들이 이걸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정중부는 그렇지 않아도 젊은 시절에 있었던 김부식 부자로 인한 수염이 탄 개인적인 굴욕 때문에 이런 일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중부의 분노는 폭발하여 한뢰에게 '네가 비록 문관이나고는 하나 이소응은 3품 벼슬을 지내고 있는데 너 따위가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고가 칼을 뽑아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그 자리보다는 왕이 보현원에 도착하거든 난을 일으킬 작정으로 만류하였다.

3 정변

3.1 살육의 시대

의종이 보현원에 도착하기 직전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들어가 왕의 명이라고 속이고 순검군의 병사들을 소집하였다. 왕이 보현원의 문 안에 들어가자 수박 대회에서 웃었던 임종식과 이복기가 그 자리에서 참살당했으니, 이것이 정변의 시작이다.

낮에 무신들에게 어그로를 잔뜩 끌어놓은 한뢰는 황급히 의종에게로 다가가 왕이 앉는 어상 밑에 숨었고, 왕 앞에서 자제하던 무신들과 의종을 보좌하는 내시부 관원(환자)이 한뢰에게 나오라고 말했지만 한뢰는 왕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왕은 내시부의 관원을 시켜 무신을 저지할려고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결국 이고가 칼을 빼들자 나와 그 자리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材)는 "감히 왕의 앞에서 칼을 뽑았는가!" 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이의방이 인상쓰자 입 닥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무신들은 평소 원한이 있던 문신들을 찾아다니면서 죽였다. 정중부 일파는 우측 어깨를 내어 놓고 복두를 벗었는데, 이 과정에서 같은 복장을 하지 않은 다른 무신까지도 죽었다.

한편 무관들은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은근슬쩍 도망갔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됐고, 만약 김돈중이 개성에서 태자를 옹립할 경우 더 골치아픈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의방은 "만약 그렇게 되면 나는 남녘으로 가서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북방으로 가서 거란(契丹) 놈들에게 투신하여 피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 그리고 발걸음이 빠른 자를 보내 김돈중의 집에 가서 김돈중이 어디있냐고 물었는데, 안돌아왔다는 대답을 듣자 무신들은 성공했다고 안도하고 병력을 이끌고 개성으로 직행했다. 참고로 이후 산으로 도망갔던 김돈중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자의 밀고로 동생 김돈시와 함께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후에 목과 사지가 절단된 채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정중부의 젊은 시절에 원한이 있던 아버지 김부식 또한 죽은지 오래였지만 부관참시를 당한다.

개성에 입성한 무신들은 각 궁궐들을 장악하고 핵심관료들을 모두 잡아 죽였으며 사병들을 풀어 문관의 관(冠)을 쓴 놈은 말단 관리라도 모조리 죽이라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50여명의 문관들이 잡혀 죽었다. 의종은 이 상황이 무서워서 정중부에게 그만하라고 했지만 정중부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고, 왕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고와 이의방을 응양용호군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임명하고 다른 상장군은 수사공 복야(守司空僕射)로, 대장군은 상장군으로 진급시켰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무신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계속해서 맘에 안드는 인물들은 잡아 죽이고 다녔다.

이후 무신들은 의종을 궁궐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왕이 총애하던 내시부의 관원인 왕광취(王光就)가 반격을 하려 했지만 일이 누설되어 20여명이 또 죽었다. 이 때까지는 의종과 그 가족에게 손을 대지 않던 정중부는 의종을 협박해서 군기감(軍器監)이 되었고, 이후 정중부는 계속해서 직위를 높이는 일을 반복한다. 무신들은 의종과 태자는 추방하고 태자의 어린 아들은 죽여버렸다. 의종이 총애하던 궁녀가 도망가있자 죽일려고 했으나 태후가 간청해서 살려주었고, 그 궁녀는 의종을 따라갔다.

병부시랑 조동희는 지방으로 가 있던 차에 소식을 듣고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켜 개성으로 오려고 했지만, 호랑이가 길을 가로막아 못 가던 중(...) 무신들의 기병이 와서 체포된다. 조동희는 제주 정벌을 했던 공이 있어 귀양만 보냈으나 중간에 데려가던 자가 조동희를 죽이고 물에 넣었다.

정중부와 무신들은 자기들이 죽인 문관의 집들까지 부수고 다녔으며, 진준(陳俊)이 "원수로 여기던 문관은 이복기, 한뢰 등 수 명이었는데 이번에 너무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 집을 부시면 그 가족은 어떻게 사냐?"란 식으로 말렸으나 이의방 등은 듣지 않았다. 이때부터 무관들은 원수의 집을 부수는게 습관이 되었다.

무신들은 이후 의종의 동생이던 익양공 왕호를 새 왕(명종, 재위: 1170 - 1197)으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명종은 역시나 허수아비일 뿐 실권 대부분은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의종의 별장들을 정중부 이고 이의방이 나눠가지기도 하고, 명종이 즉위한 이후 무신들이 모여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117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였던 김보당이 다시 의종을 왕위에 옹립하고 무신들을 죽일 계획을 세웠고, 거제도에 있던 의종을 데려올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들은 무신들은 장군 이의민 등에게 병력을 주어 보냈고, 안북도호부에서 의해 김보당은 잡혀서 고문을 받고 처형된다. 이 때 김보당이 "문관 중에 누가 공모하지 않았겠나"라고 이야기 하고, 또다시 남은 문신들은 가리지 않고 무신들에게 학살당한다.

김보당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준의(李俊義), 진준(陳俊), 김부(金富) 등이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하늘의 뜻은 알 수 없고 사람의 마음은 혜아릴 수 없는데, 힘만 믿고 정의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문신들을 모두 죽여도 김보당이 또 나오리란 법이 없겠냐고 설득하였고, 무신과 문신의 자녀를 결혼시키는 정책으로 문신들을 안심시키자고 하여 살육의 행위는 진정 국면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의민 등이 의종은 죽여버렸다.

3.2 후일담: 무신정권과 권력자의 교체

  • 자세한 내용은 무신정권과 각 권력자들 개개인의 문서를 참고할 것.

1170년에 시작된 무신정변 이후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에 의한 무신정권이 유지된다. 그러나 1171년에 이의방이 배신하려던 이고를 죽여버리고 힘이 강해진다. 고속 승진하던 정중부는 1173년에 문하시중이 되었지만, 정중부는 이의방에게서 몸을 사리는 시기가 오기도 하는 등 무신 내에서는 권력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무신들은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겨 국가적으로 큰 반감을 사게 된다.

고려왕가와의 혼인을 획책하기도 할 정도로 야심이 커졌던 이의방은 1174년에 암살당했으며, 이후 정중부가 독주하는 세상이 오자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 역시 방자한 생활을 하였으며 공주를 자기의 아내로 눈독을 들일 정도였다. 결국 1179년에 새로운 인물인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와 정균을 죽임으로써 고려의 무신정권은 다른 국면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1183에 경대승이 병으로 사망하고, 이듬해에 낙향했었던 이의민이 돌아와 권력을 잡지만 1196년에 최충헌이 등장하여 이의민 일가를 죽이고 나온 이후로는 오랫동안 최충헌과 그 아들들이 집권하며 무신정권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내부 부패에 이은 1231년에 시작된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는 혼란으로 빠져들게된다. 최씨 일가 이후로도 1258년에 등장한 김준임연, 임유무 등이 집권하였지만, 원종이 임유무를 처단함으로써 1270년에 무신정권은 끝이 난다.

4 무신 정변의 이면

하지만 무신정변은 단순히 문신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아온 무신들이 말 그대로 민란처럼 감정적으로 폭발해서 문신들을 대거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우발적인 사건만은 아니었다. 이 무신정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있으니, 바로 무신과 문신간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초기에는 의종 역시 문벌을 견제하고 무신을 되려 중용하는 정책을 폈다. 무신정변의 주요 인물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순검군, 견룡군(경룡군)이란 이름을 가진 일종의 국왕 호위 부대 출신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정변을 독자적으로 계획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호랑이 새끼를 키웠지.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의 호위 부대는 군주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비록 문신과의 차별이 있다곤 해도 이러한 특성상 차별 대우로 인한 감정적 행동으로서 함부로 정변을 일으키는 것은 어렵다.

당시 무신들의 상황은 결코 단순히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정도로 설명하기는 힘들정도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여진과의 전쟁에서 얻은 전공을 기반으로 무신들의 입지가 탄탄해지긴 했지만, 척준경 일파의 숙청, 그리고 묘청의 난으로 인해 무신들의 입지는 위태로워졌고, 이를 틈타 기존의 문신 집단은 무신 집단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로 인해 무신과 문신 간의 권력 다툼이 극심해졌고 정계는 혼란스러워 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무신정변 직전의 무신들의 권위는 전에 비해서는 훨씬 더 개선되었던 편이다. 여진족 토벌, 이자겸의 난 그리고 묘청의 난 등등을 통해서 무인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공을 새운 무신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무인들의 권력과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당연히 이를 느낌 문신들은 무인들을 경계할수 밖에 없었고 갈등은 더 켜저갈 수 밖에 없었다. 무인들은 오히려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느끼자 더 차지하고 싶은 욕심과 문신들의 대한 반감이 섞여서 정변을 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실로 고려시대는 신분상승의 가능성은 신라시대보다 더 높았고 이것 때문에 일어난 노비들이나 평민들의 반란은 꽤 많았다.

또한 예를 들자면 훗날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을때 노비들 중에서 유용한 노비들에게 신분상승을 시켜주었고 무신으로 고용하기 하였다. 이때 반감을 느낀 만적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만적은 "이의민도 천민 출신이었는데 왕의 자리를 노릴 정도로 강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다른 노비들도 장군이 될수 있는 판에 우리도 못할게 뭐있냐?" 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동지들을 모았다.

게다가 의종은 무신을 우대해서 불만을 해소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아예 확실하게 무신들을 장악하려들기 보다는 문, 무신들을 이용해 먹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했을 뿐이었다. 더욱이 의종 말기에는 무신보다는 불만 많은 문벌 2세(김돈중 등)을 달래는 것으로 정책이 바뀌면서 의종이 직접 힘을 실어주고 칼을 쥐어준 무신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망했어요. 결국 무신들은 문신 뿐만 아니라 왕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무신들의 반감이 커지자 뒤늦게 의종은 위에서 언급한 수박 행사 등을 통해 무신들을 우대하는 제스쳐를 취했으나 이를 가만히 놔둘 문신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뢰의 모욕 행위와 같은 행동을 취함으로서 아예 행사 자체를 무위로 돌려버리려 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을 단순히 문신들의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기본적으로 한뢰의 행위는 문신들의 무신들에 대한 우월감과 차별적인 인식이 바탕이 되지 않는 이상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보다는 이 사건은 이러한 정치적인 배경과 그 과정에서 생긴 문신과 무신의 차별 의식 및 문신들의 오만 등이 불러낸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결국 반감을 해소하지 못한 무신들은 무력으로 들고 일어서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의종이 질펀하게 놀아 제꼈다는 기록에서처럼, 지나친 사치와 향락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의 왕에 대한 반감은 매우 커졌고, 이는 일반 병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무신 정변 당시 일반 병사들이 무신들의 행위에 대거 동조하였고, 무신들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서 세력을 얻는 한편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작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문신들보다도 허약한 정치력 속에서 정권안정에 실패하고 백성들을 수탈했고, 툭하면 군사를 일으켜 현피를 떠대는 등 밥그릇 싸움이나 지속하면서 명분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이를 대체할 힘의 공백 때문에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의종이 정변의 초기 국면에만 잘 수습했다면, 아무리 우발적인 정변이 일어나도 과거 고려 현종 때처럼 최소한 왕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는 스스로 이를 주도하여 문벌들을 몰아내는 친위 쿠데타로 이 사건을 이용할 가능성도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근데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의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스스로 호랑이를 부른 격이 되었다.

5 후세 평가

이 때부터 1270년 5월까지 약 100년간 무신정권이 시작되고 고려의 역사는 피비린내가 더욱 진동하게 된다. 이후 문신적인 기풍은 크게 쇠퇴하여, 이제현충렬왕과 문답할 때는 "글을 배울 곳이 없어 유학책 읽어야 할 사람들이 승려한테 글을 배운다."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물론 최우 정권기에는 서방도 깔리고 이규보 같은 문인도 올라오고 상정고금예문 재판본 등 금속 출판물이 등장하는 등 무슨 비문명 사회로 전락한 것은 아니지만, 문(文)적 기풍이 크게 쇠퇴하고 남은 것 또한 정권에 종속되다시피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신정변은 한국사에서 몇 안 되게 집권 계층을 싸그리 물갈이한 사례로는 의미가 (부정적으로라도) 있는 사건이다. 특히 최근 들어 권문세족 - 사대부의 연결성과 훈구파 - 사림파의 연결성이 주목받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한국사에서는 더욱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다. 묘청의 난 등 전조가 있기는 하지만, 단순히 '지방의 뛰어난 인물이 중앙에 합류, 중앙 귀족과의 교류로 성장'하는 식이 아니라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면서 중앙에 진출하여 명예를 재확인'하는 식의 성장(대표적인 예가 바로 양반),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중앙이 지방 세력과 타협할 수 있을 정도의 연결고리를 갖게 된 것도 무신정변으로 인한 집권 세력의 격변이 미친 영향으로 평가받는다.

1980년대만 해도 한국 군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들을 정당화할 명분으로 무신정변을 차별받는 군인들의 당연한 정당방위로 포장하여 국민학교 교과서에까지 써먹었다. 80년대 중순 국민학교 사회 교과서에선 삽화로 문신들은 의종과 마셔라 부어라하고 무신들은 더운 여름에 중무장 상태로 경비나 서고 있는 그림으로 불만을 가질만한 묘사를 한 적도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사례로 무신들의 호위 사병집단인 삼별초의 저항을 높이 평가하면서 무신정변의 잔류 세력이 몽골에게 맞섰다고 나왔지만, 고려 시대 제주도 서민들에겐 삼별초는 악랄한 약탈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몽연합군도 고려 백성들에게 민폐끼친 게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삼별초도 나중에는 민중들을 생각하여 약탈을 자제하고 민심을 얻고자 노력도 했다... 상세한 건 삼별초 항목 참고. 그리고 무신정권이 몽골에게 대항한 건 자기들 이득 때문이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다시 무신정변의 '진취성, 정당성'(?)보다는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분석이 늘어나고 있다.

'무가 정권이 왕을 꼭두각시로 세워놓고 집권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의 가마쿠라 막부와 비교되기도 한다. 물론 그 장기적인 안정성, 몽골 침입때의 대처 수준 등의 요인 때문에 진로와 평가는 완전히 갈라지지만...

6 창작물

사극 무인시대의 시작부는 무신정변에서 명종의 등극까지의 전개를 다루고 있다. 2화 마지막에 이의방이 왕광취의 목을 내던지면서 의종에게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워낙 박력이 대단하다보니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부분은 초반치고는 상당히 복잡한 전개를 보이는데, 무신들이 문신들을 쳐죽이고 왕을 폐위시켰다는 뼈대에, '소장파와 노장파 무신간의 대립', '차기 왕을 누구로 세울 것에 대한 논란', '이고와 이의방의 대립', '무비와 정중부와 이의방간의 밀거래'등, 온갖 갈등요소들이 얽혀있다보니, 숨막히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전개를 보인다.
  1. 드라마에서는 한겨울에 벌어진 사건으로 눈이 쌓여 있으나 실제로는 가을인 음력 8월에 벌어진 사건이다. 촬영 스케쥴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2. 이전 버전에서는 보현원이 오늘날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의 청평사라고 되어 있었고, 위에 링크된 무인시대 동영상에서도 그렇게 자막이 달려 있으나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12권 '장단도호부' 편에 보현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고, 의종이 자주 찾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정중부가 문신들을 모두 죽였던 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다만 이 춘천 청평사도 고려시대에 건립된 절이고 이 절 역시 '보현원'이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에 혼동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