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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이순신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인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 중에서
鄭運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어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생몰 년도 : 1543년 ~ 1592년[1]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 시호는 충장(忠壯).영암 출신. 아버지는 훈련참군 응정(應禎)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웅천현감(熊川縣監)을 지냈다.
1570년(선조 3) 28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제주판관(濟州判官) 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선조 24) 녹도(鹿島)만호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해전·당포 해전·한산도 대첩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부산포 해전에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2]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영암의 충절사(忠節祠), 고흥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안승훈이 연기했다.
원균 같은 맹장은 개뿔이 되는 것이 장수 최고의 영예라고 생각하는 원균 빠돌이다. 이순신의 정읍현감 시절부터, 크고 작은 문제로 갈등하는 인물이다.
원균이 파직된 전라좌수사[3] 자리에 이순신이 부임하자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극력 반발, 동료 제장들을 선동하여 상관 이순신을 곤경에 빠뜨리는 인물로 왜곡되었다.
그러나 사천 해전에서 총탄을 맞은 이순신을 치료해 주는 과정에서 그와 돈독한 전우애를 쌓는다. 부산포해전에서 폭탄에 맞아 전사한다. [4][5] 정운이 전사한 후 시신이 운구될 때 이순신이 직접 지은 제증참판정운문의 일부가 인용된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조순창이 연기했다.
이순신의 훌륭한 부관 역할을 하였으며, 부산포 해전은 출전 장면과 해전 후의 장면만 묘사되어서 정운의 죽음에 대해 이순신이 슬퍼하는 장면만 나왔다.[6]- ↑ 전쟁 발발후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 ↑ 기록에 의하면 대조총에 맞아 몸을 관통당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의 기록...충겸이 아뢰기를,“이순신(李舜臣) 진중의 정운(鄭雲)이라는 사람이 그 대포를 맞고 죽었는데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도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선장(船藏)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 ↑ 전라좌수영의 가장 높은 관직
- ↑ 판옥선의 선체위에 일본군의 폭탄이 날라오자, 부하들을 밀치고 자신이 폭탄을 끌어안고 폭발했다. 근데 왜군이 날린 폭탄이 비격진천뢰였다.(...)
- ↑ 실제로는 상륙후 돌격하는 과정에서 머리에 총탄을 맞아 전사한다.
- ↑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드라마 징비록에서의 정운은 부산포 해전이전 다른 해전에서 적을 유인하다 전사한 것처럼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