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 해전

이순신의 전투 목록
옥포 해전
(1592년 5월 7일)
합포 해전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도
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태산과 같이 무거이 움직여라
ㅡ 옥포해전 전, 충무공의 훈유

1592년 5월 옥포

바다에서 적(敵)을 맞다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첫번째 승리를 향해
불멸의 이순신 옥포 해전 예고1, KBS

임진년 5월 옥포 앞바다

세상을 버티기 위하여
불패의 신화
그 첫번째 승리를 향해
돌아보지 마라
싸워야 한다
불멸의 이순신 옥포 해전 예고2, KBS

옥포 해전
날짜
1592년 음력 5월 7일 (양력 6월 16일)
장소
조선 경상도 거제시 옥포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조선 왕국쇼쿠호 일본
지휘관충무공 이순신
원균
권준
정운
무의공 이순신
어영담
이영남
도도 다카토라
호리노우치 우지요시
병력판옥선 28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50척
피해 규모1명 부상26척 격침
결과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결정적 승리

신화의 시작

1 소개

1592년 6월 16일, 조선 선조 25년 임진년 음력 5월 7일, 옥포(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이순신 무적전설의 첫 상대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최초 승전[1]이기에 더욱 각별한 해전.

1.1 임진왜란, 발발하다.

선조 25년이었던 1592년 4월 13일[2]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이끄는 선발대 700척/18,700명의 병력[3]을 이끌고 부산포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100여척에 달하는 판옥선을 싸우지도 않고 자침시켰다. 참고로 원균이 4월 29일에 "본도의 수군을 뽑아 적선을 추격해 10척의 적선을 분멸했으나 적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경상우수영이 점령당했다."라는 장계를 띄웠는데 사실은 뻥이었다. 그나마 박홍은 뭔가 해보려고 하다가 결국 망했지만 원균은 싸우지도 않고 그냥 튄것. 일본 수군은 빠른 기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원균은 "전라좌수영의 병력을 총 동원해 당포 앞바다로 나와야 싸울만 할꺼 같습니다요 ㅠㅜ."라는 장계를 올렸고 이에 이순신은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닌 경상 해역에 출전하는데 고민을 하고 고심끝에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5월 1일에 전라좌수영으로 모이자고 했다. 그러나 약속의 5월 1일이 되었음에도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이 도착하지 않자 이순신은 또 다시 고민에 빠진다. 전라좌수영이 보유한 판옥선은 불과 24척에 불과했고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이대로 출전해야하나. 이억기가 올때까지 기다려야하나."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조금 뒤에 녹도만호가 보자고 하기에 불러들여 물었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왜적은 점점 서울 가까이 다가가니 분통한 마음 이길 길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늦추다가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었다.

ㅡ《난중일기》임진년 5월 3일

5월 3일(그레고리력으로는 6월 12일), 녹도만호 정운이 이순신을 찾아와 "이번 기회가 아니면 안된다."라며 설득, 이순신은 전라좌수군만으로 첫 출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4일(그레고리력으로는 6월 13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의 목줄인 옥포만으로 향했다. 그러나 포작선 46척은 어선에 불과한 비전투선이었고 옥포해전 이후 먼 훗날 명량해전에서 동원될때까지 단 한차례도 동원되지 않음을 생각해보면 이순신과 전라좌수군은 함대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군다나 이때 조선 수군의 첫번째 사망자가 나온다. 전투가 무서워 탈영한 여도수군 황옥천이라는 병사를 잡아 목을 베어 효수한것. 이 때 거북선은 출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야 완성되어서 훈련 상태나 전술 운용 면에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일부러 제외한 것으로 추정한다.

1.2 원균의 합류

5월 5일, 이순신과 전라좌수군은 당포에 도착했으나 약속했던 원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님 지금 뭐함? 약속 안지킴? 빨리 나오셈."이라며 원균에게 빨리 나오라고 했으며 이에 원균은 그제서야 1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뭉그적 거리며 합류했다. 그후 기효근 등 경상우수군 장수들이 3척의 판옥선과 2척의 협선을 이끌고 본대에 합류했다.

1.3 완벽한 승리

그리고 5월 7일 새벽에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이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로 신기전을 발사했다. 그 신호를 본 이순신은 "망령[4]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5] 침착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라는 명령을 내린후 조선 수군을 옥포로 진격시켰다.

그리고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 재빨리 이를 동서로 포위한 후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 맹렬하고 정확한 포격을 가하였다. 조선 수군의 6척의 판옥선이 선봉에 서면서 적선을 향해 달려가며 포격을 가했고 이후 전 조선수군이 정박중인 일본군 함선과 일본군 진영에 자비없는 포격을 가해 적선 26척 격침이라는 큰 전과를 올리며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함께 전투에 참여한 원균의 경상우수군도 격침한 26척의 배중 5척의 배를 분쇄하는 전과를 세웠다.[6]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 척에 불과하였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왜적은 육지로 달아났다.

2 결과

이 싸움의 결과 아군은 별 피해라고 할 것도 없다시피 했다. 부상자 1명. 2명이라는 설도 있고, 몇 명 더 있다는 설도 있는데 당연히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그리고 이 부상자들도 전라좌수군이 사로잡은 왜선을 원균의 전선이 빼앗으려고 활을 쏴서 생긴 것(…).

이어 합포(경남 마산) 앞바다에서 적선 5척, 다음날 적진포(통영시 광도면)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리며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 장악의 페이스가 점차 올라가게 된다. 이순신은 이 전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점차 사신(死神)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해 간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3.1 불멸의 이순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61회 ~ 62회에서 나왔다. 도도 다카토라의 왜선들이 철저하게 조선군 총통에 작살나는 통쾌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왜적의 총탄에 맞는 병사들이 십 여명이나 발생하여 남은 병사들이 몸을 사리고 있자 이순신이 직접 활을 쏘아 전의를 북돋고, 어그로꾼원균의 함대는 선체를 더 두껍게 보강하여 왜선에 닥돌해서 부딪치는 일명 충파 전술을 활용해 적을 도륙했다는 전개로 나왔다. 원균명장론? 그나마 나레이션은 역사적 사실에 맞게 나왔는데[7] 정작 드라마 내용과는 맞지 않아 많은 사람들을 황당하게 했다. 역덕들은 처음부터 화를 냈고, 일반인들은 드라마와 나레이션이 안 맞아 벙쪘다(…).

3.2 징비록(드라마)

징비록(드라마)에서 19화에 등장했다. 불멸의 이순신과는 달리 기록대로 조선 수군의 피해는 전무한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묘사되었다. 평양성에 몽진해 있던 선조가 받은 이순신의 승전상소를 재현하는 형식처럼 나온다. 출전한 이순신 함대가 도도 다카토라의 본진이 있는 옥포를 포위한 후, 넓게 펼쳐 공격한다고 작전을 지시한다. 조선수군이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도도는 즉시 병사들에게 승선명령을 내리고 함대를 끌고 나가려지만 이미 독안에 든 쥐였다. 이에 도도는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으라고 지시라고 쓰고 반자이 어택이라고 읽는다 이거나 저거나한다. 이에 적선이 진격을 하자 이순신은 저들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일자진을 편다.[8]

그리고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자비심 없는 화력덕후짓거리포격을 명하고 이에 일본군 함대는 쑥대밭이 된다. 결과는 부상자 하나 없는 압승.[9] 전투 직후 벙쪄있다가 결과를 부관에게 보고받는 도도의 절규가 꽤나 볼만하다.꾸워워워워워워 도도는 이순신의 이름을 확인한 후, 이 치욕을 씻겠다고 다짐한다. 한편 승리를 확인한 이순신은 대승이라 말하는 송희립에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네. 적들의 끝은 더 참혹할 것이야."라고 말한다. 도도의 대장선이 빠져나간 것을 정운이 추격하려 하자 도도의 이름을 확인하며 "그 자는 살아남은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야."라고 하며 앞으로도 승리를 이어나갈 것을 다짐한다.

전반적인 CG나 연출 등이 빈약한 편이고 불멸의 이순신에서의 촬영분을 수정 및 합성하기도 했으나 징비록에서 새로 찍은 장면들이 대부분이며 전작과는 달리 그나마 포격전의 고증은 잘 된 편이다. 그리고 롱 테이크형식과 슬로우 모션등을 넣어 일본군을 학살하다시피 하는 모습은 통쾌감을 준다.

여담으로 탄금대 전투와 함께 징비록의 오프닝 ost가 풀버전으로 나온다.[10]

3.3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의 역사 소설인 야마오카 소하치도쿠가와 이에야스(대망)에서 이 전투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인 히데츠구가 오만도코로(히데요시의 어머니)에게 급히 찾아와 '거제도 동쪽 바다에서 수군이 크게 패했다'고 전하고, 그럼에도 히데요시가 직접 조선에 갈 생각이라는 말을 전하자 오만도코로가 크게 걱정하는 묘사가 나온다.여기서 이순신의 이름도 언급되는데 해전에 뛰어난 명장이라고 나온다.
  1. 조선군 최초의 승전은 아니다. 육전에서 신각이 양주 해유령에서 매복 공격하여 70여개의 수급을 얻은 승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투의 날짜는 불분명하나, 신각이 참수된 날이 임진년 음력 5월 1일(선조수정실록)이므로 전투는 그 이전이다.
  2.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24일.
  3. 경상우수사 원균은 90척으로 보고,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했다.
  4. 정신이 흐려 말이나 행동이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 쉽게말해 정줄 놓지 말라는 소리.
  5. 무겁게.
  6. 정확히 말하면 분쇄가 아니라 적선에 상륙한후 탈취했다. 이러한 전투 스타일은 원균이 수급에 욕심이 많아(...) 적들의 목을 베기 위해 이러한 방식의 전투를 선호했다. 이후 난중일기에서 수급을 조금이라도 더 뺏으려고 이순신에게 수급을 베도 되는거 아니냐고 따지는 장면도 나오고 심지어 조선백성을 일본군으로 분장한후 목을 베는 천하의 개쌍놈 짓을 자행한것이 기록되어 있다.
  7. 전투 후 부상자는 두 명밖에 없었다.
  8. 이 때 한 말이 "가벼이 움직이지 말게.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움직여야 하네." 이는 실제로도 나왔다.
  9. 실제로 생긴 부상자는 원균팀킬로 인해 발생했다. 즉 전투 중에는 아무도 안 다쳤다는 소리.
  10. 탄금대 전투부분의 경우에는 후반부가 좀 짤리기는 했지만 거의 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