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남 사건

1 개요

장제스의 북벌 도중에 지난을 점령한 국민당과 지난에 주둔한 일본군이 충돌한 사건. 상당한 숫자의 중국 군민이 일본군의 기습에 살해되었다.

2 배경

2.1 1차 북벌과 일본의 1차 산동출병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로 난징 정부를 수립한 장제스는 국민당에 적대하는 장쭝창, 장쭤린 등의 군벌들에 대응하기 위해 일단 우한의 좌파 정부와 손을 잡고 산동과 하남으로의 북벌을 본격화하였다. 우한의 왕징웨이 정부는 탕성즈의 군대를 앞세워 하남을 공격했고 때맞춰 국민당과 연합을 결정한 펑위샹의 군대도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장쭤린의 봉천군은 5월말에 이르러 정저우, 쉬저우 등을 포기하고 퇴각하여 산동과 하북으로 밀렸다. 한편 1927년 4월 21일 출범한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장제스의 북벌이 자신들이 1차 세계대전으로 세력권에 넣은 칭다오까지 확장되자 불안감을 느끼고 산동 지역의 일본 거류민들의 보호를 구실로 관동군의 일부를 산동에 파견하였는데 이를 산동출병이라 한다. 5월 30일 다롄에서 2000명의 병력이 출발, 6월 1일 칭따오에 상륙하여 지난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었다. 북벌군은 6월 중순 산동 남부에 진출하였고 산동의 철로 근간도 전화에 휩쓸리자 일본군은 7월 7일 지난으로 진군을 시작했고 만주에서 2200명의 병력이 증파되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움직임은 당연히 중국에서의 일본 이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북벌에 간섭하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산동출병에 장쭤린의 베이징 정부,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 장제스의 난징 정부가 모두 강력히 항의했다. 이중에서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가 가장 강경하였는데 우한 정부는 일본군의 출병을 영국군의 상하이 파병보다 비합법적이고 악랄한 것이라 맹렬히 비난하며 이를 일본이 중국에 21개조 조항을 다시 강요하려는 술책이라고 주장했다. 민간 차원의 반일 감정도 강화되어 곳곳에서 반일 조직과 일본 상품 불매 운동, 일본 기선 입항 거부 등이 벌어졌다. 하지만 7월 초 우한 정부마저도 국공합작의 폐기를 선언하는 소동과 공산당의 발악적인 봉기, 우한-난징 정부 통합 협상과 장제스의 하야라는 굵직한 중국 내부의 정치적 문제가 이어지면서 북벌은 주춤해졌고 이에 일본군도 8월말에 산동에서 철수함으로 소동은 일단 가라앉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산동의 일본 이익이 침해당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를 '적절한 자위 조치'라 불렀다.

2.2 2차 북벌과 2차 산동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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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반도에 도착한 일본군.

1928년 1월 초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4월 7일 2차 북벌을 개시하자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장제스가 지휘하는 4개 집단군 100만 대군이 북상을 시작했고 산동에 다시 전화가 번지자 지난 주재 일본 총영사는 1928년 4월 16일 일본군의 파병을 요구하였고 내각이 19일에 파병을 결정함으로 2차 산동출병이 이루어졌다. 봉천에 주둔한 3개 중대와 본토의 6사단 소속 8개 대대 총 11개 대대 5천명의 병력이 산동에 도착하여 칭따오와 지난에 배치되었다. 이 와중에 5월 1일 국민혁명군 10군 3여단을 필두로 국민당 군대가 지난에 입성하였다. 장제스는 각 부대원에게 규율 엄수를 명하는 한편 과중한 잡세를 폐지하겠다고 선전했다. 이에 지난 시민들은 장제스의 군대를 크게 환영하였고 국민혁명군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순조롭게 입성했다. 하지만 지난엔 일본인 1800명과 일본군 2300명이 있었는데 장제스는 4월 10일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지고 보호하겠다는 선언을 내렸으며 잘 무장된 일본군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각 부대들에게 성외의 촌락에서 일단 정지하고 장쭝창 군대와 시가전을 벌일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진격하게 하는 한편 일본군의 도발에 대해 가능한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외세와의 충돌을 피하려는 장제스의 자세는 전의 난징 사건을 처리하면서도 일단 보여진 적이 있었다.

4월 21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장제스는 "일본의 출병은 북벌을 방해하려는 것인데 북벌을 먼저 달성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혼란을 피해야 하고 후방을 안정시켜야 한다"라고 결의했고 다른 국민당 거물들도 일본과의 충돌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결의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방침을 굳혔기 때문에 5월 2일 이전까지는 일본군과 중국인 혹은 국민당군 사이의 소규모 충돌 정도는 있어도 일본군과의 무력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5월 2일 지난에 직접 와서 일본영사관 무관에게 혁명군이 지난의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하겠으니 일본군의 증파는 불필요하며 현재 지난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도 철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일본군 6사단장 후쿠다 히코스케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5월 1일에는 국민혁명군 1집단군 소속 5군단장이 일본 총영사대리 니시다에게 일본거류민들에 대한 보호를 보장하였다.

2.3 무력충돌의 발생

하지만 5월 3일 니시다 총영사대리는 장제스를 만나 출병의 불가피함을 통보했고 지난에 배치된 일본군의 경비상황을 설명하며 장제스와 후쿠다 사단장 간의 회견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만 하였다. 이에 장제스는 자신이 계속 북벌을 추진할 것임을 밝혔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 지난의 개항장에서 국민혁명군과 일본군이 충돌하였다. 혁명군은 일본군이 길을 막고 혁명군의 통과를 저지하여 충돌이 발생했다고 주장했고 일본군은 일본인의 상점을 혁명군이 약탈하여 일본군이 저지했다고 주장했다. 즉각 국민당은 일본총영사대리 니시다와 협상하여 정전에 합의하였으나 전투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혁명군과 중국인이 살해되었다. 일본군은 16명의 중국 교섭관원을 그들이 있던 건물에서 총알이 날아왔던 이유로 처형했으며 중국 외교부장도 억류했다. 3일 밤부터 정전을 위해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시가전은 계속 이어져 5월 5일에야 겨우 그칠수 있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이 300명의 일본인을 눈알을 도려내고 돌을 채워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론 13명이 죽고 28명이 실종된 수준이었다. 장제스는 장제스대로 일본인이 1천명의 중국인을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론 100명 수준으로 보인다. 장제스는 일본인들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이 사악하고 압제적이라고 저주하며 괴롭힘과 능욕을 일삼는 자들에게 굴복할 수 없다고 이를 갈았지만 힘의 부족과 일본이 무력을 사용할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인정해야 했고 영국과 미국 영사들이 중재에 나서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5월 5일 오후 2시, 장제스는 새로운 교섭단을 파견하여 니시다 총영사대리 및 쿠로다 참모장과 협상했는데 장제스는 후쿠다 사단장에게 평화를 위해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대를 철수하겠으며 일부 부대를 지난에 남겨두고 자신과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는 하남을 건너 북진할테니 일본군의 군사행동의 중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쿠로다는 외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한 일본 헌병이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게 할 것과 개항장의 치안유지를 일본군에게 맡길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의 위임장을 가진 공식적 대표와만 협상하겠다고 함으로 교섭이 이루어지진 못했다. 장제스는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부대만 지난에 남기고 지난을 떠나 6일 새벽 펑위샹과 북벌에 대해 협의했다. 이 협의에서 장제스는 북벌에 전념하고 펑위샹이 일본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를 본 것으로 보인다. 이에 펑위샹은 교섭단을 보내 일본과 교섭을 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한편 국민혁명군이 지난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단 소식이 중국 각지에 퍼지면서 상하이, 광저우, 우한 등지에선 반일 시위가 이어졌고 국민혁명군 사령관인 장제스는 항일 영웅으로 곳곳에서 칭송되고 있었다.

3 전개

3.1 일본군의 최후통첩과 최후의 교섭

5월 7일 오후 4시, 후쿠다 사단장은 장제스에게 5개 조항의 요구를 전달하고 12시간 내에 화답할 것을 요구했다. 요구는 다음과 같다.

1. 소요 및 폭행행위에 관계한 고급 지휘관에 대한 준엄한 처벌
2. 일본군의 입회 아래 일본군에 대항한 군대의 무장해제
3. 국민혁명군이 지배하는 지역에서의 모든 반일 행위, 선전의 엄금
4. 지난과 철로 주변 20리 내외의 모든 국민혁명군 철수
5. 이상의 조처에 대한 감시를 위해 병영을 일본군에 개방할 것.

이러한 일본군의 단호한 태도는 적어도 5월 4일과 5일 양일에 걸쳐 열린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었고 참모본부도 강력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었다. 다만 원래 계획에선 장제스와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지난에 묶어두고 교섭하려 했으나 장제스가 5월 6일 지난을 떠나버림으로 최후통첩으로 대응이 더욱 강경해진 것이었다. 중국 측은 장제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장제스의 허가를 받기 위해 회답 시간을 연기해줄 것을 청했으나 일본군은 막무가내였다. 장제스는 5월 7일 저녁 후쿠다의 요구를 접하고 6개 항에 걸친 회답을 작성하여 5월 8일 오전 후쿠다와 면담하게 했다. 장제스의 6개조 회답은 다음과 같다.

1. 본 총사령의 명령에 불복하여 중일 쌍방의 오해를 피하지 못한 본군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조사하여 법률에 따라 처분하겠지만 당시 일본군에서도 마찬가지로 행동한 자에 대해서 처분해야 한다.
2. 중일양국의 우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본 혁명군이 지배하는 지역 내에서는 반일 선전을 금지하는 명령을 조속히 내리고 분명하게 단속할 것이다.
3. 철로 주변 20리 이내의 각군에게 북벌에 출발하라고 이미 명령하였고 지난 등지에는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당한 군대를 주둔케 한다.
4. 철로의 역은 교통의 요충이므로 군대를 파견하여 지킨다.
5. 병영의 부대는 이미 전방 작전에 가도록하고 주둔하지 못하도록 이미 명령하였다.
6. 일본군에 의하여 억류된 관병과 무기를 속히 돌려달라.

일부 조건이 있긴 하지만 결국 전체적인 모양새론 일본군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라 중국 입장에선 상당히 굴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장제스는 9일 오전 지난 성내의 일부 부대만 제외하고 혁명군 부대를 전부 철수시켰고 9일 오후까지 철수되었다. 하지만 후쿠다는 최후통첩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인을 요구하며 8일 오전 4시까지 정식회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부득불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3.2 지난의 함락

이미 일본은 6일 오후부터 지난을 공격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8일 3사단을 추가 파병하였다. 일본군은 8일 오전부터 지난에 대한 포격과 폭격을 감행하여 많은 지난 시민을 살상했다. 철수하는 국민혁명군을 상대로도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상당수를 죽였다. 9일 밤부터 11일 아침까지 일본군은 격렬한 공격 끝내 지난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뉴욕 타임스의 핼리 어벤드의 보도로는 6천명의 중국인이 살해되었다 한다. 장제스는 다시 전권대표를 보내 일본군과 재협상하려 했다. 장제스는 40군장의 면직과 철로 연변 20리 내의 중국군 주둔 금지. 반일 선전 금지를 제시했으나 후쿠다 사단장은 장제스의 정식 위임장이 없단 이유로 중국의 교섭안을 씹었다.

5월 8일 난징에 돌아온 외교부장 황보에게서 지난사건을 보고받은 국민정부는 8월 10일 국민당 주앙집행위원회 연석회의의 결정에 따라 일본에 항의를 제출했고 국민정부 주석 명의로 국제 연맹에 일본을 제지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훗날에 그랬듯이 국제연맹은 무능의 극치를 보이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고 열강은 허약한 빈국인 중국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8월 12일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에게 호소가 보내졌으며 13일 영국, 프랑스, 미국에 국민정부 대표를 파견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열강은 어줍잖은 양비론을 내밀었으며 일본의 주장이 더 믿을만하다고 주장하는 듯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장제스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우리의 적개심을 노출해서는 안된다. 아니면 적과 싸울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복수심을 숨기고 보여주지 말자. 우리의 정신을 가다듬고 와신상담하자. 나라의 치욕을 되갚아 주기 위해 다 함께 똘똘 뭉치자. 자유와 독립이란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중국을 이끌어 가자!"

군사교섭이 결렬된 후 중국은 일본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하였으나 후쿠다 사단장을 비롯한 일본 군부의 강경한 태도로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입성함으로 미국이 국민정부 승인을 고려하는 등 국민정부의 위상이 향상되었다. 6월 15일 국민정부는 불평등조약의 속박을 없애고 평등 호혜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새로운 조약 체결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7월 7일 불평등조약을 폐기하고 신약을 체결하며 만기가 되지 않은 불평등조약은 신약 체결 전까지 임시판법을 적용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1] 이에 일본도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어 7월 17일부터 신임 외교부장 왕정정을 내세운 본격적 외교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중국은 일본군의 철수를, 일본은 중국의 사죄와 배상, 장래의 보장을 서로 주장하며 조건이 평행성을 달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섭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기에 장제스가 불평등한 중일통상조약의 폐기와 신약 체결을 요구하자 일본은 폐기가 없던 이상 자동 10년 연장 조항을 들먹이며 매우 불쾌해했다. 이렇게 교섭은 쌍방의 강경한 입장과 통상조약 개정 협상이 얽히면서 진전이 없었다.

장제스의 북벌이 완성됨으로 난징 정부의 위상이 더욱 올라가자 일본은 1929년 1월에 주중국일본공사 요시자와 켄기치(芳澤謙吉)를 난징으로 보내 중국과 협상하였고 3월 28일 일본군의 산동 철수, 쌍방이 각 대표를 보내 지난을 접수할 것, 지난의 불행한 사건은 허물을 캐지 않고 서로 군사 행동의 책임을 묻지 않으며, 공동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쌍방의 손실을 다시 조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4 여담

파일:제남사건.gif
우리나라에서 흔히 731부대의 생체 실험 사진이라고 돌아다니는 이 사진은 실은 제남 사건에서 희생된 일본인의 시신을 부검하는 사진이다. 이를 가지고 일본 혐한 우익들은[2] 조선인들의 반일 세뇌와 왜곡의 증거라고 한바탕 찧고 까불며 좋아했는데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왜곡이 밝혀진 사진을 731부대의 증거라고 들이미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참고 문헌

  • 북벌시기 장개석과 반제문제, 제남사건의 해결 교섭 과정과 반일운동의 대응을 중심으로, 배경한, 부산여자대학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6 관련 문서

  1. 난징정부의 이러한 교섭은 24개국을 상대로 하고 있었고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3개국이 신약 체결 협상에 응했으며 미국은 7월 25일 중국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했다.
  2. 예컨대 이마무라 사건의 주인공인 일본인 이마무라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