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 쿨리지

역대 미국 대통령
29대30대31대
워런 거메일리얼 하딩캘빈 쿨리지허버트 후버
공식 초상화
풀네임John Calvin Coolidge Jr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872년 7월 4일 ~ 1933년 1월 5일
재임기간[[ 1923년]] 8월 2일 ~ 1929년 3월 4일
서명
1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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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과묵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

그 유명한 잠 자다가 대통령이 되는 장면. 고향에서 휴양 중에 하딩의 부고를 듣고 대통령에 취임하는 걸 묘사한 그림이다.

1 일대기

1872년 버몬트 주에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통사람 생몰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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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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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스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화당에 입당, 이후 매사추세츠주의 노샘프턴 시장을 지내고 매사추세츠주 주지사를 역임했다.

그가 주지사로 재임하던 1920년대는 노동운동이 대단히 격렬했고 매사추세츠 주에서도 미국노동총연맹의 파업이 거셌다. 이에 쿨리지는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노동자를 강제해산시키고, 노동연맹의 위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했다.

"There is no right to strike against the public safety by anybody, anywhere, anytime!"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언제라도 있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반노동적이며 단호하고 완고한) 이 한마디로 쿨리지는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고 공화당 내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후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920년 워런 하딩의 러닝메이트로 대선에 출마하여 승리, 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하딩이 임기를 시작한지 2년이 조금 지난 1923년 8월 2일에 사망했다. 이 때 쿨리지는 고향인 버몬트 주의 아버지 집에 있었는데, 하딩이 죽은 다음날 오전 2시 30분 잠을 자고 있다가[1] 하딩의 부고를 접하고 아버지에게 대통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때 그의 아버지가 한밤중에 잡화점 계산대에 성경을 올려 놓고 불을 밝히고 쿨리지에게 대통령 선서를 시켰다는 일화는 대단히 유명하다. 이 선서가 끝난 후 쿨리지는 다시 세 시간 동안 잠을 잤다고. 이 이야기는 국내에도 《스펀지》를 통해 '미국에는 잠자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이 있다'라는 주제로 알려지기도 했다(다만 아버지가 판사라는 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취임 후 하딩의 남은 임기 1년간 쿨리지는 하딩 시대의 부패 공무원을 축출하는 등 공무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데 힘썼으며,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바로 이듬해 1924년 대선 때에 가뿐히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3]

이 때 쿨리지 캠프는 당대에 홍보전문가로 유명한 버네이즈란 인물을 영입했는데 버네이즈는 쿨리지의 딱딱한 인상을 풀어주기 위해 백악관에서 연회를 실시, 여기에 당시의 유명한 연예인들을 초대했고 이 자리에서 쿨리지가 환하게 웃는 표정이 포착되었다. 사실 이때 연예인들은 쿨리지를 웃기는게 거의 불가능했는데, 유머작가인 월 로저스가 성공을 거뒀다. 비서가 "이분이 바로, 쿨리지 대통령(President Coolidge)입니다."라고 하자 대통령에게 못알아 들은 척 "예? 성함을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어요?"라고 대답했다. 놀랍게도, 쿨리지는 이에 박장대소했다. 그러자 언론은 쿨리지가 웃는다!는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고 이 이미지 전략이 먹혀 무뚝뚝한 이미지와는 다른 면모가 국민들에게 먹혔다고 한다. 여담인데 로저스는 "쿨리지는 브라이언이나 대로우(Bryan or Darrow)보다도 훌륭한 진화의 증거이다. 말하지 않는 때를 안다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원숭이인간에게 물려준 가장 좋은 유산이기 때문이다."란 말을 남겼다. [4]

재선 후 쿨리지는 당시 전범 국가였던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는데 당시 부통령이었던 찰스 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줄여 독일의 경제안정을 도와 국제위기를 줄이려 했으며, 이 시대에 전쟁을 국가정책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어 평화적인 제스처를 국제 사회에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시궁창. 이후 독일의 행적이나 미국의 행동으로 인해 이 정책들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안습.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된게 쿨리지의 임기에 이루어진 업적중 하나. 아래에 추장 코스프레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백악관에서 원주민 추장들과 만나기도 했다.[5] 여담인데 후버의 러닝메이트였던 31대 미국 부통령 찰스 커티스(1860~1936- 재임 1929~1933)는 어머니가 미국 원주민이라서 원주민 보호에 앞장서던 인물이었고 쿨리지의 이 점을 칭송했다. 그리고 백인들과 동일한 흑인 및 유색인종의 헌법적인 권리를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남유럽, 동유럽계 이민을 제한하는 법안에 서명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잠 자다가 대통령이 된 인물'답게 대통령이 되어서 국무회의에서 조는 일이 많아 구설수에 올랐고 매일 11시간은 철저히 수면에 투자했다. 오후에 정기적으로 낮잠을 2~4시간 자고 항상 오후 10시에 취침에 들었다고. 그래서 당시의 저널리스트 헨리 L. 멘켄[6]은 "그의 최대 업적은 미국 역사상 어떤 대통령보다 가장 잠을 많이 잔 것이고 더 적게 말한 것이다. 그가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는 동안 미국은 추락했다"라고 비꼬았다.

또한, 그는 정치인으로써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경제에 무지했다는 것. 그가 아는 경제 상식은 '저축'밖에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 그래서 그는 재무장관 앤드루 멜런에게 경제 문제를 위임했는데, 이 인간이 기업가 출신 재벌인지라 시장에 대한 정부 불간섭주의(자유방임주의)를 펼쳤다. 이게 심화되자 주식시장의 투기열기는 과열되고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바로 세계 대공황이다.

그러나 쿨리지는 운 좋게도 이 사건을 모면했다.쿨리지 인생 최대의 행운 대통령에서 퇴임하던 해는 1929년 3월이었는데, 대공황은 1929년 10월에 터졌던 것. 더구나 쿨리지는 하딩 사후 1년 반의 임기만을 승계받았기에 다시 출마도 가능했으나 고사했던 것이다. 7개월 후에 공황이 터지는 바람에 비난은 후임자인 허버트 후버가 다 받았고 쿨리지는 별다른 비난을 받지 않았다. 날카로운 퇴임의 귀재 뒷날 역시 국무회의에서 잠자기로 유명한 로널드 레이건은 쿨리지의 수면습관 시장불간섭 정책을 존경해서 쿨리지의 초상화를 백악관에 소중하게 걸어 놓았다고 한다. 멜런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또한 간단명료함과 과묵함이라는 캐릭터, 검소함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당시 대중들 사이의 인기는 그럭저럭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1928년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한다는 선언을 했고, 퇴임 후에는 철도위원회 의장, 맹인협회 의장, 미국역사학회 회장 등 여러 자리를 역임했다. 그는 평생 작은 선거부터 대선까지 20여회의 선거를 치렀는데 거기서 낙선한 것은 단 한 번 뿐이라고 한다. 낙선한 것은 학교 운영회 이사 선거 뿐이었다고.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 나름의 능력이 있었던 것인지의 판단은 각자 알아서.

말년에는 자서전을 집필하고 여생을 보내다가 대공황 와중인 1933년 1월 5일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향년 60세. 부인이 시장에 가기 위해 외출을 했고 쿨리지는 면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이 시장에 다녀오자 쿨리지는 자택 마루바닥에서 쓰러져 숨져 있었다고. 사인은 심장마비.최후의 순간에도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죽기 며칠 전에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는지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I feel I no longer fit in these times..."

(나는 더 이상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같네...)

2 쿨리지 효과(Coolidge effects)

어느 날 쿨리지 대통령 내외는 생산성이 좋은 양계장을 견학했다. 영부인은 양계장 주인에게 어떻게 하면 이런 많은 달걀을 생산할 수 있고 수탉은 하루에 몇 번이나 교미를 하느냐는 둥의 질문을 했는데 이에 주인은 "우리 양계장의 수탉들은 하루에 한 12번은 짝짓기를 하지요"라고 말했다. 영부인은 이 말에 놀라면서 흡족한(…) 얼굴로 이 말을 대통령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주인은 쿨리지에게 이 얘기를 전했는데 쿨리지는 이 말을 듣고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질문을 했다.

"그럼 그 수탉은 항상 같은 암컷하고만 짝짓기를 합니까?"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매번 다른 암탉하고도 한다고 말하자 쿨리지는 "그럼 이 얘기를 아내에게 전해 주시오"라고 덤덤히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이 일화에서 나온 용어가 바로 '쿨리지 효과'라는 성의학적 용어이다. 즉 한 마리의 암컷과 여러 번 연속적으로 교미한 수컷은 더 이상 그 암컷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성행위 상대를 바꾸면 욕망이 증대되는 경우를 뜻한다고 한다. 스와핑 권장???

3 침묵의 쿨리지(Silent Cal)

외모에서 풍겨지듯 대단히 무뚝뚝하고 과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말과 글이 대단히 짧은 것으로 유명한데 한 문장에 사용한 단어의 평균이 단 18개에 불과했다고. 사실 대통령으로서의 업적보다는 그의 과묵함과 관련한 이야기가 더 화제가 되곤 한다(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이 그다지 좋지는 않은 이유도 있지만). 그의 과묵함을 알려주는 여러 일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워낙 장난기가 많아서 백악관에서 은근슬쩍 장난을 치곤 했는데 이와 관련한 일화도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장난기와는 별개로 미국의 전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초상화를 보고 대머리였던 존 퀸시 애덤스의 머리가 너무 반짝이는게 안쓰러웠는지 직접 초상화의 머리에 먹칠을 해줬다[7].

사실 쿨리지의 고향인 버몬트 주 자체가 무뚝뚝하고 눈치없이 사실만을 말하는 고장이란 인식이 널리 박혀 있는데(그 주 기후 자체도 차갑고 건조하다), 그는 전형적인 버몬트 인이었다. 버몬트인 관련 농담만 몇가지 소개하자면 이런 식이다.


"암소가 병에 걸렸어. 자네 저번에 암소가 아플때 뭐를 먹였나?"
"귀리를 먹였지"
(며칠 뒤)
"여보게 그걸 먹고 내 암소가 죽었다네."
"내 암소도 그랬어."
외지인이 갈림길에서 양쪽 모두 목적지로 가는 표지판이 걸려있자
"어느 쪽으로 가도 목적지엔 상관이 없지요?"
"나한텐 상관없소."

파일:Attachment/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jpg

1번 일화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캐리커처

  1. 쿨리지의 영부인이었던 그레이스 애너의 회상에 의하면 어느 날 쿨리지는 내각의 주요 요인 부부 동반 연회를 개최했다. 한 장관의 부인이 쿨리지에게 "대통령님, 오늘 전 다른 부인과 내기를 했는데, 대통령님이 세 단어 이상 말하면 제가 이겨요. 도와 주실꺼죠?" 그러자 쿨리지는 두마디로 내기를 이겼다. "You lose(당신이 졌소)."

  2. 쿨리지의 친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친구(쿨리지)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 그 친구가 침묵하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사람의 기분을 모르겠어."

  3. 쿨리지 본인은 자신의 과묵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개 나는 사람들에게 그저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대답할 뿐인데 그것조차도 너무 많아. 단지 그 한마디로 인해 20분 이상이 소요되어 버리거든."

  4. 1928년의 대선 당시, 쿨리지는 상술한 것처럼 대선 출마를 포기했다. 그리고 출마 포기를 발표하는 성명을 냈는데, 다음은 그 전문이다.
I do not choose to run for President in 1928.

나는 192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말로 이게 다다. 심지어 여기에 대한 위키피디어의 문서도 있다. [I do not choose to run ]

  1. 그의 침묵에 대해선 아들을 잃은 충격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 1924년 대선 직전에 그의 아들인 캘빈 주니어를 잃었다. 이 충격으로 원래 내향적인 인물이 더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아들을 잃은 쿨리지는 "대통령의 영광은 내 아들과 함께 가 버렸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2. 어느 날 뉴스 담당자가 쿨리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얼굴 표정 좀 푸시고요, 제발 "Good morning"이나 "hello"라도 좋으니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십시오." 그러자 쿨리지는 주변 측근들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저 친구가 지금 내가 의원들과 한 얘기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라고 하는군요." 더 많이 말했다!

  3. 열성 지지자가 쿨리지에게 "대통령님 연설을 정말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45분이나 계속 서 있었습니다."라고 하자 쿨리지 왈, "저도요(me, too)."

  4. 기자회견 중에 기자들이 "관세에 대해 하실 말씀 없습니까?", "농업 법안에 대해 하실 말씀은요?", "해군 예산에 대해 하실 말씀 없나요?"라는 둥 질문 공세를 폈는데 모든 질문에 대해 전부 "없소"로 일관했다. 기자들이 대통령 집무실을 나가자 그 뒤에 대고 "내 인용은 하지 마시오"라고 웃으며 말했다.

  5. 백악관을 정기적으로 보수하던 중에 지붕 서까래대들보에 불탄 흔적이 있었다. 이것은 1812년의 미영전쟁 때 영국군이 백악관에 캠프 파이어불을 지른 흔적이었는데 보수를 맡은 건축가는 대통령에게 이 부분이 너무 오래되어서 교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쿨리지 왈, "좋소, 교체하시오. 하지만 교체 비용은 영국 국왕에게 청구하시오."[8]

  6. 하루는 일리노이 출신 연방 상원의원 메딜 매코믹의 아내인 루스가 쿨리지에게 청탁을 했다. 자신의 친구였던 시카고폴란드계 사람이 연방판사가 되게 하기 위한 로비였는데, 그 청탁의 일환으로 폴란드계 이민자들과 쿨리지의 만남을 주선했다. 어떻게든 주선되어서 대면이 이루어졌는데 쿨리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했는데, 잠시 뒤 쿨리지는 입을 열고 "바닥의 카펫이 아주 좋지요? 이 카펫 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는데 쿨리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정곡을 찔렀다. "어떤 여성분이 여러분에게 판사 자리를 따게 해 주려고 예전 카펫을 닳게 했지요." 즉 루스가 청탁하느라 대통령 집무실을 하도 들락거려서 예전 카펫이 닳았다는 의미다.

  7. 쿨리지의 아내 그레이스가 '우리집 주치의'라는 제목의 책을 하나 사 왔다. 이 책은 많은 질병의 간단한 진단법과 치료법을 소개한 책인데 민간요법도 소개하고 있다.(참고로 이 서적은 오늘날에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그레이스가 외판원에게 낚여서 8달러를 주고 책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당시 8달러는 적지 않은 가격이었다.) 사 놓고 보니 돈을 비싸게 줬다는 후회가 든 그레이스는 남편 쿨리지에게 욕 먹을까봐 책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 태연히 탁자 위에 이 책을 올려 놓았다. 며칠 후 쿨리지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고 느낀 그레이스가 책장을 펼쳤는데 책 속표지에 쿨리지가 이렇게 적어 놓았다고 한다. "이 책에는 잘 속는 사람에 대한 치료법이 없군!"

하여튼 저런 과묵함 때문에 붙은 별명이 바로 '침묵의 쿨리지(Silent Cal).' 쿨가이 그러나 과묵한 사람이 대개 그렇듯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독설을 날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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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사진에서 보듯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았다(?). 그리고 의외로 인디언 머리장식이나 카우보이 코스프레복장을 하고 사진촬영을 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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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했듯 말 한마디를 꺼내면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명언을 꽤 남기기도 했다.

  • "나는 내가 말한 적 없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상처받은 적이 없다."
  • "보라, 아직도 그는(=워싱턴은) 저기 살고 있다." - 조지 워싱턴에 대해. 백악관에서 의자를 뒤로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고 한다.
  • "미국 국민의 가장 중요한 과업(Business)은 일(Business)이다."
  • "우리는 모든 일(everything)을 한번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일이던(anything) 한번에 할 수는 있다."
  • "세상에 어느 것도 끈기를 대신할 수 없다. 재능도 끈기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천재도 끈기를 대신할 수 없다. 성공하지 못한 천재가 얼마나 많은가. 교육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세상은 교육받은 낙오자들로 가득 차 있다. 끈기와 결단력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

마지막 말을 보면 그다지 의욕적으로 보내지는 않은 대통령 시절과는 별개로 근성을 추구하는 인생철학을 가진 사람이었던 듯.

만화 《크르노 크루세이드》, 영화 《체인질링》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쿨리지 대통령의 재임기다.(1928년 무렵) 물론 쿨리지는 작품과 전혀 상관이 없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실제 역사보다 늦게 대통령에 취임한다. 작중 오리지널 캐릭터인 미국 사회주의당조슈아 블랙퍼드가 쿨리지의 시기에 대통령으로 재직한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역시나 말이 없다
  1. 하딩이 죽은 곳은 캘리포니아샌프란시스코였다. 그렇기 때문에 쿨리지가 있던 동북부의 버몬트 주(감을 쉽게 잡으려면, 버몬트 주는 퀘벡과 붙어있다)와는 시간차가 +3시간 있었다.
  2. 이때 쿨리지는 1572만표를 얻어 54%(선거인단 382명) 대 28.8%(민주당 후보 존 데이비스 - 선거인단 136명), 16.6%(진보당 후보 로버트 라폴렛 - 선거인단 13명(위스콘신) )라는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뒀다. 흥미로운건 그가 미국의 가파른 인구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임자보다 표를 덜받고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하딩은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 이후 첫 선거를 치른 인물이었기도 했고, 또 워낙 미남이었기에 묻지마 말표로 1614(60.3%)만표를 얻었다. (이후로는 한동안 이런 경우가 없다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후임자 해리 S. 트루먼이 이런 경우에 해당됐다. 2차대전 후로는 케네디, 닉슨, 카터, 아버지 조지 부시, 클린턴이 있다.)
  3. 1924년 선거의 또 다른 기록이 있다면 양당제에서의 경쟁자 존 데이비스다. 그는 라폴렛의 선전으로 역대 미국 민주당에서 가장 적은 득표율을 거뒀다. 안습
  4. 윌 로저스는 훗날 쿨리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그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알았대?" (그 사람이 스스로 죽었다고 말을 안했는데, 혹은 그 사람은 죽으나 안죽으나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았냐는 것)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고인드립
  5.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백악관에서 추장들을 만난 대통령이 클린턴이 처음이라는 오류를 퍼트린 바 있다. 90년대 당시 《현대문명진단》에서도 미국 원주민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해 그렸던 편에서도 인디언 추장과 최초로 만난 대통령이 클린턴이라는 오류가 실려있는 걸 보면 당시 미국 내에서도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그냥 잊혀진 듯하다.
  6. 비꼬기와 무신론으로 유명한 저널리스트
  7. 허버트 후버 항목에 나와 있듯이 이 일에 대한 사과는 허버트 후버가 했다(...)
  8. 미영전쟁 당시 영국 국왕은 조지 3세, 쿨리지 임기 당시 영국 국왕은 조지 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