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中義一 1864년 7월 25일 ~ 1929년 9월 29일
역대 일본 총리 | |||||
임시겸임 / 25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 → | 26대 다나카 기이치 | → | 27대 하마구치 오사치 |
근대 일본의 육군군인, 귀족원의원, 남작, 정치가.
제26대 일본 총리, 42대 외무대신, 45대 내무대신, 초대 척식대신을 역임했다. 쇼와 덴노 시기의 첫 총리이다.
하기번(萩藩) 하급무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마을사무소의 직원과 초등학교의 교원을 거쳐 20세에 육군교도단에 입대, 이후 자신의 유능함과 조슈번의 후원이 어울러지면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여 본격적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다. 청일전쟁에 종군한 이후에는 러시아에 유학하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는 등 철저하게 러시아를 연구하여 '러시아통(通)'으로 불렸다. 러일전쟁에서는 만주군 참모로 근무. 1906년에 『수감잡록隨感雜錄』이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높게 평가되면서 육군 중좌로서 제국국방방침의 초안을 작성했다.
1910년(메이지 43년)에 재향군인회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다나카의 표밭으로 불렸다. 1915년에 참모본부 차장, 하라 다카시 내각 및 제2차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하고 여론확보를 위해서 육군성내에 신문반을 창설했다. 언플 돋네
하라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된 후 남작위를 받고, 육군대장으로 승진하는 등, 이대로 가면 원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평판을 들었으나 협심증으로 쓰러진 후 한직인 군사참의관으로 전보, 요양 생활을 하였다.
총리대신 취임 후.
그에게 정치가로서 재기의 기회가 온 것은 정우회(입헌정우회, 政友會)의 분열로 인해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정우회 총재직을 사임하면서 부터이다. 당초 가장 유력한 총재후보였던 요코다 센노스케는 분열의 책임을 지고 후보에서 사퇴하고, 당외인사에서 총재을 영입하기로 하였는데, 이토 미치하루나 고토 신페이 등이 거절하면서 다나카 기이치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정우회 입당 시에 300만엔을 지참한 것으로 인해 육군대신의 관방기밀비를 횡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으며, 총재취임후에는 군부대신 문관제라는 정우회의 정책공약을 파기하고 모리 가쿠, 구하라 후사노스케, 스즈키 기사부로 등 국수주의에 가까운 인물들을 영입하여 정우회의 색채를 친군부로 바꾸었다.
1927년 쇼와금융공황으로 인해 와카츠키 레이지로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다나카 기이치의 정우회에게 내각조성의 대명이 내려졌고, 정우회 총재로서 제26대 일본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내각은 전 총리나 차기의 수상자리를 노리는 인사 혹은 장래에 총리가 유력시되는 거물들로 가득찬 내각이라는 평을 들었다.
내치에선 금융공황을 모리토리움 선언으로 가라앉히고, 보통선거법을 실시했으나 안보법 등의 악법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기타 반정부 운동가들을 대거 검거했다.
외교에서는 적극적인 팽창정책으로 전환하여 자신이 스스로도 외무대신을 겸직하고 정무차관으로 대중국 강경 침략론자인 모리 가쿠를 앉혔다. 처음엔 둘은 잘 맞은 편이었지만, 그러나 모리의 지나친 강경론에 어느 정도는 조정의 필요성도 있다고 느끼는 다나카의 성향은 점차 대립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모리는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었는데, 모리 가쿠의 주도하에서 "동방 회의"가 개최되어 외무부, 육해군 등의 중국 관련 인사들을 소집하여 중국에 대한 외교 방침을 정할 정도였다.
1928년 장작림 폭살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초기에 관련자들에 대한 엄격한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육군내부의 반발에 밀려 포기하였다. 그러나 야당인 헌정당이 이를 계속 공격하고 쇼와 덴노까지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다나카를 더이상 보지 않겠다, 다나카는 아주 싫다"는 발언을 하자 결국 1929년 7월 내각총사퇴를 하면서 수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안습. 수상에서 사임한 후인 9월 28일에 귀족원의원 당선축하연회에 출석하였지만 병색은 완연하였고, 결국 그 다음날 협심증으로 사망하였다. 고작 3달 만이었다.
다나카의 몰락은 조슈번의 몰락을 상징하였고, 이후 조슈번의 후신인 야마구치 현 출신 육군장교들은 한동안 육군대학에 입학 추천을 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겪었다(...)
쇼와는 단순히 덴노를 질책한 것이 내각 총사퇴로 번졌을 뿐만 아니라 죽음으로까지 몰아버린 것에 책임을 느껴서 이후로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일체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여담으로 진위 여부 논쟁으로 유명한 일본제국주의 방침을 나타냈다는 "다나카 상주문"을 썼다고도 한다.
조선총독부에 잠입해 폭탄을 투척하고 성공적으로 탈출했던 독립운동가 김익상 의사가 이후 1922년에 이 사람을 암살하고자 시도했으나 실패해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