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원인

상위 항목 : 제2차 세계대전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을 작성한 항목.

정말 수많은 이유가 있으며 학자마다, 사상마다, 정치적 견해마다 그 이유는 전부 다르다. 존 키건의 경우 이런 대규모의 전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보기 위해, 나폴레옹 전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또한 이 전쟁을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보느냐 또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직접 다양한 서적들을 읽고 스스로 판단하기 바란다. 위키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소재이다. 여타 전쟁이 다 그렇지만 이건 더더욱 그런 행동이 필요하다.

2 각종 원인들

2.1 이념

2.1.1 파시즘

2.1.2 팽창주의적 민족주의와 게르만-슬라브 민족의 대립 문제

당시 유럽의 팽창정책을 지원하던 이념으로 민족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일제 강점시절의 독립운동과 통일 문제 등으로 인해 굉장히 일반적인 이념이지만, 이 이념 자체는 현대에 와서는 배격되는 분위기가 강한데, 그 이유가 민족주의가 가진 배타성과 공격성 때문이다.

19c 유럽은 이런 민족주의가 군국주의, 제국주의, 사회진화론과 결합되어 하나의 강력한 사상 체계로서 역할하게 된다. 개인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사회진화론이 제시한 약육강식의 세계 체제에 의해 민족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강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민족의 생존과 부흥이 지상과제로 떠올랐으며 이를 위한 수단은 군사력과 영토였다. 광대한 식민지와 거대한 군대는 단순히 한 민족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유럽인들에게 식민지 경쟁은 알짜배기 땅 경쟁이 아니라 각국의 생존을 건 투쟁으로 변모한 것이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 시절에 본격적으로 확산된 국민 개병은 병영문화를 전체 사회에 확산시킴으로서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원래부터 귀족 문화였던 병역의 지위는 어느정도 유지되어 병역을 수행하는 것은 명예로운 행동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이렇게 확산된 병영 문화가 팽창적 민족주의를 더욱 자극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당시 독일도 이런 문화에서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더욱이 독일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이어진 군대에 대한 숭상, 귀족들의 적극적 군복무, 프리드리하 대제 등 여러 군사영웅들이 사회문화적 주축이었다. 비스마르크 총리가 이뤄낸 독일 제국은 군사적 승리 위에서 세워졌고, 비스마르크 본인이 어떤 성향이었던 간에 독일 국민들에게 자국 산업과 군대에 대한 신뢰를 갖게 만들었다. 외교적 문제 해결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파시즘과 얽히면서 귀족 문화는 배격하고자 했지만 병영 사회만큼은 굳건했다. 참전 군인들의 경험도 이런 문화를 견고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이 게르만-슬라브 대립이다. 사실 흔한 인식과는 달리 나치는 게르만의 진로를 서가 아닌 동으로 잡았다.

작성중

2.1.3 반공주의

2.1.4 반유대주의

2.2 국제 정치와 경제

2.2.1 선진 제국주의와 후발 제국주의의 충돌

가장 교과서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사 검정교과서에 게재되었던 내용이다.

영국, 프랑스를 위시한 선진 제국주의 국가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위시한 후발 제국주의 국가간의 충돌이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지구상에 있는 땅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 이미 식민지들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이 깃발을 다꼽아놓은지 오래였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 살아남으려면 이 식민지들을 뺏어야하는데 이 과정에서 선진 제국주의 국가와의 충돌은 필연이었다.


이 주장의 허점은 당시 세계 정세를 너무 단순화해서 보았다는 점이며, 2차 세계대전을 1차 세계대전의 연장선으로만 생각했다는 데에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는 많았지만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나 다름 없는 신세였다. 프랑스는 1차 대전 후에 사회적으로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는 참호전에서 상당한 인적 자원을 소비했다. 더불어, 전쟁채권에 의존한 전쟁 수행은 프랑스 정부를 빚더미에 앉게 했으며, 재정적 수단을 이용한 경제 운용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게 된다. 이는 장기간의 경제침체로 이어졌으며 이는 당시 프랑스 행정부의 무능과 겹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영국도 많은 인적자원을 소모해야 했으며, 이는 해외식민지에 대한 통제약화를 불러온다. 또한 시급한 본국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해외식민지는 뒷전으로 물러났고, 대공황을 견디어 내기 위해서 벌인 일련의 정책들은 식민지 내부의 격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경제적 역량도 소모되고 있었다. 산업 국가로서의 영국의 기술역량은 이미 독일과 미국에 추월당한지 오래였다. 이런 독일의 산업화와 군비 증강이 1900년대 유럽 국가들의 군비 경쟁의 원인이며, 이것이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에 한정해서 본다면 이는 불완전한 주장이다. 이런 식민지 경쟁이 극에 달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이며 1차 세계대전의 최대 수혜자인 미국이 국제 정치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이런 19세기 제국주의 국제 정세는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런 주장은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일 수는 있어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 보기는 힘들다. 애시당초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발발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며, 전쟁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기도 매우 다른 형태를 띈다.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이 결국 백인우월주의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게르만 민족주의와 결합된 제국주의가 아닌가 싶지만, 그 둘은 유사하기는 해도 많이 다르다. 19세기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백인 우월주의가 계몽 정신에 입각하여, 무지몽매한 야만인을 계도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나치 독일의 파시즘은 1등 민족과 열등 민족을 분리하고 1등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열등 민족을 말살, 착취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실제 운영에서 19세기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통치 방식은 다분히 파시즘적이기는 하다.


이 주장은 오히려 일본에게 더 맞는 주장이다. 일본은 만성적인 천연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확장에 나서고자 해도,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은 이미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땅따먹기를 다 진행한 후였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일본에게 폐쇄되어 있었으며 유럽 식민지 본국에게만 열려 있었다. 완제품은 동남아시아 지역이 아닌 일본에서만 소비되었다. 한국에 대한 강제점령으로 시장을 마련했지만, 이는 일본의 확장을 위해서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중국에서의 시장 확대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이는 21개조 요구와 산둥 점령같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침략 정책으로 이어졌다. 또한 만주 등지로 확장에 나서며 이것이 성공기로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21년부터 1922년까지의 워싱턴 회의는 일본이 가진 각종 독점적 이권을 무효로 하였다. 이는 중국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일본은 1907년 만주협상 이후로 협력 관계에 있던 제정 러시아를 1917년 혁명으로 상실하였고, 일본의 석유 공급량 80%를 차지하던 미국에게 고분고분할 수 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대공황으로 인해 일본의 공업은 침체기에 빠졌고, 미국에 의한 일본의 입지 축소와 맞물려 일본 내의 군부 세력의 득세로 이어진다. 일본 군부는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은 군부의 독단적 행위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군부는 내각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이는 5.15 사건이라는 희대의 미친짓으로 이어진다. 이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이어지고, 이에 대해 미국이 일본에 제동을 걸기위한 금수조치는 군부가 스스로를 지옥에 내던지는 결단을 하게 만든 것이다.

요약하자면 일본의 자원수급과 확장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대부분 차단당했고, 이로 인한 악영향과 불만이 쌓이면서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전쟁 발발 직후 일본의 주요 침공 루트는 동남아시아의 프랑스와 영국 식민지였다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2.2.2 베르사유 조약의 불공정함

베르사유 조약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프랑스벨기에에 대한 전쟁 보상금을 추가로 물라 하여 1320억 마르크라는 거금을 배상금으로 강요하였다. 그것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날 기준으로. 당시 독일이 지불할 수 있는 배상금이 최대 100억 마르크였고,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지고 산업시설 가동이 정지되어서 화폐가치가 70%까지 폭락해 배상금 지불은 더욱 힘들어졌다. 결국 얼가리짬뽕된 바이마르 공화국대신 나타난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는게 이 주장의 근거. 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든 건 프랑스였다.

2.2.3 세계 대공황

전세계의 경제를 나락으로 빠트린 대공황이 2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대공황으로 인해 불안하게나마 유지되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붕괴되고 아돌프 히틀러나치 독일이 성립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대공황은 일본의 경제위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 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다른 여러가지 사건과 배경에 맞물린 결과 세계대전에 영향을 준것이다. 나치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이 세계 대공황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따라서 베르사유 조약의 막대한 배상금과 프랑스의 경제 위기 등이 짬뽕되며 독일의 석탄 산지인 루르에 대한 프랑스의 점령이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경제 대공황 자체가 원인이라는 것은 단순화한 견해도 아니고 충분히 의미있는 주장이지만, "막대한 배상금에 경제 대공황이 겹치면서 피폐해진 독일은 나치 정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는 것은 조금은 설명이 부족하다. 주변국들, 특히 프랑스의 경제 위기와 연결시켰을 때 비로소 의미있다. 단순한 경제적 위기로는 왜 독일에서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운 나치가 득세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 경제적 위기가 어떻게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고, 그것이 어떻게 파시즘으로 이어졌는지까지 설명해야 비로소 의미있는 설명이된다. 다시 말해 세계대공황이라는 경제적 위기가 주변국과 독일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주목해야지, 단순히 대공황이 일으킨 경기침체같은 수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프랑스의 경제위기는 1차 세계대전의 소모로 인한 것이며 세계 대공황 자체는 2차세계대전의 의미 있는 사건들과 상당수의 연결점을 갖지만, 이것들은 이전의 배경들과 더욱 강한 관계를 지니는 측면이 있다. 기존의 문제들은 이미 내재해 있었고, 점점 곪아가고 있었는데 대공황이 휘발유를 드럼통째로 던진 격.

3 결론

어느 원인도 한 가지만 봐서는 온전히 2차 세계대전의 발발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 항목에 기술된 내용을 전부 엮는다고 하더라도 힘들다. 이 항목의 대부분의 내용은 전간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1차 세계대전과의 강한 연관성을 의식한다면, 최소한 19세기 중엽까지는 가야한다. 중요한 이념적 원인인 파시즘과 공산주의,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의 탄생 등등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의 동유럽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설명해도 독소전쟁은 파악하기 힘들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독소전쟁에 비하면 우발적 충돌에 불과할 정도로 게르만 민족과 슬라브 민족 간의 민족적 대립, 그 사이에 있는 소수민족들의 역사는 중요한 원인이다. 2차 세계대전 이 항목에서 서술된 내용은 정말 부실하니 관련 서적을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