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思義
(? ~ 1402)
조선 초기의 인물.
조사의의 난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함흥에 연고가 있는 이성계가 반란을 주도했으며, 부자 간의 대결로 번진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감추기 위해 그를 주동자로 몰았다는 견해가 있다.
1393년에 의랑을 지내다가 현빈 유씨의 일을 함부로 논했다고 해서 여러 관리들과 함께 순군옥에 투옥되었다가 고향으로 귀양갔으며, 1397년에는 첨절제사로 있으면서 이성계의 명으로 경복흥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1398년에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순군옥에 갇혔으며, 안변부사를 지내다가 나중에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뜻을 존중하여 동북면(함경도) 지역으로 보내게 되었다.
1402년 11월 5일에 신덕왕후 강씨를 위한다는 이유로 동북면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박순을 죽이고 김옥겸을 붙잡았지만 김옥겸이 도망가 놓쳤으며, 이천우가 옛 맹주에 보낸 군사들을 붙잡았고 이천우를 애전에서 포위했지만 놓쳤다. 11월 27일에는 안주에 이르렀다가 살수에 주둔해 밤에 물을 건너다가 얼음이 깨져 수백여 명의 군사를 잃었으며, 조사의는 붙잡히고 압송되어 순위부에 투옥되었다가 12월 18일에 죽임을 당했다.
용의 눈물에서의 묘사
- 조사의(용의 눈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