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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자의 난 | ||
1차 왕자의 난 | → | 2차 왕자의 난 |
목차
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1 소개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난.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대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의안대군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2]
신덕왕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고 사병혁파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자들과 방계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쿠데타이다. 흔히 이방원의 난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왕족들이 태조에게 반기를 든 왕실 내분이다.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이방원을 지지했다.[3]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 뿐 이다.
2 발생 원인
2.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것인가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태조는 50대 후반이라 후계자를 생각해야 할 나이였다.
당시 태조의 아들들을 살펴보면 장남 이방우[4], 차남으로 훗날 정종이 된 이방과,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로 훗날의 태종인 이방원, 여섯째로 이미 요절한 이방연, 일곱째 이방번, 여덟째 이방석이 있다. 방연까지가 개국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고, 방번과 방석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아들이다. 세자책봉 당시 이방번은 12세, 이방석은 11세로, 당시 이방과가 36세, 이방원이 26세였으며 여섯째 이방연이 살아있었다면 20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5]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심했다. 이미 장성해 있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요절한 방연을 제외하면 크건 작건 다들 개국과정에 참여해서 일정한 공을 세웠다.
일반적인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른다면 이방우가 세자가 돼야 했겠지만, 그는 조선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이었던 창왕의 즉위에 공헌한 일로 공양왕 즉위 이후 정계에서 사라진다.(이방우 항목 참조) 게다가 폭음으로 1393년에 사망해 버린다. 방우가 생전에 가졌던 '적장자'로서의 위상은 방우의 아들 이복근 대신 차남 이방과에게 내려가 방우의 후손들은 정치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방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되었지만 여전히 걸리는게 있었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적극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6]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으로 들였다.(숙의 지씨, 성빈 지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고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원경왕후)과 혼인했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그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에 이르면 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7] 이러한 혼맥은 변방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구 왕조와의 온전한 결별을 위해선 나이가 어려 고려 구세력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방석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었다.[8] 게다가 방석은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정도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9]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
현종과 명성왕후의 적자인 숙종이 조선왕 중 가장 강한 왕권을 자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왕비의 자식이라는 점은 왕의 자식이라는거 못지 않게 정통성에 보탬이 되는 요소였다. 신하들에게 혈통상 권위를 완벽하게 인정받고 더 나아가 제대로 된 후계자를 갖춘 태조 자신의 권위도 높아진다. 태조 입장에선 왕의 아들이자 살아있는 왕비의 아들인 방석의 세자 책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이게 이성계 입장에서나 합리적이었다는 점이다.[10]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바로 그 인척 관계 때문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정통성에도 흠결이 생겼다. 살아있는 현 왕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사망으로 사라지면서 이복형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릉인 정릉(貞陵)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세자-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태조도 여기에 대한 걱정을 안한게 아니라서 나름대로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11]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중 이성계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12] 방번이 넘겨받는다.(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2.2 정도전의 요동정벌과 군사 개편
이렇게 세자위 문제로 조정에 혼돈의 카오스가 휘몰아 치고 있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의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13]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게 오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갔다왔다[14].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금의환향 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 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어떻게 대답하지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들의 지지만 잃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와중에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들과 종친들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는데 정작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공신들, 그리고 종친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공신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병들을 내주는 것은 자신들의 손발을 자르는 것이라 생각했고, 종친(공신들 다수 포함)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 이놈이 기어이 우리의 목을 치려고 수작을 부리는구나!!!라며 이를 박박 갈았다. 당연히 이들 공신과 종친 세력은 무인정사가 벌어졌을 때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 편에 서서 병력을 지원하거나 직간접적인 지지를 표명해 정도전과 그 당여들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3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당대 문집과 증언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난해한 요소들이 다수 포착된다. 반군의 병력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적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투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박위가 이방원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난전중에 전사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김사형과 이무 등은 미리 포섭당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투항한 것인지, 실록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 알 수 없다.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하륜 등은 확실히 반군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등이 살해되고 왕씨 학살에서 겨우 빗겨났던 개성 왕씨들도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고 태종대에 우의정에 오른다, 영안대군 방과는 반란 소식을 듣자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달아나 숨었고,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은 실록 묘사를 빌리면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15]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반군에 합류했다.[16]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이었다는 것. 이들은 황산 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 참전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전개 과정을 추정해 보면, 오랜 세월 이성계 가문에 충성했던 가별초들이 박위의 명령에 순종하며 이방원에게 칼을 빼들고 화살을 쏘았을 가능성은 넌센스이며 왕자들이 주축인 반군 또한 자기 가문의 정예 사병들과 싸우는 일은 가능한 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고 해도 피해가 심했을 것은 자명했기에 미리 지휘관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
그렇게 되면 반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고 궁궐에 입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에서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 내의 다수가 사전모략을 했거나 포섭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 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박위, 조온, 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들이 모두 투항한 후, 궁궐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들도 전세가 꺾였단걸 알고 투항해 모두 무장해제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한 다른 방어군들은 가별초를 포함한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반군측 자체 군세도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확실한 숙위군 지휘관들과의 밀약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실록에선 세자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 처럼 정말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걷어차가며 벌였다기보다는 사전에 주도면밀히 계획된 쿠데타였다.
난이 일단락 된 후,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4 여타 기록왜곡
1차 왕자의 난에 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이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이 반란의 주동자인 태종 시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고, 실록 편찬 멤버들 또한 직, 간접적으로 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들 무기가 없어 서로 창을 쪼개어서 들었다고 하고 또 겨우 수십 명이 경복궁 앞에서 진을 쳤다고 하지만 당연히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실제로는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나 안산군수 이숙번 등 쟁쟁한 사람들이 지휘하는 최소 수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야 군부의 최고기관인 삼군부와 궁궐의 근위병들에 맞설 수 있는 군세니까. 애시당초 이게 사실이라면 나라꼴이 참 막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명 남짓 되는 사람들에게 나라가 무너진다는것 자체가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데 충청도에서 군대가 북상하고 있는데 그걸 감지 못한 것도 어이 없는 일이긴 하다[17]
또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선 실록에서는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처형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왜곡되었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정도전 항목을 참조할 것.
게다가 실록의 1차 사료라고 할수 있는 승정원일기 들 마저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초기에 해당하는 기록들이 불타버린지라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5 태조의 병환
5.1 태조 병환 조작설
태종이 반란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제압한 곳은 정도전과 친구들이 놀고있던 술집이 아니라 태조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이다. 실록에서는 태조가 당시 와병중이라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들에게 체포, 구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 태조는 1차,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주 건강하게 지냈으며 조사의의 난 때는 태종을 겨냥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 등, 와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리고 당시 왕자의 난 전후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 실록에 병환에 대한 기록은 6번인데, 태조 7년에 무려 5번이 몰려 있고[18] 그 중에 왕자의 난이 발생한 8월에 4번이 몰려 있다. 그런데 8월 중 아픈 사람이 흥덕사에 가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었고, 태조의 병상태와 관련된 내용이라 해봤자 정종이 태조의 건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선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임을 봐서는 태조의 와병은 조작이고 태조가 구금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논리다.
당시 태조의 나이가 언제 갑자기 급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이고, 요동정벌을 앞두고 있는 비상한 상황인 시기인 것도 모자라 태조가 몸이 아픈데 재상이자 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정도전이 밖에서 술을 마신다? 태조가 아프면 병환의 중한 정도를 떠나서 즉각 궁으로 입궐해 상황을 살펴야 하는 정도전이다. 대응력이 떨어질 정도의 상황으로 태조가 병환이 있었다면 그 전에 이미 정도전은 경복궁에 들어가서 상황을 살피며 계엄령 선포를 할 것인가를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태조가 걸핏하면 골골대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면 상왕, 태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심심하면 사냥을 나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난 때 군대 지휘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죽기 몇 년 전에 딸을 얻을 정도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5.2 반론
실록의 기록을 믿는다면 태조가 진짜 아팠다는 쪽에 힘이 실린다. 태조가 하필이면 그 날에만 앓아누웠다 하더라도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나이(64세)라면 그 나이에 한 번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 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병환은 1398년에 꾸준히 있어왔다. 즉, 적어도 그 년도에 태조는 상당히 아팠다는 것이 되므로 후일 태조가 건강했다 한들 그 당시의 병환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실록 기록을 보면 그 태조치고는 너무 무기력해보인다. 다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정도전 일파가 그렇게 술이나 마시면서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 중병까지는 아니었고, 단지 건강이 조금 악화되어서 태조의 대응력이 떨어진 상황이었을 경우가 높다. 따라서 태조가 대응하고 싶어도 병환 중 태조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경복궁이 장악된 상태라서 태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렵기는 했을 공산이 크다는 것.
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방원 일파가 마침 태조가 병이 나서 드러누워있는 사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담으로 이 항목은 드라마 정도전이 종영된 이후 기레기들에 의해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고 무단 도용되었다.(...)기사 1, 기사 2
6 1차 왕자의 난을 다룬 사극
뭐니뭐니해도 용의 눈물이다. 1차 왕자의 난을 대단히 스펙타클하게 그려냈으며 정예 병사들이 입고 있는 경번갑도 볼 거리. 이방원은 세자 방석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라는 눈치를 보냈고 방번과 이제는 함께 그냥 보내주었으나 이들은 뒤쫒아간 이방간에게 제거된다.[19]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록의 상반된 기록들을 참고하여 의미있는 모습을 그려냈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한명회의 살생부씬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실제 왕자의 난의 전개과정과 차이가 생겼다. 본시 남은의 첩실의 집에 모여있던 인물들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은 물론이고 장지화, 이근, 이직, 이무 등 다수가 있었는데 극중에서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만 있는것으로 묘사했고 본시 이자리에서 죽는 장지화, 이근은 입궐하란 명을 받고 궁문에 들어섰다 이숙번이 살생부에 줄을 긋는것과 동시에 무사들의 철퇴에 맞아죽는걸로 바뀌었다. 본시 습격현장에서 하인 복색으로 변장하고 도망치는데 성공한 이직도 궁문을 들어서다 맞아죽는 오류가 나왔다. 다행히 이직이 비중이 크지 않았기에 남은의 형 남재와 함께 이방원을 찾아가 등용되는 장면으로 은근슬쩍 부활시킬 수 있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정도전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건이기에 최종화로서 이 사건을 다룬다. 이방원이 죽이자, 제거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등 싹수를 보였기도 했지만, 이방원은 거사가 일어나기 전에 정도전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에서 하륜의 충청도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계기로 무인정사를 일으킨다.[20] 태조는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훈련 덕에 무리를 하게 되면서 자리에 눕게 되었으며, 도당 내에서 정도전의 우군이 없었기에 이지란이나 조준 등 이방원에게 호의적이라 볼 수 없는 사람들도 결국 이 사건을 방조하거나 받아들인다. 작중에서 정도전은 도망치지 않아서 억류된 뒤, 이방원에게 '재상정치에 대한 포기를 대가로 모든 정책을 받아들이겠으니 내 부하로 들어오라'고 회유를 받으나 거절. 참살당하였으나, 태조에겐 '정도전은 도망치다 붙잡혀 애원하다가 살해당하였다'고 이방원에게 왜곡된 사실을 듣는 장면이 나오면서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설을 모두 채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맡았던 유동근은 정도전에서는 태조로, 용의 눈물에서 세종 이도역을 맡았던 안재모는 정도전에서 이방원으로 출연한다(...).
2015년 3월에 개봉했던 영화 순수의 시대 또한 이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장혁이 이방원을 맡았는데 영화 자체의 평가는 나빴어도 장혁의 킬방원(...)연기는 괜찮았다는 평가.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47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일단 태조 와병설을 택한듯, 태조는 등창에 걸려있었다. 물론 다른 드라마들과는 달리 물흐르듯 진행되지 않고 이래저래 삐걱거리는 순간이 많았지만 운좋게 요동 출정이 연기되고, 안산군수 이숙번의 병력이 예정대로 이방원 병력과 합류했다. 그리고 이방원-이방간의 사병들은 정도전 일행이 머무르던 송현방(남은의 별장)을 피바다로 만들며 정도전, 남은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그에 이어서 삼군부를 공격하여 그곳을 그들의 통제하에 놓게 하였다. 물론 정도전의 경호원인 이방지를 떨어뜨려 놓아 방해요소를 제거한 상태. 그리고 결국은 성균관 대성전으로 피신한 정도전을 이방원이 직접 주살해버린다.[21] 48회에서는 남은이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하고[22][23] 이방원은 궁으로 진격하여 세자 이방석도 참살한다. 한 편 이방석의 형 이방번은 정황상 이방간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 태조실록에 기록된 공식 사건 개요이다. 물론 현실은... 이하 항목 참조.
- ↑ …9월에 공소의 난에 공(정도전)이 천년(天年)을 마치지 못했다. -삼봉집, 8권 부록 중 <사실>(事實).
- ↑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되었기에 다른 종친들과 달리 실질적인 보탬이 되진 못했을 것 이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 ↑ 당시 그의 장남이자 태조의 장손인 이복근이 16세쯤 되었다.
- ↑ 1385년 과거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방원은 1382년 당시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 ↑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건 야사에 불과하며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고 맏이로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하면서 후계자는 되지 못한데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 ↑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
- ↑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인물이 방석의 첫 부인인 폐세자빈 유씨. 그녀와 방석이 혼인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만약 조선 건국 이전에 혼인한 고려 구세력의 딸이라면 그녀의 폐출 이유로 흔히 알려진 내시 이만과의 간통이 누명일 가능성이 생긴다.
- ↑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
- ↑ 다만 군웅할거 끝에 건국된 호족연합정권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던 고려와 조선을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또 혜종처럼 적장자 계승을 했다가 오히려 낭패를 본 경우도 있지만, 적장자 계승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나라가 흔들린 경우 또한 굉장히 많다.
- ↑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
- ↑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
- ↑ 이 과정에서 홍무제는 정도전 파벌이면 억류하거나 죽이고 그의 반대파나 중도파면 우대해 자신의 뜻을 전한다.
- ↑ 이 때 태조는 권근이 노모가 계시는데도 스스로 자원하여 명에 가는것에 고마워서 노자까지 두둑히 주어 그를 배웅했다.
- ↑ 이 시점에서 '이성계의 적장남은 방과다.' 이복근한텐 왕위를 주장할 정통성 같은 건 없었다.
- ↑ 이로 인해 이성계의 노여움을 사 조영무와 함께 잠깐 유배당한다. 정황상 미리 포섭당한 인물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 ↑ 그나마 먼곳의 군사가 동원 된 인조반정만 해도 비교적 수도에서 가까웠던 황해도 장단과 강원도 이천군의 군사였다. 이를 통해 충청도보다는 안산에서 동원된 병력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 ↑ 그 중 한 번은 천도를 위해 순방하던 중에 난 병으로 인한 물갈이로 추측된다.
- ↑ 사실 방원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살려주겠다 해놓고 막상 옆에있던 방간이 칼 들고 뛰어가자 "형님!!"하고 그를 딱 한번 부르기만 하고 그냥 지켜본다.
- ↑ 작중에는 이방원이 밀리다가 하륜의 충청도 군대가 투입되면서 전세를 뒤집는 것으로 묘사된다.
- ↑ 다만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 등의 사극에서는 베어 죽인 반면에 여기서는 찔러 죽인다.
- ↑ 용의 눈물과 정도전에서는 남은이 정도전보다 먼저 죽었다.
- ↑ 다만 태종의 의심(조영규 장례식에 온 주변 지인들을 사랑채로 모셨으나 이신적만큼은 제외했다)을 받는 이신적이 태종 밑에서 입신양명 할 수 있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추격하는 병사들에 의해 칼을 맞아서 도망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물론 이 일로 이신적은 관직에 복귀하게 되고 후속작에서 보듯이 우의정까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