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인 조사의(趙思義, ?~1402)가 태종 2년(1402년)에 일으킨 난.
그리고...30여년 간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던 상승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패배한, 이성계 인생 최후의 전투.
1 소개
조사의는 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관직을 잃고 연금상태에 처했지만, 나중에 태종이 태조 이성계의 뜻을 존중하여 동북면(함경도) 지역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후 조사의는 신덕왕후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동북면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태조도 함흥에 머물면서 조사의의 난을 인정하여 명분을 제공했다.
2 파죽지세의 반란군
조정에서는 박순ㆍ송류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이들을 죽이고,[1] 이천우의 기병 100여 명을 사로잡고 파죽지세로 내려와 이천우의 군을 격파하였다. 기세 등등한 조사의의 군대는 평안도 덕천·안주 방면으로 진군하여 군사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진로를 저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3 정부의 진압
11월 27일 청천강에서 이숙번이 이끄는 4만명의 진압군 1만명의 반란군 사이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부하들이 이산하자 안변에 돌아와 아들 조홍과 함께 관군에 잡혀 12월 7일 도성으로 압송되었다가 18일 주살되었다.
4 진정한 흑막?
하지만 현대의 연구가들은 이 난리에서 조사의의 비중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황으로 볼 때, 이 난은 태조 이성계 본인이 일으킨 것이라는 견해이다. 함흥에 연고가 없고 세력이 없었던 조사의보다는 태조가 본거지인 함흥에서 난을 일으키는 것이 더 이치에 맞기 때문. 태조의 쿠데타가 급기야 부자 간의 대결로 번지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감추기 위해 병풍에 불과한 조사의를 주동자로 몰았다는 설이다. 실제 처벌수위도 가벼운 축에 속했다. 조선 국왕이 친정을 한 유일무이한 사례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적당히 뭉갤 필요가 있었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태조 흑막설을 참고했는지 태조가 조사의와 힘을 합쳐 난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한다. 조사의가 이방원에게 반란을 일으킨 동기를 묘사하기 위해서인지 이방원과의 악연으로 인해 중앙 조정에서 쫓겨나 복수를 결심했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이 사건 이후 함흥차사의 일화와는 달리 태조는 할 수 없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이후 일어난 이시애의 난까지 겹쳐서, 함경도는 조선 왕조의 발상지임에도 불구하고 두고두고 유형무형의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 그리고 이들은 함흥차사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