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마셜

John Marshall
1755년 9월 24일 ~ 1835년 7월 6일

미국의 제4대 대법원장. AP 미국사의 4대천왕 중 하나

오늘날 미국 연방 대법원의 헌법재판권한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자,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법원장 중 하나이다.

제 1대 대법원장이었던 존 제이(John Jay)는 독립 직후, 영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약을 맺으려 파견되었지만, 정작 원하는 것은 얻지 못하고, 단순히 평화만을 얻는, 일종의 굴욕적인 조약의 체결로 평판을 잃고 사임하였다. 2대는 존 러트리지(John Rutledge)였지만 인준이 되지 못하였고[1], 3대였던 올리버 엘스워스(Oliver Ellesworth)는 건강상의 이유로 겨우 1년정도를 역임했다.

마셜은 그의 사임 후 제 4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존 애덤스가 물러나기 전에 연방주의자인 대법관을 앉히려고 했었고, 존 제이가 다시 하길 원했다고 한다. 뉴욕 주지사에 있었던 존 제이는 대법원 일 재미 없고, 힘도 약하다며 하기 싫다고 거절한다. 국무장관이었던 마셜은 그 편지를 애덤스에게 전달하였고, 애덤스는 고민 끝에 "마셜, 당신을 대신 지명해야 되겠군" 하고 지명을 해서 대법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

토머스 제퍼슨의 사촌이었으나, 철저한 연방주의자였으며,[2][3] 토머스 제퍼슨 당선 이후로, 역사적으로 사라졌던 연방주의자들의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대법원장으로서의 자질은 가히 천재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오늘날 헌법재판의 역할을 완성하고, 연방 정부의 힘을 키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중 하나다.

그 당시 미국 연방대법원은 헌법에 명시된 사실만으로는 정확히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되는 지 명확하지 않아 권한의 종류와 범위를 확정 지을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가장 약한 기관이었었다. 얼마나 권한이 약했으면 공식 건물도 없어서 의회 건물안에서 판결을 내렸을 정도니 할말없다. 상술했듯이 존 제이가 다시 대법원장을 맡아달라는 애덤스의 요청을 쿨하게 잘라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4] 그러나 어떤 사건이 있었으니...

존 마셜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고, 오늘날 연방대법원이 헌법재판의 권한을 갖도록 확립시킨 사건은 Marbury v. Madison 이란 소송이었다[5].

흔히 알려진 대로, 존 애덤스는 선거에서 진 직후, 자신의 대통령직으로서의 마지막 날에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키고, 연방주의자들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정적으로 제퍼슨 엿먹일려고 판사의 수를 약 2배 가까이 늘리고, 전부 연방주의자로 채운다. 그러나 그 당시, 워낙 급하게 만들어진 법안이라, 실제 존 애덤스는 임명장을 전부 완성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재판관으로서의 임명장을 받지 못한 사람이 남게 되었다.

이 중, 윌리엄 매버리(Wiliam Marbury)란 판사는 자신의 임명권을 받기 위하여, 그당시 국무부 장관이었던 제임스 메디슨에게 임명권을 요구하고, 이 당시 존 애덤스의 꼼수를 못 마땅하게 여겼던 토머스 제퍼슨제임스 매디슨으로 하여금, 임명장을 주는 것을 거부하여,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오게 된다.

이에 존 마셜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연방주의자였던 그는 같은 연방주의자인 윌리엄 매버리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사실 토머스 제퍼슨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가볍게 씹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원래 연방대법원 자체는 판결을 내리는 역할만 수행할 뿐, 그것을 시행할 힘은 없다.[6]

만일 토머스 제퍼슨이 연방대법원의 말을 무시하면, 연방대법원의 힘이 없어질 것을 안 존 마셜은 이에 희대의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의 판결은 간단했다.

"분명 법원법에 따르면, 매버리는 판관이 될 자격이 있고, 정부는 그에게 임명장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1789년에 제정된 법원법은 헌법에 위배되고, 결과적으로 법원법은 무효다."

분명 마셜은 한 사람의 연방주의자를 잃었다. 그러나 이 판결로 연방대법원은 법률을 심사하여, 헌법에 위배되는 법은 위헌처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7], 법원법은 다시 제정되게 된다. 대법원에게 위헌여부를 심판할 힘을 준 Marbury v. Madison 판결문의 일부가 대법원 건물에도 새겨져 있다.
marbury2.jpg

"It is emphatically the province and duty of the judicial department to say what the law is." (“단언컨대 무엇이 법인지 결정하는 것은 사법부의 영역이자 의무이다")

그리고 이후 35년간 연방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연방대법원의 권한은 무지막지하게 막강해졌다. 본격적으로 행정부가 커지기 전까지는 거의 1,2위를 다툴 정도로...[8]

이 밖에도 마셜은 앤드류 잭슨 시대까지 장수하면서, 여러 미국 역사에 중요한 판결들을 남기게 되는데,

  • 매컬럭 대 메릴랜드(McCulloch v. Maryland:1819)판결
연방의회가 국법은행을 창설할 권리가 있는가에 관한 판결로 연방의회가 어떤 권한을 명시적으로 갖는다면 그권한을 행사하는데 필요한 권한도 묵시적으로 갖는다는 내용이다 이 묵시적 권한이론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기번스 대 오그던 (Gibbons v. Ogden : 1824)판결
뉴욕주가 증기선개발을 조건으로 로버트 풀턴과 로버트 리빙스턴에게 준 독점 운항권을 인수한 오그던이 기번스의 운항을 막는 승소판결을 받아내자 기번스가 낸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기번스가 연방정부의 인가증을 받았음을 이유로 주정부는 통상에 관한 연방법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기번스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이로서 모든 미국 해상의 독점운항권이 폐지된다. 이 판결은 미국헌법의 통상조항 해석에 크게 기여했다.
  • 체로키 대 조지아 & 우스터 대 조지아(Cherokee v. Georgia & Worcester v. Georgia : 1831)판결
체로키쪽이 대표적으로 언급된다. 둘다 인디언들과 조지아주의 대립에 대한 판결이다. 당시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해준 남서쪽 서민들이 요구한 인디언제거를 하려고 했고, 조지아주는 체로키와 우스터 인디언 부족에게 땅을 팔고,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할것을 강압적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두 인디언 부족은 땅을 팔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인디언 부족의 배신자가 나와, 부족장의 이름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조지아 주 정부로부터 돈을 챙긴다. 두 인디언 부족은 대법원에 소송을 걸고, 결과는 뜻밖, 존 마셜은 체로키와 우스터 부족은 고유한 문화와 정치체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의 나라(nation)로 봐야하며, 그러므로 주 정부가 아닌 연방정부가 직접 교섭을 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며. 주 정부와 인디언 부족의 계약서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다만, 그뒤는 위에 나왔듯이 잭슨이 판결을 시크하고도 무심하게 씹고 무력을 동원해 두 부족을 몰아낸다. 그 추방과 인디언들의 고난을 눈물의 길 (Trail of tears) 이라고 부른다. 굉장히 중요한 판결으로, 수많은 인디언 학살과정에서 (특히 앤드류 잭슨) 인디언 부족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했다는, 인권보호적인 관점이 부각되는 판결이다. 대통령이 대법원 판결 따윈 개무시 해도 된다는 판결......이라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된다. 적어도 근대적 형태의 사법제도를 갖췄다면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게 되면 당연히 위법이며,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탄핵도 가능하다. 미국은 한국처럼 탄핵심판 자체가 한 번이라도 완료된 적은 없으나, 탄핵 시도 자체는 여러 차례 있었다. 결국 잭슨 대통령이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한 것은 미국이란 나라 자체의 사법제도가 그때까지 미비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미국만 그런 것은 아니고,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다 그랬지만.
  • 다트머스 대학 대 우드워드 (Dartmouth College v. Woodward)판결
다트머스 대학은 식민지 시절에 영국 왕으로 부터 대학 자치권을 문서로 보장받았는데, 독립한 지 30년이 지나서 뉴 햄프셔 주 정부가 이것은 무효이며 대학 교직원 임명 권한 등을 주 정부가 가지겠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학 측과 주정부 측에서 임명한 이사회 대표 우드워드 사이에서 재판이 벌어지게 되는데, 마셜은 비록 더 이상 미국이 식민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 정부에서 계약을 위반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에서는 존 마셜을 매우 정치적이면서도 뛰어난 처세술을 발휘해 품위를 잃기는 커녕 명망만이 높아지는 고급스러운 책략가로 평가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끌어내는 책략가로서의 기질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싫어했던 제퍼슨이 마셜을 견제하기 위해 임명했던 다른 대법원 판사들이 마셜에 매료되어 하라느 견제는 안하고 충성을 다 바쳤다고 한다.
  1. 휴회 중 임명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식으로 상원의 인준을 거쳐야 되었다. 워싱턴 정부와 상원은 존 제이가 체결한 제이 조약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존 러트리지는 제이 조약 비준을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서 상원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상원은 그의 정식 인준을 거부하였다. 뛰어난 대법원장 중 하나로 여겨지는 얼 워런도 휴회 중 임명된 케이스였기에 상원의 정식으로 지명 찬성을 받아야 되었던 상황이었다. 남부 출신의 민주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아야함을 잘 알고 있었던 워런은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정식으로 지명 찬성을 받기 전까진 이 쟁점에 대해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2. 어릴 때부터, 워낙 엄친아였던 토머스 제퍼슨과 비교되면서 자라, 실제로 굉장히 열등감을 느꼈다고 한다. 제퍼슨 XXX 해봐. 근데 자기는 다른 의미로 법조계의 엄친아가 돼버렸으니 이건 뭐...
  3. 제퍼슨도 마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마셜을 교활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는데 사실 제퍼슨과 마셜은 성격이나 품성이 워낙 정 반대인 부분이 많아서 서로를 싫어한 것으로 보인다.
  4. 그래도 존 제이는 그 미약한 힘을 가진 대법원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노력했기에 평가 자체는 나쁘지 않다.
  5. 위헌법률심판 관련 판례로 유명하지만, 특정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의 결정이 최종적 결정이 된다는 미국판 통치행위 이론인 '정치적 문제(political question)'를 최초로 언급한 판결이기도 하다. 물론 이 사건에서는 적용되지 않았고, 실제로 적용된 사건은 로드 아일랜드주의 반란을 다룬 Luther vs. Borden 사건. 이런 점만 봐도 연방주의자로서의 위치는 아주 굳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흔히 '잭슨 왕'이라 불리는 앤드류 잭슨이 가볍게 연방대법원의 말을 씹으면서, 인디언들을 몰아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7. 위헌법률 심사에 대한 문제 자체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논문에서도 이미 등장하는 등 마셜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실행한 것은 마셜이 처음이다.
  8.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연방 의회의 엄청난 분노를 사서 대법원 해체 논란까지 등장했기 때문에 결국 드래드 스콧 사건이 있기 전까지 거의 50년간 단 한건의 위헌법률심판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