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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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존 스탁스(John Levell Starks)
생년월일1965년 8월 10일
191cm (6 ft 3 in)[1]
체중82kg (180 lb)
출생지오클라호마 주 털사
출신학교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포지션슈팅가드
소속팀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1988~1989/1999~2000)
체다 래피즈 실버불리츠(CBA) (1989~1990)
멤피스 로커스(WBL) (1990)
뉴욕 닉스 (1990~1998)
시카고 불스 (2000)
유타 재즈 (2000~2002)
등번호3번(뉴욕), 9번(골든스테이트, 시카고, 유타)
수상내역NBA All-Star (1994)
All-NBA Defensive Second Team (1993)
NBA Sixth Man of the Year (1997)
1997년 NBA 올해의 식스맨
토니 쿠코치존 스탁스대니 매닝

1 소개

NBA의 농구선수. NBA 선수 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선수였다.

2 커리어

1965년 8월 10일에 오클라호마 주 털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을 했는데, 그래서 스탁스는 편모 슬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자연히 그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린 탓에 불량 소년으로 낙인찍혔고, 그 동안 그는 마리화나를 피우거나 싸움에 끼어드는 등 불우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존, 나에게는 네가 유일한 희망이란다. 내 희망이 무너지면 나는 더 이상 살지 못할 거야."

라는 한 마디에 그 동안의 비행을 청산하고 학업에 전념하며 농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2]

대학 시절에 다른 선수들과 달리 그는 4번이나 학교를 옮겨다녔는데, 초반에는 로저 주립 커뮤니티 칼리지 등 2개의 단과 대학을 다니다가 3학년 때 털사 커뮤니티 칼리지로 전학했다가 이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사실 스탁스가 이렇게 방황을 한 것은 본인의 비행 탓이었다. 위에 언급된 대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스탁스는 대학에서도 완전히 이를 청산하진 못했는데, 로저 주립을 다닐 당시는 다른 학생의 스테레오를 훔치다가 걸려서 강제로 다른 대학으로 편입해야 했다.[3] 이 일로 그는 5일간 유치장에 갇혀야 했다. 그는 이후 노스 오클라호마 컬리지로 가서 경기당 11점을 올리며 자리를 잡지만 이번엔 기숙사에서 대마초를 피우다 걸려서 쫓겨난다. 이후 털사 컬리지로 가서 무사히 졸업하게 된다.

1988년 졸업 이후 드래프트에 오르지도 못한 채 운좋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입단한다. 그러나 하필 당시 워리어즈에는 같은 포지션에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이 해에 "올해의 신인" 상을 수상하는 거물 신인 미치 리치몬드가 버티고 있었고(신임임에도 무려 평균 22점을 기록), 스탁스는 36경기동안 평균 8.8분 4.1점이란 초라한 성적을 내고 짤리고 만다. 이후 자유계약으로 하부 리그격인 CBA의 한 팀으로 이적해 활동, 이후 소규모 하부리그인 WBL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에 뉴욕 닉스의 스카우터에게 눈도장을 받고 입단하게 되었다.

로스터에서도 꼴찌격이었던 스탁스였던만큼 당연히 거의 입지가 없었고 스탁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짤리기 직전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반전이 일어나는데 당시에도 겁이 없던 스탁스는 시즌 초에 연습 도중 리그 최고의 센터이자 블러커 중 하나였던 패트릭 유잉에게 인유어페이스를 먹이려고 하다가 떡블럭(...)을 당하고 무릎부상까지 당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이러한 불행은 오히려 다행이 되었는데, 규정에 따르면 연습 도중 부상당한 선수를 당장 방출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로스터에 남게되었는데, 그가 회복이 될 때쯤 닉스의 후보 슈팅가드였던 트렌트 터커가 부상당하는 행운(?)이 찾아온다. 그 덕분에 기회를 얻은 스탁스는 이후 경기당 19분 정도 출장하며 특유의 승부근성과 끈질긴 플레이로 인상을 심고, 그 다음 시즌에는 명장 팻 라일리의 지도 하에서 전경기를 후보가드로 출전, 전 시즌에 비해 거의 두배에 가까운 13.9점을 올리게 된다. 이 시즌에 닉스의 심장격인 '킹콩센터' 패트릭 유잉, 찰스 오클리와 삼각편대를 결성해 1991/92 시즌에 디비전 1위로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했으나, 마이클 조던을 앞세운 시카고 불스에게 패했다. 여담이지만 작은 키에도 폭발적인 점프력을 자랑했던 스탁스답게 1992년 덩크 콘테스트에 참가하는데, 1라운드 2위로 통과해 2라운드에서 탈락. 최종 4위의 성적을 기록했다.

마침내 그는 92-93시즌에 80경기 중 51경기를 주전으로 출장하며 17.5점을 기록, 팀의 주요 선수 중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된다. 또한 특유의 끈질긴 수비력을 인정받아 올-디펜스[4] 세컨팀에 뽑히게 된다.
93년 플옵에서 훗날 10년간 NBA를 대표하는 라이벌이 될 닉스와 페이서스는 서로 처음 맞붙었는데, 이 당시에도 두 팀은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일 벌인다. 당시 예상은 닉스가 비교적 쉽게 페이서스를 잡을 것이란 게 지배적이었고, 실제로 뉴욕에서 열린 1, 2차전을 닉스가 승리한다. 그러나 페이서스는 3차전을 승리하며 반격하는데,이때 밀러는 교묘한 트래쉬토킹으로 스탁스의 멘탈을 흔들어놓는다. [5] 물론 그러면서 헐리우드 액션도 빼놓지 않았다. 당시 스탁스는 처음으로 주전으로 올라섰다는 부담감도 있었던 데다가 이런 심리전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혈질인 그의 성격상 점점 부글부글 끓었다.

결국 스탁스는 폭발해 밀러를 머리로 들이받고 퇴장당하는데,이때 팀의 리더인 패트릭 유잉과 파워포워드 찰스 오클리는 스탁스의 뒤통수까지 후려갈기며 죽일듯이 갈군다. [6] 다음날 스탁스의 모친은 유잉에게 전화를 걸어 "자네 내 아들에게 다시 한번 손 댔다간 가만 안 두겠네"라고 했다. 이에 유잉은 "스탁스 부인, 그 녀석이 또 그러면 전 녀석을 또 후려갈길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반면 다음 라운드에서 벌어진 불스와의 숙명적인 대결에서 그는 플레이오프 역사에 남는 어마어마한 플레이를 보였다. 그를 막던 BJ암스트롱이 패트릭 유잉의 스크린에 걸린 상태에서 그는 전광석화와 같이 베이스라인 돌파를 시도했는데, 불스 최고의 블러커인 호레이스 그랜트와 마이클 조던이 이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올라가 두 선수 위로 어마어마한 덩크를 했고,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본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닉스 팬들은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93 시즌 후 조던이 은퇴하자 닉스는 1993-94 시즌에 거침없이 디비전 1위로 NBA 파이널까지 진출, 하킴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 로켓츠를 상대로 5차전까지 끌면서 선전했지만, 6차전 종료 직전 스탁스가 던진 3점슛이 올라주원에게 블록당하면서 승부는 7차전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서 그는 3점 슛에서 11번 전부 실패하는[7] 바람에 결국 패배의 원흉이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점은 6차전까지만 해도 닉스의 리더 패트릭 유잉이 슛성공률이 말그대로 바닥을 찍는 최악의 부진을 겪은 가운데 스탁스는 폭발적인 3점슛으로 팀을 사실상 캐리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나 7차전의 3점슛 필드골 0/11의 포스가 너무 강렬해 파이널 패배에 대한 책임을 사실상 혼자 뒤집어쓰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이 해에 스탁스가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완전히 주전으로 자리잡은 그는 이 해에 커리어 하이인 평균 19점 5.9리바운드 1.6스틸을 기록하며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에 선정된다.

1994/95 시즌에 절치부심해서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도달했으나, 레지 밀러를 필두로 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7차전만에 패배하고 말았다.[8]

이후 팻 라일리가 1995~96시즌 전에 팀과의 마찰로 사임하고 마이애미 히트로 옮기면서, 팀은 새 감독을 선임하는데 다름 아닌 골든스테이트 시절 그를 "팀에 맞지 않는다"며 잘라버린 돈 넬슨이었다. 넬슨은 휴버트 데이비스를 스탁스 대신 주전 슈팅가드로 세우려는 시도를 해보지만 그는 결국 시즌 중반에 해임되고, 스탁스는 96시즌 대부분을 주전으로 뛸 수 있게된다.
그러나 1996-97시즌에 그는 당시 그보다 더 큰 잠재력의 소유자이던 앨런 휴스턴[9]에게 주전 슈팅가드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러나 스탁스는 식스맨이 되어 출장시간과 롤이 다소 줄었음에도[10] 오히려 전 시즌(12.6점)보다 높은 13.8점을 기록하는 좋은 활약으로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한다. 97~98시즌에도 후보로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30대 중반이 가까워지던 스탁스는 꾸준히 기량이 내려가고 있었고, 폭발적인 운동능력에 의존하는 단신 슈팅가드란 특성상 나이에 따른 운동능력 저하가 더욱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11]
한편 골든 스테이트에서는 기량은 출중했지만 감독 PJ 칼리시모의 목을 조르는 초대형 사고를 쳐 68경기[12] 징계를 당한 라트렐 스프리웰[13]을 처분하려고 하고 있었다.
결국 스탁스는 1998/99 시즌 개막 전에 크리스 밀스, 테리 커밍스와 패키지로 라트렐 스프리웰과 맞바꾸어져 그가 데뷔했던 워리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닉스에서 황금기를 보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스탁스는 트래이드로 많은 충격을 받았으나 워리어즈에서 두 시즌에 걸쳐 주전으로 뛰며 나름 괜찮은 활약을 한다. 그러나 199-2000시즌 중반에 스탁스는 토니 쿠코치 3각 트래이드의 부록이 되어 딴 팀도 아닌 시카고 불스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스탁스 본인은 물론이고 동료들까지 그 스탁스가 불스의 유니폼을 입는다는 생각에 어색해했다.[14] 스탁스는 "이 리그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을 해야한다. 그들(불스)은 좋은 사람이며 좋은 선수들"이라고 립서비스를 했지만 리빌딩을 하며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던 불스와 34세 베테랑 단신 슈팅가드는 애초에 맞지 않는 조합이었다. 스탁스는 단 네 경기만을 불스 유니폼을 입고 뛰고 이들은 수많은 갈등 이후에 결국 안 좋은 모양새로 결별하고 만다.
이후 유타 재즈를 거쳐 2001/02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2008년에 슬램볼 팀인 뮬러스의 감독을 지낸 바 있다.

한국에 온적이있었다. 당시 기자가 마이클 조던을 수비할때 어떤 방법이 있었냐고 묻자 just pray(기도할뿐)란 말을 남겼다. 실제로 조던은 명예의 전당 연설에서 조던 전문 수비수(?) 스탁스가 생각나네요 라고 말하면서 씨익 웃어보인 바 있다. 전담 수비수로 팻 라일리가 붙였지만 언제나 털렸기 때문에.


만화 슬램덩크의 등장인물 정대만의 모델이란 설이있다. 다만 스탁스와 정대만은 "한번 터지면 폭발적으로 슛이 들어가는 슈팅가드"와 수비가 강하단 점에서 닮았을 뿐 스타일이 매우 다르다. 위에 언급된 대로 스탁스는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한 단신 슈팅가드였지만, 정대만은 슬램덩크 기준으로 장신 슈팅가드에다가[15] 운동능력은 비교적 평이한 편이었다. 또한 스탁스는 정대만처럼 전문 슈터는 아니었고[16], 정대만은 거의 패스를 받아 슛을 쏘는 캐치앤슈터였는데 스탁스는 드리블을 하다 슛을 던지는 비중이 많은 선수로 득점 스타일 자체도 달랐다.

여담이지만 올스타1회에 불과한 선수임에도 불량청소년에 하부리그에서 올스타까지 되는 드라마틱한 인생역경, 빅마켓 뉴욕 닉스의 주전 슈팅가드, 무엇보다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주 매치업이었다는 점에서 실력 이상의 지명도를 누리는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불스는 닉스와 89년부터 96년까지 무려 6번이나 붙는 등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가졌는데[17] 이 와중에 비록 조던에게 처참히 털렸지만 악바리같이 달려들던 스탁스는 팬들의 기억에 선명히 남았다. 특히 NBA를 시청할 수 있는 환경이 제한적이었던 불스에겐 다른 스몰마켓 팀의 슈퍼스타들보다 훨씬 유명했는데, 위에도 언급됐지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와 새크라멘토 킹스의 슈퍼스타였던 미치 리치몬드는 스탁스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훌륭한 커리어를 보낸[18] 선수임에도 나무위키에서 개인 항목조차 없을 정도.
  1. 한때는 6피트 5인치(196cm)까지 표기되었다. 당시는 드래프트 전에 측정한 정확한 신장이 공개되던 때가 아니라 스탁스의 정확한 신장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맨발 188cm 안팎일 것이라는게 정설이다. 그러나 NBA급에 못 미치는 유망주들은 신장을 뻥튀기할 때가 많았고 스탁스의 신장은 올라가다가 올라가다가 결국 신발 신은 키보다도 5cm나 더 크게 표기된 것. 키가 애매하면 신장을 올리는게 보통인 (미국에선 피트-인치를 쓰는데 이게 2.54cm 단위로 올라가다 보니 당연히 대부분의 선수들은 6피트 6인치, 이렇게 딱 떨어지기보단 6피트 5인치반, 6피트 5인치 1/4 이런 식인데 대부분 선수들은 올린다) NBA에서도 심한 키 뻥튀기로 악명이 높았다.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뛰기도 했던 크리스 랭 역시 한국에선 202cm로 표기되었으나 미국에선 211cm까지 표기되곤 했는데, 일부 설대로 한국에서 약간 신장을 줄였다고 쳐도 서장훈이나 김주성과의 비교로 보면 그의 신발 신은 키가 211cm 될리는 절대 없다.
  2. 사실 스탁스가 아동학대 방지위원회에 이름을 올리거나 불우아동들을 위해 기부한 것도 청소년기에 있었던 가슴 아픈 기억 때문이라고 한다.
  3. 이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다른 학생이 스탁스의 기숙사 방에 몰래 들어왔는데, 이때 대학이 피해보상을 오히려 피해자인 스탁스와 룸메이트에게 하게 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복수였던 것.
  4. NBA에서 가장 훌륭한 수비력을 자랑하는 선수 10명을 뽑는 것으로, 퍼스트팀에 가드2, 포워드2, 센터1, 세컨팀에 가드2, 포워드2, 센터1명을 선정한다.
  5. 슛을 실패할때마다 "장난해? 장난하냐 존? 니가 그러고도 이 리그에서 주전 슈팅가드냐?"고 슬슬 긁었다고.
  6. 이때 밀러가 성질을 긁는 걸 보고 유잉은 "바보짓 하지마 존"이라고 경고했는데도 자기 성질 못이기고 중요한 경기에서 폭발하니 빡친 것. 이때 얼마나 두 덩치가 조그만 스탁스를 심하게 갈궜는지 해설자들도 "팀동료에게 이렇게 심하게 하는 건 처음 보네요"라고 언급했다.
  7. 전체 필드골 18개 중 단 두개 넣었다.
  8. 레지 밀러의 8.9초 안에 8득점이라는 전설은 아닌 레전드급 활약이 바로 이 시리즈 1차전에서 벌어졌다. 내한당시 레지밀러에관해 어떻게 막을수가 없는 선수였다고 회고했다. 밀러가 연달아 3점 슛 두 개를 성공시킨 뒤 닉스는 자유투를 얻었는데, 거기서 자유투 2개를 모두 놓쳐버린 선수가 바로 스탁스이다. 둘 다 성공시켰다면 경기의 행방은 좀 달라졌을 것이다. 안습.
  9. NBA 역사상 가장 깔끔한 슈팅폼과 가장 부드러운 릴리스, 그리고 1억불을 넘는 계약을 맺은 이후 큰 부상을 당해 우주먹튀(...)가 된 것으로 유명한 선수. 오죽하면 NBA가 2000년대 중반에 팀들이 단 한 명의 선수를 방출하면 그 선수에 대한 사치세를 면제해주는 "사면룰"을 신설했을때 이에 대한 별칭이 "앨런 휴스턴 룰"이었을 정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닉스는 휴스턴이 곧 은퇴할 것이라고 여겨 "앨런 휴스턴 룰"을 휴스턴이 아닌 제롬 제임스에게 썼다.
  10. 아직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에 식스맨치고 꽤 많은 26.5분을 소화했다. 주전이던 전 시즌에 비해 4.3분 감소
  11. 이런 운동능력 저하로 가장 피해를 보는게 수비와 필드골 성공률인데, 스탁스의 가장 큰 장점인 수비가 저하된다는 건 특히 치명적이었다.
  12. 처음엔 1년 징계였으나 조정위에 항소한 결과 68경기로 줄었다.
  13. 이 뿐 아니라 팀동료들과 싸우고 무려 150km로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 두 사람을 다치게 해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정말 버라이어티하게 사고를 치고 다녔다. 물론 이후 닉스에서 휴스턴과 콤비를 이루며 제2의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14. http://lubbockonline.com/stories/022000/pro_022000131.shtml#.WAylck3mDIU
  15. 일단 정대만은 184cm, 스탁스는 맨발 188cm로 고작 4cm 차이나는데 NBA에선 포인트가드 신장인 188cm가 슬램덩크에서는 파워포워드/센터를 볼 정도로 신장 차이가 나는 걸 생각하면 정대만의 신장은 NBA로 치면 딱 2-3번에 걸친 스윙맨 사이즈다. 게다가 파워포워드인 강백호나 황태산과도 무리없이 매치업이 가능할 정도니...
  16. 스탁스의 삼점슛 성공률은 가장 높았을때가 36.9%로 전문슈터로 보기엔 무리다. 생애 최고의 활약을 했던 94시즌 성공률은 고작 33.5%에 불과했다.
  17. 조던이 없었던 94년을 빼고 전부 불스가 승리.
  18. 무려 조던이 "슛만은 나보다 훨씬 낫다"고 한 선수이다. NBA의 베스트 5격인 올NBA퍼스트팀 바로 아래인 올NBA세컨팀에도 세 차례나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