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勤
(? ~ 16)
백제 온조왕대의 반역자로 기록상 백제 최초의 반역자[1]
주근은 본래 마한의 출신의 장수로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게 패하면서 밀려나자 백제에 복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사기에서는 이 때 마한이 멸망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이 때 마한이 멸망한 것이 아니라 백제에게 패해서 남쪽으로 밀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 16년(온조왕 34년)에 주근은 우곡성에 웅거해 반역을 시도했지만 온조왕은 5천 군사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했으며, 싸움에서 패한 주근은 결국 자살했고 백제인들은 그 시체를 허리를 끊어버리고 처자를 잡아 죽임으로써 본보기를 보였다.
조선 후기의 국학자 안정복은 성리학적인 명분론의 입장에서 주근을 재평가했는데, 《동사강목》에서 주근을 단순한 반역자가 아니라 조국을 부흥시키려 한 절개 높은 충신이며, 기존의 역사에서 주근과 관련된 기록에 반란(叛)이나 토벌(討), 주살(誅)이라고 한 것은 춘추의 의리와는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2][3]
- ↑ 물론 반역의 성질은 다르다. 후술.
- ↑ 춘추 이후 명분론에 따라 해당 사건을 표현하는 글자를 달리 써서 역사가 자신의 평가를 가미하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삼국사기 이후 기존의 역사책은 모두 주근의 행위를 '반란'으로 지목했는데, 안정복은 주근의 행위가 백제의 입장에서는 반역일지 모르지만 백제에 의해 멸망당한 마한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
- ↑ 주근에 대한 재해석은 안정복의 스승이었던 성호 이익의 영향도 있는데, 《성호사설》권25 경사문 '전대군신사' 항목에서 이익은 마한이 백제에게 패망할 무렵에 주근만이 조국 부흥을 위해 싸우다 죽었는데 그것을 역사책에서 '반역'이라고 적은 것은 역사 서술에서의 공정성의 원칙을 상실한 것이며 오히려 주근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충신으로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 마땅하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