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性理學

1 개요

송나라 때 외래사상인 불교에 대응하면서 재정립된 유교.

도학(道學), 송학(宋學), 주자학 등으로도 불린다. 영어로는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고도 한다.

2 배경

원래 유교는 형이상학적으로 현란하지 않고 매우 현실적인 학문 체계였다. 그러나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중국을 거쳐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는데, 불교는 그 때까지 중국인들은 생각도 하지 못하거나 어렴풋하던 개념, 사상, 지점 등을 깊게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가 철학도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참고로 불경이 최초로 한문으로 번역되어 중국에 소개된 때가 AD 2세기 중엽, 후한 말이다.

그런데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서 불교가 사회적으로 폐단을 일으키게 되면서 점차 불교를 극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기게 됐고, 이 때부터 유교를 새롭게 재해석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폐단 때문이 아니라[1] 외세의 잦은 침공이 있다보니 외래 사상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불교 철학이 발달했다보니 그에 대한 반박을 하지 않고서는 배척할 수 없다보니 불교 철학을 차용해 유교를 재해석했을 뿐이다.

그래서 성리학에 반대하는 일본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불교화된 유교, 즉 불교 짝퉁이라고 취급하기도 한다. 허나 이는 일본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성리학 이후 등장한 명청대 유학자들, 특히 양명학[2]과 고증학자들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되어 온 관점이다. 뭐 그래도 관학으로서의 명맥은 청 말기까지 이어졌다고 하지만. 또 일본에서도 에도 막부 시기에서도 성리학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다.

중국에서 불교가 융성하고, 그 철학적 바탕과 종교적 친화력[3]으로 중국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고 윤리적 사회적 규범이 되어버리면서 그 폐혜가 커지게 되었다. 몇몇 유학자들은 과거의 유학 경전들을 재조명하고, 이를 우주론적, 자연과학적, 철학적인 측면에서 재해석함으로서 새로운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이들 중 성(性)이 바로 리(理)다(=성즉리설)는 입장을 택한 일련의 학자들이 나타나는데, 정호, 정이, 주돈이, 장재, 소옹 등이 초기 성리학의 개척자들이다. 이들의 연구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독자적 체계를 세운 것이 주자로 불리우는 주희. 그래서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 부르는 것.[4]

하지만 주자학이 성리학의 전부가 아니다. 주자 성리학은 이미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모순되는 면들이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당장 이기불분理氣不分과 이선기후理先氣後가 공존하는 게 이상하지 않는가? 덕분에 이이는 이기불분을 강조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承一途說로 나타났고[5] 이황은 이선기후을 강조해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로 나타나[6] 별도로 나뉘었다. 이 모순된 면들이 논자들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별다른 갈등 없이 병존하였으며, 따라서 '과연 그것이 모순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도 있었다. 학자들이 성리학에서 쉽게 다른 학문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성리학이 이런 다양한 면모가 있어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성립된 조선 성리학의 성립은 남송의 주자뿐만 아니라 북송의 소옹召雍과 장재張載의 성리학의 영향도 적지 않고,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의 학문[7]과 양명학[8] 또한 영향을 주었다.

2.1 조선에서

애초에 조선의 유림들이 주자에 열광하게 된 이유는 주자가 보여주었던 불교에 대한 집요하고도 근본적인 비판 때문이다. 그의 저서와 사상 중에 많은 부분이 내세, 영혼, 환생과 같은 자연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단호한 부정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주자의 종교관을 요약하자면 내세나 귀신을 믿는 삶 따위는 살아도 죽은 것이다.

주자의 '귀신론'은 그의 사상의 가장 실천적이고 근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어리석어 그 원리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의 귀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조화로 여기게 된다고 보았다. 도교나 불교의 존립 기반인 선계나 내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 된다.

특히 조선의 성리학은 주자의 철학적인 면을 특히 강조하여 발전시킨 면이 크다. 다만 조선 초기 주자의 정치 이념과 종교 비판에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이 서서히 이기론의 철학 논쟁으로 초점이 넘어가면서 이기론 철학이 성리학의 전부인 것 양 오해되는 수가 많다. 이기론이 조선 중기 이후 중요한 떡밥으로 자리하는 것은, 사람들의 개성과 계몽의 실천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문자 놀음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3 내용

성리학의 중요한 포인트는 심(心, 마음)의 두 측면인 성(性, 본성)과 정(情, 감정)을 각각 리(理)와 기(氣)로 규정하는 것[9]. 그리고 리와 기라는 개념을 사람의 마음만이 아니라 현실의 사물과 현상 등에도 대입한다. 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리는 기의 구성 원리인 것. 비유하자면 물리학자들이 연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합쳐 '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그 물질들이 서로 조응하는 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 법칙이 '리'라고 하겠다. 이기론을 사람에 적용해서, 인간의 (기)질의 상이함이 사람들의 개성을 만들고, 타고난 본성인 '리'가 만인이 따라야 할 보편적 도덕원리(인의예지)를 형성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만 기질의 차이에 따라 만물에 열등함과 우수함이 나뉘게 된다고 파악하는데, 이 점이 인간끼리 혹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측면이 있다(다만 이게 모든 성리학 학파에서 동의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전근대 시기에서는 둘 다 당연한 것이었고, 지금도 인간과 동물의 차별은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주자의 사상은 철학적인 바탕에 기반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희가 동시대인들에게 심지어 조상의 영혼을 모시지 않는 후레자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때문에 주희가 조상에 대한 제사에 대해서만 타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중론이다. 타협했다고는 해도 주자는 조상이 '귀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차례나 제사를 지낼때 조상의 영혼이 밥먹으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위해 자손이 모임으로서 흩어져있던 조상의 기가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귀신을 모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손들이 모여서 조상을 기리는 행위 자체가 본질인 것이다.

4 오해

흔히 성리학(주자학)에서 과도하게 형식에 집작한다고 비난받는 부분은 사실 성리학 체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가 살아있던 당시의 관혼상제의 문제였다. 송대의 가례(家禮)가 과도하게 경직되어 만들어진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현실적인 예법을 보급하려는 것이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의 의도였다. 물론 12-13세기 송대의 예법이 후세에게는 비현실적이고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이이를 비롯한 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주자가례를 재해석하고 당대에 맞는 예법을 보급시키려 노력했다.

충효(忠孝)를 이용해 백성을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는 일도, 성리학에서 비로소 나타난게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유서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충효 사상을 가르치는 도덕 선생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보다도 오히려 역성 혁명을 긍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주희 시대의 신유학적 정치 관점이었다.
한왕조 이후 천 년 이상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되던 맹자를 다시 주요 경전에 포함시킨 것도 주희의 업적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맹자'를 읽기가 매우 껄끄러웠는데, 걸핏하면 정치를 제대로 못하고 인성이 글러먹은 왕은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송나라 때는 군주의 전제 정치가 약화된 시기였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민 계층이 형성된 시기였던 것이 이같은 진보적 관점을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과 반달리즘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중국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유교가 다시 자리 잡는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물론 남송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천과 의지를 중요시하는 자기개발서 비슷한 관점이 명대의 주류가 되었지만...

5 의의

주자의 정치론은 오히려 서양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동양의 사상이 유럽에 소개된 것이 17세기 이후인데, 가톨릭 선교사들이 동양선교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고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나름대로 지성인들 사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만주족 출신 황제를 모시느라 무척 어용화된 유학의 관점에서 소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에 소개될 때는 이상적인 계몽군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감탄을 샀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유럽 계몽주의자들이 당시 유럽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 실제와는 상관없는 이상화된 유교와 중국을 내세웠을 뿐이다. 즉 그 시기 유행했던 '고귀한 야만인' 담론일 뿐이다.

한편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개혁적 열망은, 성리학을 도입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몰아내는 지식인들의 거대 프로젝트로 결론이 내려지고 군부의 쿠데타와 협력하여 조선 왕조가 세워지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의 논의는 구 고려 왕조 시대의 종교적 생활방식을 타파하는데 있었다. 성리학이 윤리적, 경제적 생활 이념으로 완전히 체화된 것은 퇴계와 율곡이 등장한 16세기 후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일단 명 중기부터 양명학이 인기를 끌었다. 다만, 명 멸망 이후에는 일단 사상계에서 명나라 멸망은 양명학 때문[10]이라는 보수적 경향, 그리고 청나라의 문자의 옥 크리 등으로 인해 유학 연구가 시망이 되었다.[11]

하지만 성리학이 내내 주류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나 에도 막부에서도 정부의 공식 이념 및 주류를 차지한 사상 체계는 성리학이었고, 그 위상은 축소된 바가 없었다. 일본 성리학은 에도 막부 시절 발달되었고, 한국에서 임진왜란때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에도 막부는 대놓고 양명학을 탄압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송나라에서 창시되었으나 조선에서 재발견되고 발전되었다. 혹은 또 다른 학문으로 재탄생된다. 이이와 이황의 추종자들은 이이와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보는데, 이건 순수하게 한국 유학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주론까지 나가는 개념은 원래 주희의 성리학에는 없던 개념이다. 때문에 해동성리학이나 조선 성리학으로 별도로 분류할 필요까지 있다.

6 성리학자

추가바람

7 여담

한류 열풍인 지금,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이만열 교수)는 한국이 제대로 된 문화산업을 이끄려면 성리학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비록 소수여도 우리 사회의 대안을 해외로부터 본받는 것보단 우리 안에서 그걸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성리학을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럼 중국은 뭐 쓰나요? 그래서 오두미교와 유사한 공산주의를 따르고 있다.

송나라 이후에 촉한정통론이 나오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성리학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사상적 배경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이 때문에 가족법 등에 관하여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한국 법조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의 사상적 배경이 정작 성리학이었다는 사실은, 성리학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현대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1. 폐단 때문이라면 불교 개혁 운동이 나올 뿐 불교 자체를 극복하자는 얘기까지는 안나온다.
  2. 하지만 양명학 또한 이 비판에 해당한다. 애초에 양명학은 성리학의 논리를 기반으로 명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걸맞게 변형된 새로운 버전의 성리학에 더 가까웠다.
  3. 이것은 조직화된 종교이기 때문이다.
  4. 사실은 주자가 가장 네임드여서라는 말도 있다.
  5. 이 사상은 제도 개혁론으로 진전될 수 있지만 지주전호제와 신분제를 정면 부정할 수 없었다.
  6. 이 사상은 현실 제도 개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도덕과 윤리 실천의 영역에 머물었다.
  7. 이이의 학설은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8. 이황의 이기호발설과 양명학의 양지良知가 가질 수 있는 능동적 실천성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양명학이 갖는 문제 의식이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새로운 해석으로서 이 이론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
  9. 본성=리, 감정=기.
  10. 명 중기는 사상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웠던 시기인데 이를 일종의 퇴폐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의 가톨릭에 대한 인식과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인식과 현대 한국의 유교에 대한 인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건 보편적 현상이다.
  11.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