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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 ||||||||||||
청동기 시대 | 고대 | 중세 | 근세 | 근대 | 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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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 마한 | 백제 | 후백제 | 미군정 | 대한민국 | |||||||
진한 | 신라 | 신라 | ||||||||||
변한 | 가야 | |||||||||||
우산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탐라국 |
마한의 국가 |
목지국 |
원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의 소국연맹 삼한 | ||||||
마한 | 진한 | 변한 |
『위서』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 ||||||||||
오환족 | 선비족 | 부여 | 고구려 | 옥저 | 읍루 | 예맥 | 마한/진한/변한 | 왜 | 주호 |
馬韓
표에서 짙은 붉은색이 마한의 영향력이다. |
목차
1 소개
고대 한반도 삼한 중에서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위치한 54개의 부족국가 연맹체. 한반도 남서쪽에 위치했던 소국들의 연합체로 추정되는 국가. 한반도 고대사 기록이 매우 부실해서[1]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들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토대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목지국, 이후 백제국을 중심으로 소국 연맹 형태를 구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2 기록과 역사
《삼국지》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각각의 사서에 기록된 첫 문장은 이렇다.
馬韓在西。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그 백성은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데 누에 치는 법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城郭)이 없다.
ㅡ 《삼국지》위지 동이전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의 3 종(種)이 있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개 국이 있다. 북쪽으로 낙랑, 남쪽으로 왜(倭)와 접한다.
ㅡ 《후한서》동이열전
한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본기에서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이고,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임금이 듣고 기뻐하며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마음을 가졌다.
서기 7년에, 온조가 진한과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가졌다는 기록이고, 이어 마한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26년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흡수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서기 8년,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마한을 공략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준비기간만 3개월이 넘게 걸린듯 보이며, 원산성과 금현성은 이듬해 4월까지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 대에 마한은 멸망했다. 하지만 이것은 마한의 54개 소국 중 일부 국가를 멸망시킨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의 결과는 6세기까지도 전라남도 지역에 백제와는 독자적인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후 재위 34년째인 16년에 마한 장수였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이를 제압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한동안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마한 세력의 이름이 등장한다.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12월, 임금이 마한(馬韓)과 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ㅡ 《삼국사기》권15 태조대왕 69년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병력 1만을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했다는 기사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도 "마한은 온조왕이 밟아서 망했는데 지금 튀어나온 놈들은 뭐냐?"[2] 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백제본기에서는 온조왕대의 기사를 제외하곤 단 한줄도 등장하지 않는데, 100여년이 지나 고구려본기에 뜬금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근초고왕대에 본격적으로 마한을 정복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기에도 많은 논란이 있다. 사실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근초고왕이 실제 마한을 공격했는지 조차도 불확실한 점이 있다. 다만 정황상 근초고왕 시절에 마한 지역의 대부분 내지는 상당 부분을 정복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과거 학계에서는 근초고왕대에 마한 전역 내지는 대부분을 복속하였다고 보았다. 적어도 2000년대까지는 이것이 정설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후 문헌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이러한 결론은 점차 부정되고 있다.
과거 오랫동안 근초고왕 시절에 마한이 멸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었지만, 최근에는 근초고왕 시절 이후에도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 마한의 일부 세력이 독자적으로 명맥을 유지했다는 주장이 정설이 되고 있다. 5세기 동성왕 시절에 남부 지역에 대한 무력 시위 기록에 주목한 학자들은 동성왕 시절 남부 지역의 마한 세력의 일부를 병합했고, 무령왕대에 마한을 완전히 병합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또 일본서기에 성왕이 여러나라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마한으로 해석하여 성왕대에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최근 전라남도 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고고학적 성과들, 특히 전라남도 남해안에서 마한의 독자적인 고분 축조가 6세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등은 남해안에 마한 세력이 6세기 이후까지 유지되었다는 주장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줬다. 이에 더해 2016년에는 전라남도 내륙지역인 화순군 회덕고분군 발굴 결과가 새로 발표되엇는데 6세기에 대규모의 세력이 존재하여 백제, 왜, 대가야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사 그리하여 최근에는 마한의 멸망, 소멸 시점을 6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이처럼 마한 54국은 수백년에 걸쳐 지속적인 정벌을 통해 순차적으로 백제에 정복된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힘이 강성했을 때 세력이 약해졌다가도 고구려의 공격 등으로 백제의 세력이 약해졌을 때 다시 마한 세력이 강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2000년대 들어 풍납토성 발굴로 온조왕 대에 이미 백제의 국력이 상당했지 않느냐는 추정이 나오면서, 온조왕 대의 마한 정벌도 사실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온조왕 대의 마한 통일은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단지 마한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주종관계를 맺은 정도의 정벌이었다는 것.
3 왕사
기록에 따르면, 기자의 후손으로 고조선의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갔다. 후한서에서는 준왕이 마한의 왕을 격파하고 한왕이 되어 삼한을 지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준왕의 시호를 '무강왕(武康王)'이라 하는데 고려사 등에 금마군(익산)에서 도둑이 호강왕(=무강왕)의 무덤을 도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는 그 후손을 자칭한다.
이후 준왕=무강왕에서 이어지는 마한의 계보가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현대에는 후대의 부휘로 보아 청주 한씨 족보의 기록은 신뢰하지 않으며, 익산의 왕릉은 백제 무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4 마한의 특징
4.1 사회
지도자는 있지만 읍촌을 다스리는 수준의 힘을 가진듯 보인다. 지도자를 신지(臣智), 그 다음 관직을 읍차(邑借)라고 하고 나머지 관직들은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라고 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는 "우두머리는 있지만 읍락별로 있어서 서로 서로 제어하지 못한다" 고 되어있고, 《후한서》에는 "국읍에 각기 한명씩 두어 하늘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자를 천군이라고 한다."는 기록도 남아있어 제정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소도(蘇塗)라는 것을 세우는데 이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기는 곳을 뜻하며 이곳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잡지를 못하게 되어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을 즐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구수는 큰나라는 1만여 호(戶), 작은 나라는 수천가(家)라고 하는데 이는 마한뿐 아니라 진한과 변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가까운 북쪽 사람들은 예의를 비교적 알았으나 남쪽에는 그렇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곳에는 죄수들 처럼 노비들을 모아서 사는 군락지가 있었다.
농사는 5월에 씨를 뿌려 10월에 수확한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5월 씨뿌리기때와 10월 수활할때, 두번에 걸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밤낮을 안가리고 무리지어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한다. 춤모양은 탁무(鐸舞)와 비슷하다고 한다.
참고로 삼한을 다스리는 진국(辰國)의 왕인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 목지국의 왕이 맡아 계승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4.2 거주지
"집은 초옥토실(草屋土室)[3]의 형태를 띠는데, 그 안에 남녀나 나이가 많고 적음의 구별이 없이 지낸다"ㅡ 《삼국지》위지 동이전
"토실을 만드는데, 마치 무덤의 모양과 같다. 출입문을 위쪽으로 향하게 하여 만든다."ㅡ 《후한서》동이열전
이러한 기록은 마한인들이 기초적인 형태의 거주시설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마한 사람들이 사용한 연장 및 도구들 중에는 도끼가 필히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도구의 발달이 건축 방식에도 변화를 주어 마한인들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높였음을 알 수 있다.
4.3 의복
"영주(瓔珠)[4]는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중략) 상투를 트는데 그 모습이 경병(炅兵)과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ㅡ 《삼국지》위지 동이전
"금은보화와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영주를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 장식하고 목과 귀에 건다. 대부분 괴두(魁頭)[5]와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는다.ㅡ 《후한서》동이열전
참고로 문신을 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기록에는 약간의 차이가 보이는데 《삼국지》에는 "남자는 늘 문신(文身)을 한다."고 되어 있지만, 《후한서》에는 "남쪽에 왜(倭)와 가까이 있는 자들은 문신을 했다" 라고 되어 있다.
4.4 성(城)
후한서에는 "읍락에 섞어 사는데 성곽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지에는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토성등의 형태의 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2000년 해남 옥녀봉에 위치한 옥녀봉토성의 발굴 결과로 동신대학교 이정호 고고학과 교수가 주장하는 "옥녀봉토성은 기원전 3세기경에 지어진 토성의 흔적이다" 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기초적인 성곽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크다.
4.5 풍습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되는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ㅡ 《삼국지》위지 동이전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맹한데 젊은이들이 건물을 지을 때 등가죽을 뚫어 줄을 꿰고 큰 나무를 매달고 힘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강건함으로 여긴다."ㅡ 《후한서》
쓸데없는 힘자랑
등가죽에 줄을 꿰고 나무를 메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마치 "지게"를 뜻하는 듯 보인다.
5 마한 54국
마한의 구성국 목록 및 추정되는 위치다. 마한의 역사는 아직까지는 추측뿐이라고 하므로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수정바람. 이병도설과 천관우설, 정인보설 등등이 있다고 한다.
5.1 ㄱ,ㄴ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감해국(感奚國) | 전라북도 익산시 |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
건마국(乾馬國)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왕궁면, 팔봉동, 삼기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 |
소개 | 건마국은 마한 소국 가운데 형성 시기가 상대적으로 이르고, 인구가 1∼2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며 지배집단의 성격도 토착성이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 목지국이 백제국에 통합된 뒤 다른 마한 소국을 통솔하는 중심세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고랍국(古臘國) | 전라북도 남원시 |
고리국(古離國) | 경기도 양평군 또는 여주시(추정) |
소개 | 그 크기가 수천 가로 작은 나라였을거라 여겨진다.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고비리국(古卑離國) |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으로 추정 |
고원국(古爰國) | 경기도 또는 충청도 어딘가로 추정 |
고탄자국(古誕者國) | 천관우는 경기도 양평군 지역으로 추정하고, 정인보는 전라북도 김제시 지역으로 추정 |
고포국(古蒲國) | 정인보는 경상북도 경산시, 천관우는 충청남도 부여군로 추정 |
구로국(狗盧國) | 충청남도 청양군 |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
구소국(狗素國) | 정읍시 고부면 지방 |
구해국(狗奚國) | 전라남도 강진군 |
내비리국(內卑離國) | 대전광역시 유성구 또는 전라북도 |
노람국(怒藍國) | 경기도 이천 또는 충청남도 |
소개 | 서기 9년 온조왕 27년에 백제가 마한을 통일하자 백제의 지배체제하에서 소국체제가 계속되었다. |
5.2 ㄷ,ㅁ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대석삭국(大石索國) | 경기도 양주시 또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강화도(추정) |
막로국(莫盧國) | 전라도 또는 충청남도 |
소개 |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만로국(萬盧國)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 |
소개 | 남포면에 자리잡고 토성을 이루었는데, 남포 읍성의 전신이다. 백제 때부터 급속히 인류가 정착하여 남포, 주포 일대는 마을이 많이 형성되었다.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 전라북도 고창군 |
소개 | 4세기 무렵에야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모수국(牟水國) | 경기도 수원 일대 |
소개 | 3세기 이후 백제에 통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목지국(目支國) 혹은 월지국(月支國) | 충청남도 천안 혹은 전라북도 익산 혹은 경기도 광주 |
소개 | 우두머리를 진왕(辰王)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진국(辰國)의 왕이라는 뜻이다.중국 사서(史書)에는 삼한시대의 한강 이남 여러 부족국가 진국으로 총칭하였다. 진국의 왕, 즉 진왕은 여러 부족국가 중 세력이 가장 큰 자로서 부족국가 연맹의 맹주(盟主)의 위치에 있었다. |
5.3 ㅂ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백제국(伯濟國) | 서울특별시, 한강 유역 |
소개 | 부여계 고구려 이주민인 온조 집단이 건설한 속국으로, 한강 유역 일대에 위치하였다. 초기에는 목지국을 맹주로 하는 마한연맹체의 구성원이었으나 미추홀(인천) 지역을 차지하면서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발전, 4세기 이후에는 마한 전역을 통합하는 백제왕국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다.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벽비리국(辟卑離國) | 전라북도 김제시 또는 전라남도 보성군 |
소개 | 4세기 중엽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불미국(不彌國) | 전라남도 나주시 |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 전라북도 전주시 또는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 |
소개 | 4세기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불운국(不雲國) |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
소개 | 4세기 중엽을 전후로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비리국(卑離國) |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
비미국(卑彌國) |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
소개 |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
5.4 ㅅ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사로국(駟盧國) | 충남 홍성군, 청양군 일부 지역[6] |
상외국(桑外國) |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또는 우정면(雨汀面) |
소개 | 삼귀(三歸)·삼괴(三槐)등으로 불렸다. 백제 온조시대에 편입.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소석삭국(小石索國) |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추정) |
소개 | 마한의 네 번째 소국으로, 다섯 번째의 대석삭국(大石索國)과 짝을 이룬다.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소위건국(素謂乾國) | 충청남도 보령시 |
소개 | 마한의 16번째 소국.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 경기도 김포시 |
신분활국(臣濆活國) | 경기도 안성시 또는 경기도 가평군 |
소개 | 4세기 이후 백제에 편입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신소도국(臣蘇塗國) | 충청남도 서산시, 태안군 |
소개 | 그 국명으로 볼 때 이 신소도국은 마한의 종교적인 종주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소도국의 중심지는 태안읍 동문리 백화산 기슭의 샘골(一名斜陽洞). 서기 9년에 마한의 영역 대부분이 백제에 합병되면서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후로도 한동안 백제가 대외적으로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체제를 계승하여 백제의 지배하에서 소국체제가 계속되었다.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신운신국(臣雲新國) | 충청남도 천안시 |
신흔국(臣釁國 또는 臣疊國) |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추정) 혹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
소개 | 백제 2대왕 다루왕시기 합병. |
5.5 ㅇ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아림국(兒林國) | 충청남도 서천군 |
소개 | 4세기 이후 백제에 편입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
소개 | 4세기 중엽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염로국(冉路國) | 충청남도 아산시 |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 경기도 부천시 일원 혹은 강원도 춘천시 |
소개 | 3세기 이후 백제에 점령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원양국(爰襄國) | 경기도 화성시 또는 파주시 |
원지국(爰池國) |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
일난국(一難國) | 전라남도 영암군 |
일리국(一離國) | 전라도 어딘가 |
소개 | 3세기 후반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일화국(日華國) | 충청남도 또는 경기도 양평군 |
임소반국(臨素半國)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
소개 | 4세기 중엽 이후 백제가 병합 |
5.6 ㅈ,ㅊ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 경기도 이천시 또는 충청도 |
소개 |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지반국(支半國) | 전라북도 부안군 태인면 |
소개 |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지침국(支侵國)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
첩로국(捷盧國) | 전라남도 정읍시 |
소개 | 4세기 때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초리국(楚離國) |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 |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 전라북도 정읍시 초산동 또는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
소개 | 3세기 무렵 백제가 병합 |
국가명 | 현재 추정 위치 |
치리국국(致利鞠國) |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혹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
소개 | 3세기 무렵 백제가 병합 인구 3만정도의 소국 |
6 기타
馬韓之西, 海島上有州胡國. 其人短小, 髡頭, 衣韋衣, 有上無下. 好養牛豕. 乘船往來, 貨市韓中.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섬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사람들은 몸집이 작고 머리를 깎고 가죽옷을 입는데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다.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배를 타고 왕래하고 한(韓)과 교역한다.
ㅡ 《후한서》동이열전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猪。其衣有上無下 , 略如裸勢。乘船往來,市買韓中。또 주호(州胡)라는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소 몸집이 작고 언어가 한(韓)과 다르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가죽옷을 입는데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윗도리는 있으나 아랫도리가 없으니 대략 알몸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한다.
ㅡ 《삼국지》위지 동이전
이 기록에 제주도(탐라)로 보이는 주호국(州胡國)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삼한과는 별개의 국가로 취급되어 등장.
7 참고 자료
7.1 《정사 삼국지》위지동이전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爲臣智,其次爲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國、臣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 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 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路國、兒林國 , 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卑離國 , 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支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한(韓)은 대방(帶方) 남쪽에 있고 동서간으로 바다에 막혀 있다. 남쪽으로 왜(倭)와 접하고 사방 4천리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세 종류가 있다. 진한(辰韓)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그 백성은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데 누에 치는 법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城郭)이 없다.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臣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부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남국,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피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야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 등 모두 50여 개 나라가 있다.큰 나라는 만 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호(戶)수가 총 십여 만이다. 진왕(辰王)이 월지국(=목지국)을 다스리는데 신지(臣智)를 때로 우대하여 호칭하였고(加優呼) 신운국(신운신국)의 견지(遣支) 보(報), 안야국(변진안야국)의 축지(支), 분신리아국의 불례(不例), 구야국(변진구야국)의 진지(秦支) 염(廉)이 그것이다. 그 관직으로는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7.2 《후한서》동이열전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及秦幷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爲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準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魏略曰 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地皇時,廉斯爲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出其邑落,見田中驅雀男子一人,其語非韓人。問之,男子曰:「我等漢人,名戶來,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爲韓所擊得,皆斷髮爲奴,積三年矣。」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辰)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卽以爲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降伴輩尙得千人,其五百人已死。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若不者,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匹,收取直還。郡表功義,賜冠、田宅,子孫數世,至安帝延光四年時,故受復除。】기자조선의 조선후 준(準)이 왕을 참칭한 후 연나라 망명인 위만에게 공격당해 왕위를 탈취당했다.【위략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쇠망하여 연나라가 왕을 자칭하고 동쪽 땅을 경략하려 하자,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또한 왕을 자칭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역으로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려 했다.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간언하자 그만 두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자 연나라도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사나워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이천여리 땅을 탈취하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고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르자 몽념(蒙恬)을 보내 요동에 이르는 장성을 쌓게 했다. 그때 조선왕 부(否)가 즉위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해 대략 진나라에 복속했으나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했다. 부가 죽자 그 아들인 준(準)이 즉위했다. 20여 년 후 진승, 항량이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했고 점점 준에게로 달아나 망명하자 준은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나라가 노관(盧을 연왕(燕王)으로 임명했을 때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를 그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에 투항했을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는데 호복(胡服)[7]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나아가 투항했고, 서쪽 경계에 거처하게 해달라고 준을 설득하여 중국의 망명인들을 수습하여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었다. 준은 위만을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博士)하고 규(圭)[8]를 하사하여 100리 땅을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위만이 망명인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보내 한나라 병사가 10갈래 길로 쳐들어왔다고 거짓으로 고하며 (수도로) 들어가 숙위할 것을 청했는데 마침내 군을 돌려 준을 공격했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감당하지 못했다.】좌우 측근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거처하게 되었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불렀다.【위략에 이르기를 준의 아들과 부모는 조선에 머물렀는데 성을 바꿔 한씨(韓氏)라 했다. 준왕이 바다 가운데 있을 때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 절멸(絶滅)했으나 지금 한인(韓人)들 중에는 여전히 그를 받들어 제사 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게 되어 사시(四時)로 조알(朝謁)했다.【위략에 이르기를 당초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간언했으나 수용하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는데 이때 따라 나온 자가 2천 여 호(戶)였고 또한 조선과 공번[9]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地皇)[10] 에, 염사치(廉斯)가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는데 낙랑 토지가 비옥하고 인민들이 풍요하다는 말을 듣고 망명하여 투항하고자 했다. 그 읍락을 나왔다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보았는데 그 말이 한인(韓人)이 아니었다. 그에게 묻자 그 남자가 말했다, "저는 한인(漢人)이고 이름은 호래(戶來)입니다. 저희 일행 천 오백 명이 벌목하다 한인(韓所)에게 사로잡혀 머리를 깎이고 노비가 된지 3년 째입니다." 염사치가 말했다, "나는 한나라 낙랑에 투항하려 하는데 너도 함께 가겠는가?" 호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염사치가 호래를 데리고 함자현(含資縣)에 도착하니 현(縣)에서는 이를 군(郡)에 보고했다. 군에서는 즉시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갔는데 호래도 함께 따라갔다. 항복한 동료 천 명을 되찾았으나 5백 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깨우쳐 말했다, "5백 명을 돌려보내시오. 만일 그러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군사 만 명을 배에 태워 보내 당신들을 공격할 것이오." 진한 사람이 말했다, " 5백 명이 이미 죽었으니 다른 것으로 속죄하겠소" 이에 진한에서 만 오천 명, 변한에서 포(布) 만 오천 필이 나오자 염사치가 이를 거둬 돌아왔다. 군에서 염사치의 공의(功義)를 표창하여 관책[11]을 하사하고 자손 수 대에 걸쳐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125년)에 이르기까지 과역을 면제받았다(復除)】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下戶詣郡朝謁,皆假衣,自服印綬衣千有餘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其俗少綱紀,國邑雖有主帥,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無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其戶在上,擧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槨無棺,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以瓔珠爲財寶,或以綴衣爲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爲珍。其人性彊勇,魁頭露紒 如炅兵,衣布袍,足履革。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又以丈許木之,通日呼作力,不以爲痛,以勸作,且以爲健。常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隨,踏地低,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爲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無他珍寶。禽獸草木略與中國同。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鷄,其尾皆長五尺餘。其男子時時有文身。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猪。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市買韓中。
환제, 영제 말에 한(韓),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이 이를 제압하지 못하자 백성들 다수가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했다. 건안(建安)[12] 중,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을 나눠 남쪽 거친 땅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해 유민(遺民)을 수습하여 병사와 더불어 한, 예를 토벌하니 예전 백성들이 점점 (한, 예로부터) 나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왜(倭), 한(韓)은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景初)[13] 중에 명제는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劉昕),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2군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14]를, (신지의) 아래 군장들에게는 읍장(邑長)을 가사(加賜)했다. 그 풍속이 의책(衣을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군으로 나아가 조알하여 모두 의책을 빌리니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갖춘 자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유주)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본래 낙랑이 한국(韓國)을 통치했다 하여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이려 했는데 관리가 통역하여 전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어 신지가 격분하여 한(韓)이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을 일으켜 토벌했는데 궁준이 전사했으나 2군(낙랑, 대방)이 마침내 한을 토멸했다. 그 풍속에 기강이 부족해 국읍(國邑)에 비록 우두머리(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잡거(雜居)하여 서로 제어하지 못하고 궤배(拜)[15]의 예법이 없다. 초옥토실(草屋土室)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형태가 무덤과 같고 문을 위로 내는데 모든 가족이 그 안에 함께 거주하여 장유(長幼)나 남녀의 구별이 없다. 장례를 치를 때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 우마(牛馬)를 탈 줄 모르고 장례를 치를 때 우마를 함께 묻는다. 영주(瓔珠)를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인성(人性)이 강용(彊勇)하고 상투를 트는데 그 모습이 경병(炅兵)과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布袍)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되는 나무를 매달고[16]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 항상 5월이 되어 씨 뿌리기를 끝내면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모여 음주, 가무하는데 밤낮으로 그침이 없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얕게 또는 높게 밟고 손발로 서로 호응하며 가락이 있는데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어 국읍에 각각 한 명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그를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別邑)을 두고 이를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가 여기에 이르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니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17]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선, 악을 행하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그 북쪽에 군(郡)과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다소 예속(禮俗)에 밝았으나 멀리 떨어진 곳에선 죄수처럼 노비가 서로 모여 산다. 다른 보물은 없다. 짐승, 초목은 중국과 같다. 큰 밤(大栗)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배(梨)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느다란 닭(細尾鷄)이 있는데 그 꼬리 길이가 5척 남짓 된다. 남자는 늘 문신(文身)을 한다. 또 주호(州胡)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소 몸집이 작고 언어가 한(韓)과 다르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가죽옷을 입는데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윗도리는 있으나 아랫도리가 없으니 대략 알몸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한다.
- ↑ 삼한 중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중국 기록이 그나마 자세하고, 삼한 중 가장 영향력이 세고 컸기 때문. 변한은 거의 기록이 없는 편에 속한다. 마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로 발전했는데 변한은 가야로 발전해 기록이 거의 없이 멸망한 것 때문인 것도 있다.
- ↑ 원문은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 ↑ 땅을 파고 그 위에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널빤지나 풀로 지붕을 이은 귀틀집을 가리킨다. 땅을 파지 않고 집을 짓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곧 "고대인의 움막을"과 같은 원뿔 모양의 집이다.
- ↑ 구슬로 꿰매어 줄줄히 연결한 목걸이를 말한다.
- ↑ 괴두(魁頭)는 과두(科頭)와 비슷한데, 머리카락을 얽어 둘러 상투를 만들었으므로 이와 같이 불렀다. 紒의 발음은 計
- ↑ 진한에도 사로국(신라의 전신)이 있었다.
- ↑ 오랑캐옷
- ↑ 천자가 하사하여 제후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笏을 말한다.
- ↑ 貢蕃-朝貢蕃客, 조공을 바치고 사신이 오고 감
- ↑ CE 20년 ~ 23년
- ↑ 밭과 집(田宅)
- ↑ 196년 ~ 220년
- ↑ 237년 ~ 239년
- ↑ 관원이 착용하는 사슴가죽 끈
- ↑ 무릎꿇고 엎드려 절함
- ↑ 지게로 추정된다.
- ↑ 사리를 안치한 불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