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설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21위 회음후(淮陰侯) 한신22위 괴성후(蒯成侯) 주설23위 도창후(都昌侯) 주진
생몰년도? ~ BC 175
이름주설(周緤)
작위괴성후(蒯成侯)[1]
시호정후(貞侯)[2]
출생지 강소성 패현

중국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漢)나라의 인물.

유방과 같은 고향인 패현 출신으로, 아직 유방이 거병해서 출세하기도 전부터 참승(驂乘)[3]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유방이 거병 할때는 보좌하는 사인(舍人)으로서 유방을 따랐다.

딱히 공을 세운것은 없었지만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관중으로 가고, 다시 파촉으로 가고, 또 삼진을 평정할때도 종군하여 지양(池陽)[4]을 식읍으로 받았다.

초한전쟁 때는 동쪽으로 진군해서 초군의 양도를 끊고, 이후 북쪽으로 가 한신의 군대에서 싸웠는데, 한신의 아래에서 싸우면서 유리할때도 있고 불리할 때도 있었지만, 단 한번도 유방을 배신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공으로 무신후(武信侯)에 봉해지고 3300호의 식읍을 받았다.

천하가 통일된 후에, 유방이 진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몸소 출정을 하려고 할때는 직접 울면서 말렸다고 한다.

일찍이 진나라가 천하를 공격하여 병탄할 때 황제가 직접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께서 몸소 전쟁터에 임하려고 하시니 그것은 황제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 입니까?"

이 말을 들은 유방은 주설이 자기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꽤나 갸륵해서 이후 주설이 궁궐 내에서 일부러 빨리 걸을 필요가 없게 했으며, 설사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결코 처형을 하지는 않겠다는 특전을 내렸다.

이후 한문제 시절까지 살다 사망했는데, 죽고 나서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창(周昌)이라는 아들이 뒤를 이었지만 죄를 지어서 후국은 페지되었다.

그리고 한경제 시절에 주설의 다른 아들인 주거(周居)가 후에 봉해지면서 주설의 작위를 이었고, 한무제 시절에는 구경(九卿) 중의 하나인 태상(太常)이 되었지만 죄를 지어 후국이 폐지되었다.

특별히 공을 세운건 없지만 그야말로 유방 빠 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사마천은 주설에 대해 마음을 다스려 바르고 굳건한 태도를 견지했음으로 아무런 남으로부터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면서, 실로 돈후한 군자라고 좋은 평가를 내렸다.
  1. 배성후(䣙成侯), 빙성후(憑成侯)라고도 한다.
  2. 존후(尊侯)라고도 한다.
  3. 수레 모는 사람을 말한다.
  4. 지금의 섬서성 경양현(涇陽縣) 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