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의 역대 황제 | |||||
4대 소제 유홍 | ← | 5대 태종 문제 유항 | → | 6대 경제 유계 |
파일:Attachment/한문제/ha20 29 i1.jpg.jpg | ||
묘호 | 태종(太宗) | |
시호 | 효문황제 (孝文皇帝) | |
성 | 유(劉) | |
휘 | 항(恆) | |
출생지 | ||
사망장소 | 장안 미앙궁(未央宮) | |
아버지 | 유방(劉邦) | |
생몰기간 | 음력 | BC 202년 ~ BC 157년 6월 (46세) |
재위기간 | 음력 | BC 180년 ~ BC 157년 6월 (24년) |
1 소개
전한의 제 5대 황제. 본명은 A Question유항(劉恆)이고, 아버지가 바로 한고조 유방이다. 유방의 넷째 아들. 그리고 혜제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박희(薄姬)[1][2]라는 사람. 부인이 도가의 노장사상에 감화되어 무제와 대립을 벌인 효문황후 두태후다.
본래는 대나라의 왕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여후가 죽자 형제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원래 서장손인 제왕 유양[3]이 유력한 계승자였으나, 주발과 진평 및 종실들은 외가에 별 문제가 없고, 사람됨이 모나지 않았던 대왕을 선택하였다. 문제는 이후 제왕의 봉지를 늘려주었다.
2 문경지치 : 피폐해진 나라를 일으키다.
문제는 아직 진나라의 폭정과 항우와 유방의 격돌로 피폐해진 중국을 되살리는데 공을 세웠다. 사실 한나라의 번영은 문제 없이 설명되기 힘들 정도로 문제의 공은 크다. 철저할 정도로 검소하고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였으며, 나라의 경제력을 발전시키고 힘을 키웠다. 전반적인 정책이 큰 사업을 일으키지 않고, 도가적인 '무위지치'의 정치를 지향했다.[4] 흉노에는 약간 저자세로 나가면서까지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아들인 경제와 더불어 이른바 문경지치(文景之治)라 불리우는 정치로 한나라의 힘을 크게 키웠다. 꼭 국제관계에서 저자세로 나가 싸움을 피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
본인 스스로도 대단히 검소하였고, 큰 건물을 지으려다 그리하려면 황금이 많이 쓰여진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포기하였다. 옷도 장식이 없는 검은색 옷을 주로 입었으며 자신의 부인들에게도 사치를 줄일 것을 부탁하였다. 봄이 되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에게 농업과 누에치기에 힘쓸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각 관청에 명해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이르고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씨앗과 식량을 대여해주었으며, 조세를 반으로 줄였고 유방이 정한 15분의 1의 세를 30분의 1로 바꾸었다.
사실상 경제와 더불어 한을 흉노의 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도는 무제에 비해서 적은데, 극단적으로 대외사업을 자제하여 후세에 자랑할만한 뭔가 크고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 크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큰 대외사업은 결국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일이다. 무제가 멋있고 폼나는 흉노와의 전쟁에 장장 40년간 매달려, 나중에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수준까지 이어져나가 엄청난 수준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소비한 것에 비하면 크게 대조된다.
그렇다고 군사 문제에 깜깜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흉노와 전쟁을 벌일 때면 적을 쫒아내는 건 허락하되 역으로 쳐들어가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을 막았는데, 이 때문에 여러 장군들은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할 정도였지만 명장인 주아부를 크게 보았고 그때는 파릇파릇한 애송이이던 이광을 칭찬하여 재능을 발휘하게 하였다.
최후의 유언까지 검소함이 그대로 드러나보이는 말이다.
"만물은 소생했다가 죽는 법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나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라. 묘지를 크게 만들지 마라. 진주도 함께 매장하지 마라. 장례기간을 너무 길게 하지 마라. 전국의 백성들과 관리들은 단 3일만 상복을 입는 것을 허락하겠다. 간소하게 처리하라."
과장은 있겠지만 이때 백성들은 모두가 부유해져서 땅바닥에 돈이 떨어져도 줍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모든 군주들이 꿈꾸는 태평성대를 실현한 인물. 왕조 초기의 기틀을 다지고 태평성세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후의 청나라 강희제와 여러모로 비슷한 인물. 강희제는 초기엔 주구장창 전쟁한게 함정.
3 비판
물론 비판도 있다. 문제의 언행이 명성을 얻기 위한 가식이라는 주장[5]도 있고, 경제복구의 와중에서 호족과 대상인 세력이 불법과 탈법을 통해 자라나는 것에 대해 정책적인 감시와 제재를 하지않은 채 무위지치적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다.
그리고 말년에는 뱃사공 출신인 등통이라는 자를 까닭없이 총애해 등통이 굶어죽을 운명이란 점쟁이의 말을 듣고 등통에게 오수전[6]의 주조권을 사사로이 내려주는 실책도 범했다. 이 주조권은 훗날 경제가 몰수해갔고 등통은 진짜 예언대로 감금되어 굶어죽었다.(...)
4 기타
서경잡기에 따르면, 문제는 모두 아홉필의 준마를 얻었는데, 모두 세상에서 제일가는 명마들이었다고 한다. 말의 이름은 각각 부운(浮雲), 적전(赤電), 절군(絶群), 일표(逸驃), 자연(紫燕), 녹이총(錄離驄), 용자(龍子), 인구(鱗驅), 절진(絶塵) 이었다. 이 아홉 필의 말들을 문제는 구일(九逸)이라고 불렀고 말을 모는 사람은 왕량(王良)이라고 불렀다.- ↑ 문제가 황제에 즉위하자 태후가 되고, 사후에 효문태후(孝文太后)의 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고조의 장릉(長陵)에는 합장되지 못했다.
- ↑ 원래 위표의 첩이었다가 이후 유방이 맞이한다. 자세한 것은 위표 항목 참조
- ↑ 고조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 ↑ 문제의 아내였던 두태후 역시 이를 지지하여 훗날 무제의 유가 중용을 막았다.
- ↑ 그러나 한 문제가 유가도덕이상주의의 정점인 《맹자》를 숭상해서 국정 토론 중 줄기차게 책 속의 구절을 인용하며 도덕 정치를 이끌었고, 요순의 선양 설화를 굳게 신뢰하여 "왕위는 마땅히, 내 아들이 아니라 천하에서 가장 덕 있는 이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니, 경들은 지금부터 전국을 수소문해 그런 사람을 찾아내주오."라고 선언했다가 신하들이
뒷목을 잡으며진짜 뒷목은 경제가 잡아야지거듭 뜯어 말린 뒤에야 "에이..."하면서 포기하였다는 점을 들어 가식이라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반박도 있다. - ↑ 오수(五銖)라는 글자가 적힌 중국의 옛 화폐로 한대의 오수전은 한국의 청동기 후기 또는 말기의 중요한 유물로서, 이 시기의 연대결정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다만 한무제 시절부터 만들어진거라..한문제 시기부터 오수전이 논의되었는데 그것의 주조권을 줬다는 것인지..정확히 아시는 분은 수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