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의 역대 황제 | |||||
5대 태종 문제 유항 | ← | 6대 경제 유계 | → | 7대 세종 무제 유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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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효경황제 (孝景皇帝) | |
성 | 유(劉) | |
휘 | 계(啓) | |
출생지 | 장안 미앙궁(未央宮) | |
사망장소 | 장안 미앙궁(未央宮) | |
아버지 | 유항(劉恆) | |
생몰기간 | 음력 | BC 188년 ~ BC 141년 (48세) |
재위기간 | 음력 | BC 156년 ~ BC 141년 (15년) |
漢景帝
One Economy
한 경제 하는 황제
1 소개
그의 휘는 유계(劉啓)이고, 그는 아버지 문제와 어머니 두태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자에 책봉된 년도는 BC 179년으로, 본래 그는 제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여후의 세력을 숙청한 문제가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황태자로 책봉이 되었다. 그는 본디 유학을 공부했으나 워낙 도교에 심취했던 어머니의 성향 탓에 도가사상도 익혔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문제의 치세를 이어받아 한나라의 전성기를 다져 보통 명군으로 언급되지만, 그의 성격은 다혈질에 괄괄한 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자면, 공신이었던 주아부를 죽음으로 몰고간 일화가 있고, 더불어 태자 시절 오나라 왕 유비[1]의 세자 유현[2]이 입조했을때 함께 바둑을 두던 중 자신이 불리해지자 한 수만 물러달라며 부탁했지만 유현이 거절하였다. 더욱이 그 와중에 유현이 꼼수를 쓰는 것을 눈치챈 그는 홧김에 바둑판을 던졌는데, 던져진 바둑판이 유현을 정통으로 가격하여 유현이 사망한 일화가 있다. 결국 나중에 경제 치세 동안 일어났던 오초칠국의 난의 주축에 유비가 나서게 된 연유는 제후왕 유씨 일족의 최연장자라는 점과 더불어 아들을 죽게 만든 경제에 대한 원한이 있었다.
2 명군이 되다
경제는 그의 아버지 문제의 치세를 이어 즉위 후 산업을 부흥하는데 큰 힘을 쏟았는데, 덕분에 국고에는 재화가 가득차서 그것들을 묶은 줄이 끊어질 정도였고, 백성들은 모두 노새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두 부자의 덕치를 문경지치라고 칭한다. 또한 그는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해 군국제를 고쳐 황제가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도의 기틀을 닦았다. 아버지의 치세를 물려 받아 이를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청나라 옹정제와 여러모로 비슷한 인물이다.
3 가족관계
경제에게는 부인으로 박황후가 있었는데 어찌된 것인지 적자를 낳지 못했다. 이에 두태후는 넌지시 경제의 동생인 양왕 유무를 다음 황제로 정할것을 권했으나 경제는 거절하였다. 박태황태후가 죽자, 경제는 태황태후의 조카였던 박황후를 황실을 번성치 못한 죄로 폐하였고 새로운 황후를 정하려고 했다. 본래 가장 유력하던건 귀여움을 많이 받던 후궁 율씨(栗氏)였는데 그는 장남 유영을 낳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황후가 된건 왕씨였다. 그리고 이 왕씨의 아들이 바로 무제 유철이었다.
왕씨의 이름은 '왕지(王娡)'로 그의 어머니는 고조 시기에 연왕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죽은 장도의 손녀 장씨(이름은 장아)였다. 장씨는 왕중의 처가 되어 아들 왕신과 딸 왕지, 왕식구 자매를 낳았는데 왕중이 요절했다. 그래서 전씨에게 재가하여 전분과 전승 형제를 낳았다. 그의 딸 왕지가 김왕손의 부인이 되어 김속을 낳았는데 장씨는 점을 쳤더니 두 딸이 모두 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침 황궁에서 후궁을 뽑았는데 장씨는 먼 바람이 불었는지 왕지를 데리고 와서 그대로 입궁시켜 버렸다.(...)
그리고 김왕손은 자신의 부인이 돌아오지 않자 처갓집으로 갔더니 입궁시켰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지만 결국 포기해야 했다.장모가 뒤통수 결국 왕지는 당시 태자였던 유계의 후궁이 되어 아들 유철을 낳았다. 나중에 유계가 경제로 즉위하자 장남 유영이 황태자가 되었다. 그런데 경제의 유일한 친누이이자 큰누나였던[3] 관도장공주(유표)는 자신의 딸를 진아교를 유영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4] 관도장공주는 남동생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하였고, 당연히 권세는 막강해서 여러 후궁들이 경제를 만나려면 장공주의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영의 어머니 율씨는 이를 거절했지만 왕지는 이를 허락하여 관도장공주에게 점수를 땄다.
이에 관도장공주는 경제에게 매일 율씨를 참소하고 왕지의 아름다움을 칭찬했다. 경제도 유철이 똑똑하다고 여겼고 상서로운 징조도 있어서 결국 유영을 태자에서 폐하여 임강왕으로 삼고 유철을 황태자로 삼았다. 이에 율씨는 한스러워하다가 분사했다. 나중에 왕지의 친여동생 왕식구가 경제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또한 유비의 조상으로 유명한 중산정왕 유승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정확히 유승은 한경제의 차남이다. 그리고 사남인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이 바로 삼국지의 유표와 유장이다. 삼국지의 대표적인 유씨들 세 명이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인 셈.
4 오초칠국의 난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조[5]를 어사대부로 등용해서 권력을 높이고 제후들의 영토를 삭감해 중앙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강행하던 중 오초칠국의 난을 불러일으켰다. 7국은 조조를 죽이면 끝내겠다고 해서 조조를 거짓으로 입궐하라고 했다. 그러나 수레는 황궁으로 향하지 않고 사형장이었던 동쪽 시장으로 갔고 여기서 조조는 참수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은 계속되었고 간신히 주아부 등의 활약으로 이를 진압했다. 유비는 동월로 달아났는데 거기서 창에 찔려 죽고 머리만 한나라로 배달되었으며 유비의 아들 유구는 민월로 도주했다.
5 왕릉
능은 시안 교외에 위치한 양릉(陽陵)인데, 발굴 현장을 보존하여 현대식 지하 박물관이 만들어져 있다. 론리플래닛에서는 병마용과 함께 서안에서 반드시 가봐야 할 유적지로 손꼽고 있으니, 시안에 여행갈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가보자. 많은 도굴구멍이 있고, 실제로 황금과 보석류의 유물은 거의 도굴되었지만 그 외의 유물들은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었다. 순장 대신 많은 토용들이 발굴되었는데, 인체의 1/5크기 정도이다.
6 기타
전한 황제 중에 가장 많은 아들을 두었다. 즉 아들이 열넷이나 된다. [6] 그리고 그 아들들도 번성한 집안이 많아 후손이 많다. 촉한의 소열제 유비가 항상 경제의 9남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임을 내세웠으니 참으로 파란만장한 사람. 그리고 후한을 시작한 광무제 유수도 이 사람의 7남인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니 훗날 삼국시대와 묘한 인연이 있는 황제다. 그러니까 유씨집안에서 전한, 후한, 촉한 왕족의 분기점이 바로 이 사람이다. 참고로 왕망을 토벌했던 경시제 유현도 경제의 후손인데 광무제와 동일하게 장사정왕의 후손이다. 정확히는 유수가 조부 대에서 작은집이었고 유현이 큰집이었다.- ↑ 삼국지의 유비와 동명이인으로 한자도 다르고 시대도 다른 인물이다. 고조의 둘째형 합양후 유중의 아들로 경제의 오촌 아저씨였다.
- ↑ 경제의 육촌형이었다.
- ↑ 두태후 소생의 자녀는 2남1녀인데, 장녀가 관도장공주, 장남이 한 경제이다.
- ↑ 참고로 근친혼인데 유영과 진아교는 내외종간이기 때문이다.
- ↑ 위에서 언급한 오나라 왕 유비의 경우처럼 삼국지의 조조와 동명이인이다. 한자로 하면 鼂錯로 삼국지의 曹操가 아니다!
- ↑ 한서에서는 황제가 되지 못한 황제의 아들들의 전기를 묶어 한 권으로 만드는데, 고5왕(회남여왕 유장은 별전으로 따로 나오지만), 문3왕, 경13왕, 무5자, 선+원6왕이다. 경제의 정력이 느껴지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