駐蹕山戰鬪
주필산 전투 | ||
날짜 | ||
645년 음력 8월 | ||
장소 | ||
주필산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고구려 | 당나라 |
지휘관 | 고연수 고혜진 고정의 | 당태종 아사나사이 장손무기 이도종 이세적 설인귀 |
병력 | 15~25만명 [1] | 불명 |
피해 규모 | 6500~56500[2] | 불명 |
결과 | ||
당나라군의 승리 | ||
기타 | ||
고연수, 고혜진의 투항, 말갈의 군사를 획득. |
1 개요
645년(보장왕 4년), 고구려의 안시성 근교 벌판에서 벌어진 전투로 제1차 여당전쟁의 전투이다. 주필산 전투라고 명명된 이유는 이 전투 당시 당군이 진을 친 산의 이름이 주필산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에서 당나라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였으나 패하였다.
2 배경
643년 9월에 당나라는 고구려에 상리현장을 사신으로 보내어 연개소문이 신라의 두 성을 함락한 것을 항의하고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고구려가 이를 거부하자, 당태종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명분으로 고구려 정벌을 일으킨다.
요수를 건너 건안성을 압박하고 이세적, 이도종 등이 개모성, 장량이 이끄는 수군이 비사성, 당태종이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하다가 안시성에 진출하는데, 고연수, 고혜진,고정의 등이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15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한다.
3 진행
645년 6월 20일에 고연수, 고혜진이 고구려, 말갈의 병사 15만 명을 인솔해 안시성을 구원했으며, 당태종은 고연수의 계책으로 상책은 안시성과 연결해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곳을 점거해 성 안에 있는 곡식을 먹다가 말갈 사람들을 풀어 당나라의 소, 말을 약탈하는 것, 중책으로 성 안의 무리를 뽑아내 숨는 것, 하책으로 무작정 싸우는 것을 언급하면서 고연수가 하책을 쓸 것이라 했다.
고정의가 당태종이 말한 상책을 언급해 진언했지만 고연수는 이를 듣지 않고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으로 갔으며, 당태종은 아사나사이를 시켜 돌궐의 1천 기병을 거느리고 유인하도록 지시해 적당히 싸우다가 거짓으로 도망가게 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 군사들은 쉽다고 여겨 안시성 동남쪽에서 8리 된 지점에 도착해서 산에 의지해 진을 쳤으며, 장손무기 등이 수백의 기병을 쫓아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고구려의 군사를 바라보면서 산천형세, 매복 지점, 오고 가는 곳을 살폈다.
당태종은 사신을 보내 연개소문을 문책할 뿐 고구려를 공격할 뜻은 없다고 하자 고연수는 이 말을 듣고 대비하지 않았으며, 당태종이 밤중에 이세적에게 보병, 기병 1만 5천을 주어 서령에 주둔하게 하고 장손무기에게 정예 병사 1만 1천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배후를 치게 하면서 그 자신은 보병, 기병 4천을 거느려 전고, 호각 등을 가지고 북쪽 산에 올라가면서 여러 부대에게 전고, 호각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분발해서 공격하라고 했다.
6월 22일에 고연수 등은 당태종이 포진한 것을 보고 군사를 챙겨서 싸우려고 했는데, 당태종이 장손무기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공격을 지시했다. 여러 부대가 나란히 진격하자 고연수가 크게 두려워해 병사를 나누어 막으려 했지만 고구려군의 진지는 혼란에 빠졌고 설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입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고구려군의 진지를 함락시켜 향하는 곳에서는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구려의 병사들은 크게 무너져 2만여 명이 죽었으며, 고연수는 나머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해 굳게 지켰지만 당태종이 여러 군사들을 시켜 포위하고 장손무기에는 교량을 철거해 돌아갈 길을 막게 하자 23일에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했다.
4 결과
이 전투의 패배로 고연수, 고혜진은 투항했고 당태종은 말갈의 추장 3500명을 무관으로 임명해 내지로 옮기거나 평양으로 돌려보냈으며, 말갈의 무리 중에 3300명을 붙잡아 묻어죽였고 말 5만, 소 5만, 철갑 1만 등을 획득했다. 또한 주필산의 패배로 후황성, 은성 등에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당태종은 자신이 싸운 산의 지명을 육산에서 주필산으로 바꿨다.
주필산의 승리로 당나라의 군사는 안시성을 공격하게 되었으며, 당나라군이 안시성의 패배로 철수하자 고혜진은 당나라로 돌아갔지만 고연수는 당나라로 돌아가다가 나라를 배신하고 항복한 일에 후회하고 탄식하다가 근심에 병으로 사망한다. 어리석어도 개념은 있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의 손실은 전사자 2만명, 포로 3만 6800명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의 포로는 풀려났다. 그리고 승리하긴 했지만 당나라군의 손실도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3] 흔히들 당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한 이유를 안시성에서 당나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거나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병력을 나누어서 일부는 안시성을 포위하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다른 성을 공격하면 그만이다. 당태종이 이 전략을 쓰지 않은 것은 당시 당나라군의 사정이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거기다 아직 신성과 건안성이 건재했다는 것까지 고려해보면 당나라군의 진격로도 그리 안전하지 못했다고 할수있다.
삼국사기에서 당태종이 죽을 때 사관이 논한 이야기를 보면 당시 주필산 전투의 대해서 알 수 있다.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여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짝 못하였네. 영공(英公)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였을 때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끝내는 스스로 탈출했으나 저와 같이 겁을 내었거늘 『신ㆍ구당서』나 사마공(司馬公)의 『자치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 하면서 끝마쳤다. 아무래도 주필산 전투는 당나라의 완승 보다는 악전고투 끝에 승리한 전투이고 이로 인해 전선을 양동으로 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어찌되었든 이 때 고구려 주력을 상실했기에 안시성이 위기에 빠지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고구려에게 큰 타격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2차 고당전쟁에서 당나라군이 비록 해군을 동원했다고 해도 평양성을 포위한 것으로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