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Zydrunas Ilgauskas |
생년월일 | 1975년 6월 5일 |
출신지 | 리투아니아 |
신장 | 221cm |
체중 | 118kg |
포지션 | 센터 |
드래프트 | 1996년 드래프트 1라운드 20순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지명 |
소속팀 | 아틀레타스 카우나스(1993~1996)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96~2010) 마이애미 히트 (2010~2011) |
등번호 | 2번 |
수상내역 | NBA All-Star 2회(2003, 2005) NBA All-Rookie First Team (1998) NBA Rookie Challenge MVP (1998) |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영구결번 | |
No. 11 |
1 소개
리투아니아 최고의 농구선수이자, 클리블랜드 팀내 블락슛, 리바운드 누적 1위인 선수. 풀 네임이 영어권 사람들에겐 길고 발음하기 어려워서 그런지 별명은 간단하게 퍼스트네임 첫자를 딴 "Big Z", 같은 리투아니아 출신 빅맨인 전설적인 선수 아비다스 사보니스를 딴 "Zabonis" 등. 국내에선 "Z맨"이란 표현을 더 많이 썼다.
2 NBA 입성 이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일가우스카스는 처음에는 축구선수를 꿈꾸던 축구 마니아였으나, 키가 너무 자라 축구를 포기하고 대신 당시 최고의 리투아니아 농구선수 아비다스 사보니스를 보고 농구를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 나가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이미 210cm라는 엄청난 신장을 가지게 되었고, NBA 진출을 위해서 미국 대학에 입학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경력을 얻고 영어를 익히기 위해 리투아니아의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일부러 유급하기도 했다. 에이전트와 계약도 하고 미국진출을 노렸으나, 경제위기가 그를 가로 막아 결국 고향인 카우나스의 농구팀인 아틀레타스에 입단하게 된다. 여기서 괜찮은 모습도 보이고, 대표팀 자격으로 켄터키 대학교와의 연습경기에 초청되어 26득점 19리바운드 4블록 2스틸이라는 괴물같은 기록을 남기면서 대승을 이끌어 주목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어 1995 드래프트에 참가를 신청했고, 미네소타의 케빈 맥헤일 단장이 그를 눈여겨 보아 워크아웃에 참가해 준수한 모습으로 눈도장을 찍나 싶더니 오른발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1년을 날려먹게 되었다. 결국 1996년 드래프트에 다시 참가해 20순위로 클리블랜드에 드래프트 되었다.
3 NBA 커리어
3.1 부상 또 부상
그렇게 지명의 기쁨을 뒤로 한채 시즌을 앞두고 연습을 하다 또 오른발이 부러져 시즌아웃을 당했다. 영어도 늘고, 팀 분위기에 융화되며 낙담하지 않으려 했고, 착실히 준비해가며 다음시즌을 준비한 결과 97-98시즌 첫 경기에서 16득점 16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데뷔했다. 그 시즌 무려 전경기 출장에 13.9득점 8.9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우수한 모습을 보였다. 루키 챌린지 MVP가 된 첫 번째 클리블랜드 선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시즌 또 왼쪽 발목을 부상당해 5경기를 뛰고 시즌을 접었고, 99-00시즌에도 뛰지 못하면서 결장이 길어졌다. 힘들법도 한 재활 과정을 견뎌내고 2년만에 코트에 돌아온 00-01시즌에 11.7득점 6.7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24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마이애미 전에서 점프슛을 던지다 왼발에 통증을 느꼈는데, 엄청난 통증을 느껴 검진을 받은 결과 분쇄골절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구단 프런트와 선수들이 모두 좌절했고, 이 부상에 자신조차도 회의를 느끼고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거품이라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일가우스카스는 재건수술을 받기로 결심했다. 왼발뼈를 금속제 인조 뼈대로 바꾸는 수술이었다. 진통제를 먹어가면서 악착같이 재활한 결과 01-02시즌에 복귀하게 되었다.
3.2 클리블랜드의 주축으로
01-02시즌에는 크리스 밈의 백업으로 출전했지만 금방 선발진으로 올라섰다. 그는 62경기에 출장하며 11.1득점 5.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02-03시즌에는 17.2득점에 7.5리바운드로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르브론과 함께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으며, 공격옵션이 굉장히 다양했기 때문에 르브론과의 패싱게임을 잘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05-06시즌을 앞두고 5년 6천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음에도 괜찮은 기량을 계속 보여줬는데,06-07시즌에는 부인의 유산의 아픔을 이겨내고 파이널에 진출하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클럽하우스에서도 외국계 선수들이 팀에 적응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특유의 농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선수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나게 부상으로 고생한 커리어 초기에 비해 전성기때에는 별다른 부상이 없었다.
3.3 말년
클리블랜드가 08-09시즌에 실패한 이유중 하나로 동료들의 보좌부재를 들기도 했는데, 이때 Z-맨도 책임을 피해갈수는 없었다. 드와이트 하워드가 무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25.8득점 13리바운드로 골밑을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팀에서 이를 막기 위해 샤킬 오닐을 영입하며 백업으로 밀려났다. 이후 팀이 앤트완 재미슨을 영입하기 위해 트레이드 된뒤 웨이버 되었고 다시 팀으로 돌아오긴 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가 우승에 실패하고 르브론이 마이애미로 이적하게 되는데, 여기에 Z-맨까지 이적하게 되면서 뒤숭숭해졌다.
어찌되었든 말년에 우승을 노리고 마이애미로 옮겼으나[1], 큰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고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부상이 터지면서 플레이오프에 제대로 복귀하지 못한채 은퇴하게 되었다.
4 은퇴 후 근황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대표하는 빅맨으로써 프랜차이즈 기록을 많이 세운공을 인정, 그가 달았던 11번은 영구결번이 되었다. 은퇴후에는 캐벌리어스 프런트에서 특별 고문으로 일을 하고있고, 르브론이 2015년 시즌전에 귀향을 할수있도록 설득한것도 이분의 공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클리블랜드의 한 고등학교에서 자원봉사로 시즌 중 연습에 몇번 참여하며 코치로 일을 하고있는등 아직까지도 클리블랜드 사회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마이애미에서 은퇴한뒤 아예 가족들과 함께 클리블랜드에 말뚝을 박은듯하다.[2]
5 플레이 스타일
다양한 공격 옵션을 가진 빅맨이었다고 한다. 스크린도 잘 서주고, 스페이싱, 포스트 업, 미들슛이나 픽앤롤&팝 등에 능해서 팀의 공격전술에 빠지지 않는 선수였다. 컨트롤 타워 역할도 해 줄수 있는 빅맨이었다. 이런 조건들이 르브론과 잘 맞아서 르브론과 여러모로 찰떡 궁합을 자랑하기도 했다.
대신 수비는 키를 이용한 블락 외에는 좋은 평가는 못받았다. 원체 빠르거나 단단함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6 기타
- 2007년 2월경 일가우스카스의 이름이 로스터에서 사라졌는데, 그의 부인인 제니퍼가 쌍둥이를 유산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이 슬픔을 털어내고 복귀해 클리블랜드의 파이널행에 공헌했다. 이후 2009년에 자신의 고향인 카우나스 출신의 5살, 4살짜리 형제를 입양했다.
- 독서를 좋아하며, 특히 군사역사학 책을 좋아해 경기전에 자주 읽었다고 한다.
- 2014년 미국 시민권을 땄다. 대신 리투아니아 시민권을 잃었다고 한다.[3]
- ↑ 자신과 자신들의 가족에게 우승반지를 선사하고싶은 마음에 이적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데뷔때부터 기둥역할을 해준 프랜차이즈스타답게 지역신문지에 광고로 진심을 담은 편지를 썼고, 그당시에는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티비에서 마이애미 간다고 물맥인놈과는 비교된다며 그들도 그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가 쓴 편지는 여기에.
- ↑ 사실 Big Z처럼 프랜차이스 스타로 사랑받았던 선수들은 은퇴한 뒤 자신이 가장 사랑받은 지역에서 말뚝박고 지내는게 가장 이상적이다. 그 예 중에 하나가 산왕의 제독님이신데, 로빈슨
혹은 제독님은 현재 샌안토니오 지역에 투자회사 및 자신이 설립한 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지역사회의 아이들과 경제에 도움이 되는 자선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등 아직도 그 지역의 레전드로 사랑받고있다. 그래도 이 아저씨는 7피트가 넘는 키다리 아저씨인지라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겠지만.... - ↑ 리투아니아에서는 이중국적이 허가되지않는다. 그래서 리투아니아 국적을 잃은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