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로빈슨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네이트 서몬드네이트 아치볼트데이브 빙데이비드 로빈슨데이브 코웬스돌프 세이즈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로버트 패리시릭 베리마이클 조던매직 존슨모제스 말론밥 페팃
빌 러셀빌 셔먼빌 커닝햄빌 월튼샤킬 오닐샘 존스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얼 먼로엘빈 헤이즈엘진 베일러오스카 로버트슨웨스 언셀드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월트 프레이저제리 루카스제리 웨스트제임스 워디조지 거빈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존 하블리첵줄리어스 어빙카림 압둘 자바칼 말론케빈 맥헤일클라이드 드렉슬러
폴 아리진패트릭 유잉피트 마라비치하킴 올라주원할 그리어찰스 바클리밥 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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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아름다운 팔근육을 자랑하던 전성기 시절.

이름데이비드 모리스 로빈슨
David Maurice Robinson
생년월일1965년 8월 6일
신체 조건216cm, 107kg
포지션센터
드래프트1987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지명
등번호50번
출신대학해군사관학교
소속팀샌안토니오 스퍼스 (1989~2003)
수상내역NBA champion 2회 (1999, 2003)
정규시즌 MVP (1995)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1회 (1992)
NBA All-Star 10회 (1990-1996, 1998, 2000-2001)
All-NBA First Team 4회 (1991-1992, 1995-1996)
All-NBA Second Team 2회 (1994, 1998)
All-NBA Third Team 4회 (1990, 1993, 2000-2001)
NBA All-Defensive First Team 4회 (1991-1992, 1995-1996)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4회 (1990, 1993-1994, 1998)
NBA Rookie of the Year (1990)
NBA All-Rookie First Team (1990)
NBA Sportsmanship Award (2001)
NBA scoring leader 1회 (1994)
NBA blocks leader 1회 (1992)
NBA rebounding leader 1회 (1991)
샌안토니오 스퍼스 영구결번
No. 50
1990년 NBA 올해의 신인상
미치 리치몬드데이비드 로빈슨데릭 콜먼
1995년 NBA 정규시즌 MVP
하킴 올라주원데이비드 로빈슨마이클 조던
1994년 NBA 올해의 득점왕
마이클 조던데이비드 로빈슨샤킬 오닐
1992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데니스 로드맨데이비드 로빈슨하킴 올라주원
1992년 NBA 올해의 블락왕
하킴 올라주원데이비드 로빈슨하킴 올라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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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랜스 암스트롱데이비드 로빈슨 & 팀 던컨보스턴 레드삭스

1 개요

NBA 선수. 90년대 NBA 4대 센터 중의 한명이며, NBA가 선정한 위대한 50인의 농구선수 중 한명이다. 4대 센터 중 가장 뛰어난 편이었음에도 다른 센터들, 특히 전성기 하킴 올라주원에게 패배한 95년 플레이오프나 노쇠한 이후 샤킬 오닐에게 조롱당한 사건 때문에 유약한 이미지를 가졌으나, 다른 세 명과 달리 자신이 데뷔한 소속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뛰었고, 그 은퇴 시즌에 우승반지를 차지하며 명예롭게 은퇴한 복받은 선수생활을 했다.[1]

그의 공식별명은 올드팬들에게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국내외 언론이 자주 사용한 The Admiral, 제독이다.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년 의무복무까지 마친 해군장교 출신이기 때문. 2009년엔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제리 슬로언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 생애

2.1 데뷔 이전

로빈슨은 군인 집안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해군에서 복무했고, 그래서 가족들은 아버지가 전역할 때까지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야했다. 로빈슨은 중학교 시절부터 농구선수를 꿈꿨지만 당시에 키가 겨우 5피트 9인치밖에 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6피트 7인치로 키가 커지면서 고등학교 농구부의 구애를 받았지만 입단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팀에 장신선수가 필요로 했던 감독의 끈질긴 설득끝에 농구부에 입단한다. 농구를 늦게 시작했지만 재능은 있었는지, 그해 주 최고의 선수가 되었지만 뜻밖에도 대학 팀은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로빈슨은 SAT시험에 응시, 1320점을 받고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전공은 수학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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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풋한 해사생도 시절

그런데 로빈슨의 성장판은 아직도 열려있었다. 신장제한[2] 때문에 겨우 해군사관학교 입학이 허락된 로빈슨은 거기서 또 키가 미친듯이 자라서 무려 7피트(213cm)의 거인이 되었다. 이때문에 해군사관학교장(찰스 라슨 소장)과의 면담까지 가는 등, 2학년도 못마치고 신체검사 걸려서 퇴교되는 안습한 신세가 되나 싶었지만 존 레만 해군청장[3]이 그의 이야기를 접했고, 항해병과는 아니지만 2년간[4] 민간인 엔지니어들의 훈련을 지휘하며 지상근무를 한 뒤 예비역으로 편입하라는 해군청장의 조치가 내려지며 겨우겨우 해군사관학교 재학을 허용받았다.

어쨌건 7피트에 달하는 거인임에도 운동능력을 전혀 잃지 않은 축복받은 신체 덕에 데이비드 로빈슨은 해군사관학교에서의 4년동안 평균 21.0득점, 10.3리바운드를 기록하고, 1986년에는 팀 역사상 유일한 엘리트 8[5]으로 팀을 이끄는 등 전미 최고의 센터로 주목받았다.[6] 그래도 로빈슨은 이 4년간의 활약으로 NBA 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되었고, 198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지명된다. 다만 해군청장에게 허락받은 조건대로 2년간 현역 복무를 해야했기 때문에 로빈슨의 데뷔는 2년 늦춰졌다. 이게 우리나라였으면 당장 까임방지권 예약 최종 계급은 중위(Lieutenant, Junior Grade).

2.2 NBA 커리어

전역한 로빈슨은 89-90시즌에 데뷔했다. 2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로빈슨은 89-90시즌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전성기를 알렸다. 3년차에서는 NBA에서 단 세명만 기록했던 평균 2.0 이상 블록슛, 2.0 이상 스틸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수비에서도 크나큰 존재감을 발휘하면서 91-92시즌에는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했다. 93-94시즌에는 샤킬 오닐과의 득점왕 경쟁으로 유명했으며, 결국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71득점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후에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깨지기 전까지 한경기 최다득점 역대 2위였다.[7] [8]

로빈슨의 진정한 전성기는 다음해인 94-95시즌이었다. 이 해에 로빈슨은 시즌 MVP를 수상했으며 팀을 리그 최강으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이 시즌에 서부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로빈슨은 하킴 올라주원에게 명백하게 밀리면서 시즌 MVP로서의 자존심을 구겼으며 그가 은퇴할때까지 쫓아다닌 '새가슴' 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로빈슨의 커리어는 96-97시즌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 바뀌게 된다. 이 시즌 샌안토니오는 에이스였던 로빈슨 뿐만 아니라 2옵션이었던 션 엘리엇까지 시즌아웃 당하면서 역대 최악의 승률을 기록한다. 하지만 이게 전화위복이 되어, 97년 드래프트에서 샌안토니오는 대학 최고의 센터팀 던컨을 지명하게 된다. 막강 트윈타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둘은 이 시즌에 동시에 20-10을 합작했다. 이후 로빈슨은 팀의 리더자리를 던컨에게 물려주고 그를 뒷바침해주는 사이드킥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결실은 98-99시즌 샌안토니오의 프랜차이즈 창단이래 최초의 우승으로 돌아왔다. 이 시점부터 로빈슨은 팀의 에이스가 아닌 2옵션으로서 던컨을 보좌했다.

02-03시즌에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겠다고 공식선언했다. 그리고 커리어를 통틀에 제일 저조한 성적을 남겼지만 팀의 든든한 기둥으로서의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그후 파이널에 올라 뉴저지 네츠를 맞이하며, 6차전에서 13득점 17리바운드 2블록슛으로 맹활약하면서 팀의 두번째 우승에 일조했다. 결국 공언대로 로빈슨은 은퇴했다.

2.3 은퇴 이후

은퇴이후 각종 구설수에 휘말린 다른 NBA선수들과는 달리 자선사업가로 변신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샌안토니오에 도심지의 가난한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카버[9] 학원(나중에 IDEA Carver로 개명)을 세워서 이 학교의 이사장으로 있다. 데이비드 로빈슨은 이 학교를 설립하는데만 천백만 달러가 넘는 설립금을 내놓았으며 운영비도 대고 있다. 세계에서 농구를 제일 잘하는 이사장님일듯

투자회사인 애드미럴 캐피털 그룹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한데 이 회사의 운용자금은 1억 달러가 넘을 정도로 성장했다. 데이비드 로빈슨은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중 상당부분을 자선사업과 카버 학원의 운용자금으로 쓴다고 한다.

미해군과도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미해군 사관학교의 간사로 있으며, 해군 관련 행사나 강연자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3 이것저것

슬하에는 아내와 함께 아들 셋을 두고 있다. 아들 이름은 데이비드 로빈슨 주니어, 코리 로빈슨/저스틴 로빈슨. 이중 코리 로빈슨 노트르담 대학에서 풋볼선수로 뛰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성격은 굉장히 선량하고 착하다고 한다. 이게 실생활에서만 이렇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지만 문제는 코트위에서도 평상시 성격과 별 다를게 없다는 것. 성격이 착하다보니 동료들이 실책을 해도 싫은 소리 한번 한적이 없다. 마이클 조던이 강력한 카리스마로 동료들을 갈구고 "너희들은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타입의 리더라면 로빈슨은 "내가 말없이 열심히 하면 동료들이 따라오겠지?" 타입의 리더라고 볼 수 있겠다.[10] 그래서 다들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였던 라이벌에게 없던 리더쉽 부재 논란이 있었다.[11]

가장 큰게 새가슴 논란. 시즌 MVP를 수상했던 94-95시즌 서부 컨퍼런스 결승전때 로빈슨에게 MVP를 내준 것 때문에 빡친칼을 갈고 나온 6번 시드[12] 휴스턴 로켓츠의 하킴 올라주원과의 매치업에서 로빈슨이 거의 완패하고[13] 팀이 업셋당해 탈락했기 때문. 물론 이걸 가지고 로빈슨이 새가슴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6번 시드 상대로 당한 업셋이기도 하고, 그때 같이 뛰던 데니스 로드맨이 "데이비드 로빈슨이 하킴과의 정면대결을 피한다. 그는 중요한 순간 도망가는 겁쟁이다."라는 식으로 인터뷰를 해서 논란이 되었고 로드맨이 시카고 불스로 쫓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러가지로 이 때가 로빈슨의 농구인생에서 손에 꼽을 흑역사였다. 일부팬들은 로드맨이 이해간다고 말이 나올정도였으니.. 실제로 정규시즌에 비하면 플레이오프에서는 좀 힘을 못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후에 팀 던컨이 입단하고 나서 2인자 자리로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새가슴 논란도 사그러들었다.

던컨과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2000년도에 FA로 풀렸던 던컨이 거의 올랜도 매직행으로 마음을 굳혀가고 있을때, 직접 던컨을 찾아가서 진심어린 마음으로 설득. 여기에 감복한 던컨은 현재까지도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선수로 남아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일부 던컨 극성팬들은 로빈슨을 좀 저평가 하는 경향이 있다

95-96시즌을 앞두고 팀과 종신계약을 맺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이 뉴스는 당시 국내스포츠 뉴스에서도 잠시나마 언급되었다.

플레이스타일은 다른 4대 센터들과 달리 페이스업을 주무기로 삼았다.[14] 농구를 늦게 시작한 데다 선수로서 한창 성장해야할 시기에 2년간의 군 복무를 거친 이유 때문인지 명성에 비해 기술적으로 부족한 점들이 있었으나 동포지션에서는 압도적인 스피드와 퍼스트 스텝을 이용한 돌파와 중거리 점퍼를 위주로 경기를 풀어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무기가 저랬다는 것일뿐, 그 역시 리그 최상급의 포스트업을 구사할 수 있었다. 중거리 슛만 주구장창 던졌다면 통산 야투성공율이 50%을 넘길리 없었을테니... 뛰어난 스피드를 활용해 속공시 피니셔 역할도 잘 해냈다. 당시 샌안토니오가 속공찬스를 잡으면 에이버리 존슨과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앨리웁을 꽂는 게 주로 로빈슨이었을 정도. 던컨이 입단한 이후로 괴물 같은 하이로우 게임의 원동력이 된 패싱능력과 코트 리딩 능력은 덤.

4대 센터중 유일하게 왼손잡이라는 이점도 있었다. 하킴보다 속도가 빨랐는데, 하킴이 별명으로 스몰포워드라고 불리지만 플레이스타일은 정통 센터였다면 로빈슨은 정말 7풋 스윙맨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최속의 센터. 하킴을 포워드라고 부른다면, 로빈슨은 가드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수비는 가히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높은 타점에서 나오는 블록슛은 일품이며, 손이 굉장히 빨라서 스틸능력도 뛰어나다. 체중은 107Kg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워낙에 균형잡힌 체격이다보니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 버티는 힘도 좋다. 다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하킴 올라주원보다는 조금 떨어지고, 힘에서는 샤킬 오닐에게 밀리는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이유들도 인해 지역방어 도입 10년이 넘어가고 스몰라인업이 대세화된 2010년대 중반의 리그에 오면 더 만개하고 학살자로 군림할 수 있는 플레이스타일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스몰라인업의 핵심인 헷지와 포워드진의 기동성을 그들보다 10cm는 더 큰 센터가 보여주며 림프로텍팅까지 완벽하므로 본인 팀은 굳이 스몰라인업을 돌릴 이유가 없고, 상대팀은 도저히 돌릴 수가 없다. 거기에 미드레인지를 이용한 픽앤팝 스페이싱 능력까지 상당부분 갖추고 있으므로 공격에서의 가짓수를 늘려준다.

대한민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때 미국국가대표로 참가했지만 동메달에 그쳤다. 그후 로빈슨은 4년 후에 열리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드림팀1의 주축 멤버로서 참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모국에서 열린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도 드림팀3의 일원으로 참가해 역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위에 언급한대로 정말 복된 커리어를 보냈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쭉 한팀에서만 보냈고,[15] 다른 4대 센터에 비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덜받는 소도시 연고를 한 팀에 있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불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종신계약을 맺었지만 팀은 그에게 섭섭치않게 대우를 해줬다. 또한 아주 이상적인 세대교체를 스스로 하면서 내려놓을 때를 아는 현명함도 보여주었다. 다른 팀들이 베테랑과 떠오르는 젊은 선수간의 파워게임으로 소모전을 펼친 것과는 대조적. 그 결과는 두 번의 우승반지. 특히 두번째 우승은 은퇴시즌에 획득했던 것이라 끝마무리도 화려하게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다.하지만 위키내용이 부실해지는 결과도 얻었다. 너무 이상적이여서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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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4시즌, 샌안이 홈에서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을 때 친히 납시어 팀 던컨과 포옹을 나누었다. 이 때 로빈슨의 동료였던 션 엘리엇은 경기 해설을 하고 있었고 샌안토니오의 전설 조지 거빈, 로빈슨과 함께 우승 당시 동료였던 에이브리 존슨까지 경기를 관전한 뒤 후배들의 우승을 축하해주었다.

여담으로 득점왕과 올해의 수비상을 모두 받아본 2명 중 한명이다. 또 한명은 마이클 조던.[16]
  1. 던컨과의 우승.
  2. 해군으로 군생활을 해보거나 군함에 타본사람은 알겠지만 군함의 격벽구조상 키가 지나치게 크면 언제든 철벽에 머리를 부딪힐 위험이 있다.
  3. 해군참모총장보다 위에 있는 문민이다.
  4. 공식적인 의무복무기간은 5년이다.
  5. 브라운 대학교, 시라큐스, 클리블랜드 스테잇을 꺾고 8강전에서 농구명문 듀크에게 패했다.
  6. 그러나 해군사관학교는 NCAA에서는 육군사관학교와의 정기전 정도 외엔 주목받을 일이 없다. 풋볼의 경우 로저 스타우벅이라는 명예의 전당 쿼터백이 있지만 농구는 그런 인물이 그동안 없었고, 풋볼보다 투자가 낮은 농구에 제대로 학생들이 올일이 없었던 그런 아마추어급 팀을 로빈슨 본인이 하드캐리했다. 그렇게 8강까지 올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로빈슨이 제대로 된 농구부에서 뛰었다면 NCAA를 얼마나 씹어먹었을지... 재학중 해사 생도나 해군 관계자 외에 해사의 농구 경기를 보러 온 사람들은 순전히 로빈슨 개인을 보기 위해 몰려다닌 스카우트들이었다고.
  7. 이 경기에서 스퍼스 팀원들은 의도적으로 로빈슨에게 공을 몰아주었다. 그러나 세간의 루머와 달리 클리퍼스 선수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수비했다. 가끔 클리퍼스 선수들도 로빈슨을 내버려뒀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니 다음에 이 항목을 수정하고 싶다면 관련 인터뷰 등 근거 자료를 제시하고 수정하기 바란다. 사실 한 선수가 득점을 무지막지하게 쌓는 경우에 동료들이 공을 몰아주는건 눈살 찌뿌릴 만한 일도 아니며 오히려 당연시되는 케이스다. 샤킬오닐이 커리어하이 61점을 기록할 당시에도 분위기가 심상치않자 공을 몰아주는 장면을 볼 수 있으며, 심지어 코비가 81점을 기록할 당시에도 레이커스의 승리가 확실시되던 막판에도 (당시 코비의 맹활약으로 지던 경기를 역전해서 점수차를 여유있게 쌓은 시점) 끝까지 코비 위주로 공격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플옵에서 기록을 위해 이러면 비판받겠지만 정규시즌에서 기록을 앞두고 있는데 공을 몰아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사실 100득점 당시 윌트 체임벌린은 상대팀인 닉스가 기록을 내주기 싫어서 일부러 윌트가 아닌 다른 선수들을 고의로 파울해서 자유투를 주는 행위를 저지르자, 감독의 지시 하에 아예 체임벌린에게 볼운반까지 시켜버렸다. 이로 인해 이 경기 막판은 난데없는 자유투 콘테스트가 되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건 좀 기록을 지나치게 의식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로빈슨이나 코비, 오닐의 경우처럼 그냥 공격권을 몰아주는 정도면 문제될게 전혀 없다.
  8. 루머에 흔들릴 것 없이 직접 확인하자. http://www.youtube.com/watch?v=mgWSlshJ8bw 적극적으로 도움수비를 와서 더블팀을 붙히는 클리퍼스 선수들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때는 지역방어가 허용안되던 맨투맨 수비시절이라 더블팀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고, 클리퍼스가 정상급의 수비팀이 아니란 걸 감안하면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막은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클리퍼스가 로빈슨이 뭐가 예쁘다고 71점을 헌납하겠는가? 그리고 문경은/우지원의 삼점슛 타이틀 쟁탈전에서 있었던 "일부러 수비를 안해 상대팀의 대기록 수립을 허용하는" 짓거리는 KBL에서도 엄청나게 비난받고 그해 삼점슛왕 시상을 안할 정도로 문제가 많은 행동이다. 하물며 더욱 치밀하게 운영되고 규모와 인기가 비교도 안되며 역사도 깊은 NBA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간 로빈슨은 매장당했을 것이다.
  9. 이름은 조지 워싱턴 카버를 기리는 뜻으로 지었다. 이 사람은 1860년 흑인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갖은 고생 끝에 대학교에 들어가 농업을 공부한뒤, 연구원으로 있으며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 목화, 땅콩, 감자의 개량에 힘써 나중에는 세계적인 농학자가 되었다. 데이비드 로빈슨은 그가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말한 적 있다.
  10. 유잉도 비슷한 타입의 리더라고 볼수 있다. 참고로 유잉 역시 리더쉽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사실 이런 스타일의 조용한 리더는 티가 안나기 때문에 팀 던컨처럼 실적이 확실하지 않은 이상 호사가들의 먹이감이 되는 경우가 잦다. 다만 유잉은 조용한 편이긴 했지만 플레이스타일도 그렇고 성격도 순동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닐은 자신이 성장하던 시절 유잉을 보며 ferocity를 배웠다고 한 적이 있다) 플옵에서 존 스탁스가 레지 밀러의 도발에 넘어가 그에게 박치기를 하고 퇴장 당하는 뻘짓을 하자 마구 화를 내며 코트 위에서 대놓고 혼을 낼 정도. 그러나 로빈슨은 너무 착하고 순했기 때문에 더욱 논란이 되었다.
  11. 가장 문제가 된 게 데니스 로드맨과의 관계였다. 로드맨이 은퇴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로빈슨은 종종 로드맨에게 "하나님에 대해 얘기하자"고 접근했으며 그의 지나친 기행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고 한다. 참고로 스퍼스 관계자들 역시 로드맨이 오토바이사고로 어께를 다쳐서 나타나는 등 통제가 어려운 모습을 보이자 그의 뛰어난 기량에도 재계약을 주저했다. 이런 답답한(?) 모습에 후술할 플레이오프에서의 약한 모습까지 더해 급기야 로드맨이 공개적으로 로빈슨을 까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데니스 로드맨 항목 참조.
  12. 16강 플레이오프 시스템에서 가장 낮은 시드의 NBA 파이널 우승 사례이다.
  13. 올라주원은 그 시즌 MVP를 자신이 아닌 로빈슨이 탔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나 있었고, 이 시리즈에서 자기가 로빈슨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작정하고 온갖 화려한 기술을 총동원해 역대급 빅맨 수비수인 로빈슨을 압도했다. 올라주원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이 시리즈에서 하킴이 구사한 기상천외한 무브들이 많이 나온다. 로빈슨은 (적어도 정규시즌에서는) 절대 하킴에게 약한 선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를 비롯한 몇몇 임팩트 있게 당한 경기 때문에 하킴 하이라이트 영상의 본인제외 최다출연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14. 2000년대 이후로 빅맨들이 페이스업을 주무기로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선구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변화가 로빈슨 때문은 아니었지만.
  15. 같은 4대 센터들 중 패트릭 유잉은 말년에 소속팀에게 팽당하고, 하킴 올라주원은 계약 파토로 이적, 샤킬 오닐은 레전드급임에도 소속팀 개수로는 저니맨급(...) 커리어를 보유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16. 다만 한 시즌에 동시에 차지한 선수는 조던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