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정관

1 로마 공화정의 최고 관직

Consul. 고대 그리스의 Archon도 집정관으로 번역한다.

을 대신하는 국가의 지도자. 1년에 2명이 선출되며 사실상 명예로운 경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 공화정 시대에는 대단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 때문에 프로콘술, 집정관 경력자는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는 한층 격이 다른 권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프로콘술은 요즘으로 치면 정계의 주요인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에 집정관이라는 영예는 매우 컸기 때문에 귀족들의 경우 집정관 역임이라는 문구는 무덤과 족보에 꼬박꼬박 새겨놓았다. 또한 제정 시대때나 비잔티움 제국때의 황제들 또는 로마시대 말기의 군사령관들 역시 자신의 권위을 높이는 수단으로 가끔씩 집정관에 출마해서 당선되기도 할 정도로 집정관이 가지고 있는 권위는 상당히 높았다.

1.1 선출

집정관은 백인대 집회라고도 불리는 센튜리온 집회에서 선출되며 해마다 10여명의 후보 중 투표를 거쳐 두명이 뽑히게 된다. 집정관은 선출되자마자 국가통치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그 중 가장 중대한 권한으로 여겨지는 것은 임페리움이라 불리는 군사 지휘권이었다.

집정관의 연임 금지 규정은 로마가 작은 규모의 국가였을때는 성공적으로 지켜지다 나중엔 유능한 개인이 연임을 하는 일이 점점 잦아지게 된다. 그 이유는 로마가 매우 거대해지자 집정관의 책임은 점점 무거워졌고 따라서 유능한 개인이 집정관을 맡아야만 하는 상황이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경우 20대 후반에 집정관을 연임하였는데 그 이유는 스키피오 외에 한니발을 상대할 장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경우 게르만 족의 침입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비상상황이었는데다 마리우스 외에는 로마를 지켜낼 역량을 가진 장군이 없었으므로 집정관직을 무려 5번을 연임하였다.

1.2 권한

군사 지휘권(Imperium)은 2개 군단의 지휘권에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재량권이 인정받는 것으로 공화정 시대에는 2개 군단의 병력을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보조병까지 합쳐 대략 2만여명 규모의 병력이었다. 로마는 해마다 전쟁을 수행하였으므로 집정관은 항상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때문에 로마에 머무는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다. 집정관이 지휘하는 부대는 로마 시민들에게서 제비뽑는 방식으로 뽑은 병력들로, 1년의 기간이 되면 해산한 뒤 새로 뽑히는 병력들로 교체되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당해에 선출된 집정관만이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고 법무관, 전직 집정관 등은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벌여진 대표적인 전쟁인 삼니움 전쟁, 피로스 전쟁 등은 집정관들이 지휘하는 병력들로 전쟁을 치루었다. 그리고 이 전통은 1차 포에니 전쟁때까지 유지되다 한니발 바르카의 등장으로 인해 전쟁의 규모가 상당히 커지자 법무관(praetor), 전직 집정관 (proconsul)에게도 임페리움을 수여하는 일이 생긴다. 특히 전직 집정관(proconsul)의 경우 총사령관이 집정관 임기가 끝나면 교체되는 일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한니발을 상대하면서 집정관의 교체가 주는 혼선이 전쟁에 영향을 주는 일이 자주 생기자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즉 집정관이 군대를 지휘하다 임기가 끝나면 전직 집정관의 신분으로 그대로 전쟁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집정관과 전직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예를 들어 현직 집정관의 경우 전쟁의 시작과 종료를 결정할 수 있었고 또한 전직 집정관의 부대에 대한 명령권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많은 정치가들은 현직 집정관 시절에 전쟁을 수행하여 마무리짓고 싶어하였다. 대표적으로 마리우스는 게르마니아 전쟁을 앞두고 계속 현직 집정관 상태를 유지하였으며 또한 카이사르 역시 현직 집정관일 때 폼페이우스와의 전쟁과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수행하였다.

1.3 통치

집정관은 상당 기간 전쟁을 수행하였지만 아주 가끔씩은 로마에 머물며 국가를 통치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1개월씩 번갈아 통치하였으며, 자신이 통치하지 않는 달에는 다른 집정관의 정책에 동의/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집권하는 달에도 상대 집정관의 동의를 얻어야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집정관이 부재중에는 법무관이 집정관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평소엔 한명만 두다 나중에 로마의 규모가 커지자 8명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원로원 회의나 선거, 축제등의 국가행사는 집정관이 주재하며 국가에 불길한 전조를 선포함으로써 상업을 마비시키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집정관이 이러한 점술가의 역할도 겸직하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제도로 로마 시대의 집정관은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완전한 정치가였기 때문이었다.

집정관은 그 권위를 상징하는 12명의 릭토르를 거느렸다. 릭토르는 파스케스[1]라는 도끼날을 나무가지 가운데에 심어놓은 무기로 무장한 자들로 집정관을 호위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프로콘술들은 원로원에 대략 20-30명 정도가 있었고 집정관은 주로 법무관을 역임한 이들이 곧장 후보로 나서 그들 가운데에 선출되므로 집정관은 원로원 의원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정치 입문자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집정관 직위가 매우 권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원로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원로원이 한 개인이 독재를 하는 것을 막고 싶어하였고 또한 로마 공화정은 철저히 유력 가문들에 의한 정부였으므로 집정관 직위를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는 것을 귀족들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집정관 자리는 연임이 없었고 따라서 집정관에 당선된 이들은 이 자리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앞으로 그들이 원로원 의원으로써 정국을 운영할 것을 염두해두었다. 때문에 집정관들은 원로원의 의향을 철저히 따랐으며 사실상 원로원이 곧 로마의 통치기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1.4 몰락과 폐지

제정 시대에는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그저 명목상의 관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정관직은 원로원의 자존심과도 같아서,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집정관을 겸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는 로마 집정관과 콘스탄티노플 집정관을 한 명씩 선출하게 되었다. 로마 집정관은 서로마의 멸망 이후로도 오도아케르 왕국, 동고트 왕국 시대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관제개혁을 통해 로마 집정관은 534년을 끝으로 소멸하였고 동고트 왕국도 동로마에게 망한다. 콘스탄티노플 집정관 역시 541년을 끝으로 없어져서 선출 집정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집정관은 황제의 관직 중 하나로 병합되었다가, "현제" 레오 6세 시기의 개혁을 통해 아예 명칭 자체를 폐지해버렸다.

산마리노는 아직도 고대 로마와 같이 2명의 집정관이 선출되어 다스린다.

2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집정관

문서 참조.

3 크루세이더 퀘스트의 용사 아칸

문서 참조.
  1.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후일 파시즘의 어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