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

元老院 / Senatus; the Senate
로마 제국의 정치기구.원로원은 거꾸로 해도 원로원

1 개요

로마의 초기부터 있었던 정치기구로, 귀족(파트리키) 가문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의결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비록 민회의 힘이 차츰차츰 강해지기는 했으나 공화정 시대 내내 국책의 중심축은 원로원에 있었다.

2 구성

전통 시대에는 300명이 정원이었으나, 술라에 의해 600명으로 늘어났고 이것을 카이사르는 900명으로 늘린다. 그 뒤 아우구스투스가 600명으로 줄여 이 정원으로 확정된다. 술라는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해 늘린 것이었고 카이사르는 약화시키기 위해 그 정원을 더 늘린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에 그 숫자를 줄인다.

원로원 의원은 종신이었다.

2.1 의원 선출

이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은 공화정 시절엔 원로원 의원 가운데서 선출된 감찰관이 결정했다. 주로 공직을 맡은 경험이 있는 가를 최우선하였고 그 다음 어느 가문 출신인가와 재산을 보았다고 한다.

고위관직에 선출되면 높은 순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집정관과 같은 최고위직의 경우 선출전에 이미 원로원 의원인 상태에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법무관의 경우 선출되면 원로원은 이미 보증수표가 다름없었다. 하지만 법무관의 수는 제국이 팽창한 이후에도 해마다 제국전체에서 8명에 불과하였으므로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호민관은 법무관 다음 랭크에 해당되는 고위직이므로 원로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호민관의 수는 10명이었고 종신직인 원로원 의원의 수는 300명 나중엔 600명이었으므로 해마다 18명 (법무관 + 호민관의 수)의 원로원 의원이 죽거나 강등되지 않은 해에는 호민관도 원로원 의원이 되지 않은 때도 많았다.

훗날 로마가 제정시대가 되었을땐 감찰관 대신 황제가 뽑게 되는데 그 역시 뽑을 때 공직을 맡은 경험을 보았다. 따라서 황제는 자신의 측근에게 원로원에 임명하려면 주로 자신이 법무관과 같은 고위직에 그를 추천한 뒤 당선시켜 공직 경험을 쌓게한 뒤 원로원에 임명하는 수순을 밟았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이 되는 조건에 큰 변화는 없었다.

3 연혁

3.1 공화정 초중기

공화정 시대에는 로마의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다. 처음에는 거의 원로원 중심의 정치가 이루졌지만 이후 원로원을 견제하는 민회호민관의 존재로 인해 균형을 이루었다.

3.2 공화정 후기

포에니 전쟁의 승리를 거두고 뒤이은 전쟁에서 헬레니즘 제국을 차례차례 격파하면서 로마는 막대한 부와 권력이 모이는 도시가 된다. 하지만 부유층의 부와 권력이 강해질수록 상대적으로 평민 계급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호민관의 권한으로 농지법을 재정하어 이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이들이 원로원 의원들의 폭동으로 살해당하여 개혁은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강력한 법적 조치를 손에 넣게 되는데, 이는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한 모든 시민을 초법적으로 규탄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었다.

3.3 공화정 말기 : 내전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기존의 로마 시민병 체계는 무너지고, 로마의 정치는 여러 군벌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술라는 일시적으로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민중파를 자처하며 민중파였던 카이사르와 협력하면서 오히려 원로원이 약화된다.[1]

카이사르의 내전은 원로원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했다.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제거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카이사르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원로원 의원들은 무더기로 폼페이우스와 함께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폼페이우스의 몰락과 함께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죽음을 맞았고, 살아남은 자들도 정치적으로 무력해진다. 이후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으나 이미 원로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공화정의 전통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2] 을 전혀 막지 못했다. 이후 제 2차 삼두정치 시기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3.4 제정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실질적으로 약화시켰으나, 교묘하게 그 권위를 존중하여 황제가 원로원으로부터 '인준'(호민관 특권의 부여)을 받는 형식으로 원로원의 체면을 살려주게 된다. 하지만 시대가 갈수록 서서히 원로원의 권력은 약화되어간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는 법률적으로 황제의 즉위를 인준하는 한편, 황제에 대한 탄핵을 할 수 있는 등 견제장치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당한 황제가 바로 네로.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인정 받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황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으로는 이 특권을 박탈하는 결의를 함으로서 황제를 축출할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 왕조에서 이 탄핵권이 법률적으로 제거되면서[3] 원로원은 단지 황제의 즉위를 인준할 수 있는 권한만을 가지게 되었다.

황제권이 안정을 찾은 오현제 시기와 내란기를 거치면서 원로원의 권한은 더욱 약화된다. 오현제 시대부터 황제 주변의 측근 관료층이 강화되면서 원로원이 행정 조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해가기 때문이다.

세베루스 왕조에 이르면 황제를 중심으로 한 관료 체계가 더욱 강화되면서 실권을 거의 잃어버린다.

3.5 제정 말기

유력 군벌들이 황제 자리를 다툰 군인 황제 시대에는 그저 유력한 군벌에게 황제 도장을 찍어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도미나투스[4] 시대가 되면 실무 권한은 거의 모두 관료 조직으로 넘어가서 원로원 의원의 기능은 예식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5] 원로원 의원의 역할은 경기대회나 축제를 주최하거나 자문을 하는 것이 거의 전부가 되었을 정도. 다만 실무권한을 행사하자면 어쨌건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인재풀을 제공할 곳은 원로원이었기에 실질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 유지된다. 또한 5세기 황제 지위가 왔다갔다 하던 시절에는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씁쓸한 사례로는 455년의 로마 약탈[6]을 그나마 좀 인간적으로 마무리하도록 협상을 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로마 원로원 의원에 대한 인기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대단히 높았다. 그 이유는 실질적으로 로마 원로원에게는 세금의 혜택이 부여되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원로원이라는 직함 자체가 일종의 제국 내의 최고 명사라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로마 원로원이 되려면 일단 로마 제국내에서 최상류층에 속해야 했으며 실제 최상류 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 원로원 의원인 600명 안에 들지 않으면 인정해 주지 않았다.

실제로 대도시마다 원로원이 있긴 하였으나 로마 원로원만은 로마 거주자들 뿐 아니라 제국 내의 모든 성공한 사람의 최종 획득 타이틀이었다.

3.6 멸망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고트 족의 지배하에서도 로마 원로원은 존속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과 동고트 족의 싸움 와중에 이들이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은 동고트 족에 의해 몰살당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 원로원은 완전히 소멸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만들어 놓은 게 있지만 이건 원로원이 아니라 그냥 모임 수준에 불과했기에 얼마 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최후의 기록은 4차 십자군 와중에 이사키오스 2세알렉시오스 4세 황제의 즉위를 추인한 것이다.

3.7 콘스탄티노플 원로원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수도가 되면서 로마 원로원과 콘스탄티노플 원로원으로 분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부유함은 콘스탄티노플 원로원 의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또한 로마의 원로원과 거의 같은 신세였지만, 그래도 헤라클리우스 왕조 시절에는 황제의 자문 역할이나 혹은 후견 역할을 해주는 정도의 권위는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동로마 제국에서는 여전히 큰 영광으로 여겨졌으며, 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비롯한, 14세기 중반을 덮친 대혼란의 와중에서야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다만 이 원로원은 모체인 국가가 1453년에야 망했기 때문에 국가가 멸망한 뒤 비참한 꼴을 맞는 일은 피할 수 있었고, 구성원들도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플의 유력인사로 남아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

4 이것저것

상원을 표현하는 Senate는 바로 이 단체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래서 상원의원도 Senator가 된다.

번역이 왜 "원로"원이 되었는가 하면, 공화정 시절 당시 로마에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조각상을 보면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그리고 라틴 어원인 "sen-"은 "늙은-"을 뜻한다.양로원

그렇지만 실상은 30세 이상의 귀족이 참여하는 전혀 원로하지 않은 기관이었다. 그러나, 원로원의 기원은, 초기 왕정때 국왕에게 조언을 해주던 부족 장로들의 모임으로 보고 있으며, 그때문에 노인들의 모임인 senatus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름 그대로 '원로'원이 맞다. 이후 구성은 장년층 이상 귀족들의 모임으로 바뀌었지만, 초기 이름을 잘 바꾸지 않는 로마의 특성상 그 이름이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선거를 통한 선출직이 아닌 원로원 내부의 엄격한 검사를 거친 선발직이고, 종신직이었긴 하지만 짧은 수명과 정쟁, 전쟁 등에 따른 사망으로 비교적 인원이 물갈이가 잘 된 편이었다고. 노블리스 오블리제오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 대쯤 가면 평민들의 토지 갈취에 눈먼 모습을 보여준다.

로마를 상징하는 단어로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이 로마 원로원과 시민을 의미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아직도 로마시 공고문이나 맨홀뚜껑, 심지어 현(現) 로마시의회에서도 쓰이는 단어라고 한다.

참고로 기록상으로 사라진지 500년만에 부활했는데 1144년 로마에서 교황과 시민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해 시민들이 교황을 축출해 코뮌이 들어서면서 자체적으로 부활시켰고, 이후 1145년 새 교황과 코뮌 양측의 타협과 함게 코뮌의 조직으로 추인받게 된다.
  1.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내전 당시 술라 밑에서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아 한몫 단단히 챙겨간 이력이 있다. 그런 그들이 민중파를 자처한것만으로도 술라의 개혁이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2. 아무런 경력도 없는 젊은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걸 앞세워 집정관 자리를 요구했다. 술라 앞에서 군공을 내새워 (술라가 설정한 관직의 나이 상한선을 무시하고)고위직을 요구한 폼페이우스보다 한술 더 떴다. 이것 자체도 모순의 극치인 것이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막아주기를 바랬던 안토니우스 또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게 가능할 만큼 상당한 명분과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모순의 결과는 제 2차 삼두정치와 대숙청이었다.
  3. 더불어 황제정을 제도화함과 동시에 공화정을 부정했다.
  4. 전제정
  5. 원로원 뿐 아니라 민회도 그 권한이 거의 없어졌다.
  6. 사실상 로마 납세에 가까웠다. 극렬한 저항을 우려한 그냥 반달족 왕 게이세리크는 기존에 잡은 포로를 돌려주고 인신에 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막대한 전리품을 요구했고, 그걸 로마에서 자진해서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