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마리우스

Gaius Marius (B.C. 157 ~ B.C. 86)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이자 장군.

평민 출신으로 국가 최고위직인 집정관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제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등장한 인물로 이후 로마 군대를 상징하는 군사개혁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개혁은 그 당시로써는 효과적이었으나 결국 로마군단의 사병화를 초래함으로써 공화정이 몰락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그 로마군을 만들어낸, 로마 군단병의 아버지
로마 제 3의 건국자

1 젊은 시절

마리우스는 보잘것 없는 가문 출신[1]이었으나 군대에 입대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24살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우스가 이끄는 스페인 원정군에 종사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활약은 스키피오가 자신의 뒤를 이어 군을 이끌 사람이라 칭찬하기도 한다. 그는 군대에서 복귀한 뒤 군대에서의 전적으로 군사호민관, 재무관, 호민관에 뽑히며 출세를 하기 시작한다.

가이우스가 대중들 사이에 인지도가 있자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로마 귀족 중 한 명이었던 메텔루스는 마리우스를 지목하였고 둘은 파트리아, 클리엔테스 관계를 갖는다[2]. 그 뒤 마리우스는 안찰관에 입후보하나 낙선한다. 그 다음해에 마리우스는 법무관에 입후보하여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고 그 뒤 총독으로 임명되에 2년여간 로마 속주를 관할한다.

그 뒤 마리우스의 파트리아였던 메텔루스가 집정관에 임명된 뒤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게 되자 유능한 군인으로 알려졌던 마리우스를 자신의 부관으로 데려간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의 지휘방식에 불만을 품었고 그는 자신이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마리우스는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곳에서 자며 [3] 병사들에게 고된 일인 참호를 파고 목채를 세우는 것을 손수 도우며 환심을 산다. 그리고 전장에선 앞장서서 지휘하였으므로 병사들에게 신임받게 된다.

이때 메텔루스는 자신의 친구였던 투르필리우스를 병참 담당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투르필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베가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는 베가 시민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므로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하지만 베가 시민들은 그를 배신하였고 한밤중에 유구르타 군을 불러들여 투르필리우스와 그의 군대는 모두 생포되는 신세가 된다.

베가 시민들은 투르필리우스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를 죽이는 것을 원치않았고 때문에 유구르타 군은 그를 풀어준다. 이렇게되자 메텔루스의 장교들은 그가 돈을 받고 적과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였고 특히 마리우스가 앞장서서 그를 질타하였으며 따라서 메텔루스는 어쩔수 없이 투르필리우스를 처형한다. 그러나 후에 그가 결백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메텔루스는 깊이 상심하였으며 또한 투르필리우스를 앞장서서 처형토록 하게한 마리우스를 싫어하게 된다.

이때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에게 집정관 입후보하게 로마로 가게 해달라고 계속 간청하였는데 사이가 나빠진 메텔루스는 마리우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구르타 전쟁의 지휘권을 가지려고 한다는 의도를 파악하였기 때문에 내켜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마리우스에게 24살에 불과했던 자신의 아들이 집정관 후보가 될때까지 기다리라고 조소하기도 하였다. [4] 그러다 마침내 입후보 기일 12일 전 아슬아슬하게 허락을 해준다.[5]

마리우스는 로마로 되돌아와 집정관에 입후보한 뒤 유그르타 전쟁을 마무리 지을 것이라고 호언하였고 메텔루스와 원로원을 무능하다며 힐난한다. 이미 메텔루스 휘하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던 그의 명성과 유구르타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던 메텔루스의 지휘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은 이를 좋게 생각하였고 따라서 마리우스를 압도적인 찬성으로 집정관에 선출한다. 그리고 원로원이 메텔루스의 지휘권을 연장하려하자 시민들은 이것을 투표를 통해 저지한 뒤 마리우스에게 이 직책을 내준다. 마리우스는 유그르타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오자 메텔루스는 마리우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그를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부관과 함께 로마로 돌아온다.

마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은 끊임없이 유구르타를 압박하였고 유구르타는 결국 자신의 장인이었던 마우레타니아 왕인 보쿠스에게 달아났는데 마리우스는 보쿠스를 회유하여 유그르타를 마리우스에게 넘겨주게 한다. 이때 마리우스는 부관이었던 술라를 사절로 보냈었는데 마리우스에게 거부감을 가졌던 원로원은 유구르타를 생포한 공이 술라에게 있다며 이런 공이 새겨진 인감을 술라에게 주었으며 술라는 이를 계속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나빠지게 된다.

2 게르만 족의 침략

마리우스가 유구르타에 가서 지휘하는 동안 로마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는 북방에서 게르만 족의 부족이었던 킴브리 족이 수십만에 이르는 부족을 이끌고 라인강을 건넜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갈리아 족의 영토를 유린하였고 로마는 이들이 갈리아를 지나면 이탈리아 혹은 스페인에 침입할 것이라 판단하여 집정관들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저지코자 하였다.

하지만 파견된 집정관들은 차례대로 게르만 족에게 격파당하였고 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두 명의 집정관과 그들의 군대가 몰살당하자 게르만 족은 자신감을 갖고 로마 영토였던 남부 갈리아에 침입하였다.

로마인들은 이에 당황하여 대규모의 군대를 편성하여 맞서게 한다. 로마는 8만에 이르는 병력을 편성하였고 이는 12개 군단에 이르는 전례없는 규모였다. 이 병력을 이끄는 장군은 그해의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막시무스와 전직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카피오였다. 이들 장군은 각각 4만씩 지휘하였다.

전직 집정관인 퀸투스는 이미 게르만 족의 강건너에 진을 치고 대치하는 중이었다. 이때 집정관인 막시무스의 군이 도착하였고 막시무스는 퀸투스에게 자신의 진영에 합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퀸투스는 신참자(novus homo)가문 출신 집정관이었던 그나이우스 막시무스보다 파트리키( patrícĭi)가문출신인 자신의 권위가 현직 집정관의 권위를 능가한다고 생각하였고 신참자 가문 출신인 막시무스의 지휘를 받는 것이 굴욕이라 판단하여 막시무스의 요청을 거부하고 따로 진영을 구축한다. 퀸투스의 진영이 새로 구축된 것을 본 게르만 족은 로마 군의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났으므로 싸우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하였고 그 때문에 막시무스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한다.

이때 퀸투스는 이 사실을 듣고 강화가 체결되면 막시무스가 모든 군사적 성취를 가지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고 강화를 훼방놓기로 하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4만 군단병을 이끌고 게르만 족의 진영을 공격한다. 이 싸움에서 게르만 족은 숫적으로 앞서있고 또한 퀸투스가 충동적으로 공격한 것이므로 약점이 많았기 때문에 로마군은 몰살당하고 퀸투스는 달아난다.

이로 인해 사기가 크게 고양된 게르만 족은 강을 건너 막시무스의 캠프로 쳐들어왔다. 막시무스의 병사들은 퀸투스의 군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했으므로 겁에 잔뜩 질린 상태였고 때문에 사기가 크게 떨어진 상태였다. 게르만 족은 여기서도 대승을 거두었는데 매우 적은 소수만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이때 로마군은 8만에 걸친 군단병이 몰살당하였는데 이는 로마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다. 이를 아라우시오 전투라 부른다.[6] 이로써 로마영토는 완전히 노출되게 된다.

3 두번째 집정관이 되다

로마 시민들은 역사상 최악의 패배앞에 공황에 빠졌는데 이때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유구르타를 생포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로마 시민들은 마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게르만 족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는 제약이 따랐는데 그 이유는 마리우스에게 게르만 족과의 전쟁을 맡기려면 그를 집정관에 선출시켜야 하는데 마리우스는 이미 집정관에 한 번 선출되었으므로 두 번째 집정관이 될 수 없었고[7] 또한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 있었기 때문에 집정관에 입후보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에 시민들은 법을 바꾸어 집정관을 연달아 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고[8] 또한 로마에 출두하지 않아도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 있다고 개정하였다. 그 다음 마리우스가 아직 아프리카에 있는 동안 시민들은 그를 입후보시킨 뒤 집정관에 당선시킨다.(!)

마리우스는 두번째 집정관이 된 뒤(기원전 105년) 그 다음해에 생포한 유그르타와 함께 로마로 귀국하여 개선식을 거행한다. 이때 게르만 족은 이탈리아로 침입하지 않고 스페인으로 침입했는데 때문에 마리우스는 그들의 침략에 맞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4 군제 개혁

마리우스는 로마군의 질적 저하가 심각한 것을 파악하였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로마에서 중산층의 몰락으로 인해 로마 군단병의 조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이 때문에 재산을 하한선을 낮춰 군단병에 징집 대상의 폭을 넓혔고 따라서 로마 군단병의 전체적인 무장 수준은 저하되었다. 또한 8만에 달하는 로마군의 손실은 쉽게 채워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때문에 기존의 방식으로는 30여만에 달하는 게르만 족을 저지할 충분한 수의 로마 군단병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로마의 중산층이 몰락한 이유는 당시 로마 중산층을 이루는 이들은 자영농민들이었는데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자 해외에서 값싼 수입 곡물이 들어오면서 자영농 계층은 몰락하게 되었고 또한 이들이 해외 원정을 나가는 동안 그들의 영토가 황폐해져 많은 이들이 파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는 중산층이 몰락하고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양극화 된 상태였다.

때문에 마리우스는 군제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는 무산 계급을 돈으로 고용하여 군인으로 충당하고 이들이 제대한 후에는 토지를 나누어주는 방식으로 군대를 구성한 것이었다. 이들은 자력으로 무장 비용을 조달할 수 없었으므로 국가의 세금으로 이들을 무장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돈을 통해 로마군단의 통제권을 지휘관이 과도하게 갖게 되고, 오랜 기간 같은 지휘관 아래 같은 군단이 있게 됨으로써 사병화를 불러오게 된다. 이것은 빈곤 해결과 군사력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획기적인 개혁이었지만, 이러한 방식은 병사들이 지휘관 개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대가 나타남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로마에는 그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 즉 군사적 역량을 갖춘 정치인들 간의 군대를 동원한 권력다툼, 내전을 펼쳐지게 하는 계기를 낳았다. 훗날 공화정을 무너트리는 인물 중 한 명인 카이사르 역시 마리우스의 덕을 본 셈.

어쨌든 마리우스는 군제를 개혁한 뒤 군대를 증강하였다. 이때 게르만 족은 스페인을 약탈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였으므로 이탈리아로 침입하지 않았고 이러는 동안 마리우스의 임기가 끝나게 된다. 이에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계속 집정관에 연임시켰고 때문에 마리우스는 전대미문의 5년 연속 집정관에 당선되는 행운을 누린다.[9]

이렇게 마리우스가 연달아 집정관이 될 수 있었고 또한 원로원이 이것을 묵인했던 이유는 30만에 이르는 게르만 족이 언제 남하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르만 족은 로마군을 아루시오 전투에서 몰살시킨 뒤 계속 이탈리아 침공을 미루었고 이 사이에 마리우스를 계속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사실 마리우스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군사활동을 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직 집정관과 현직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였다.(집정관 항목 참고) 게르만 족에 대한 전쟁준비를 마리우스에게 전부 맡기고 싶어했던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계속 현직 집정관인 상태로 두고자 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아루시오 전투에서의 참패는 현직 집정관이 전직 집정관의 밑에 들어가길 거부한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던 것이었다. 더구나 마리우스는 막시무스와 마찬가지로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 출신인 현직 집정관이 마리우스의 명령에 거부하려 들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게르만 족이 남하할 가능성이 있는 기간 동안엔 계속 마리우스를 현직 집정관으로 선출한 것이었다.

5 게르만 족과의 싸움

마리우스가 5번째 집정관이 되었던 해인 기원전 102년에 드디어 게르만 족이 이탈리아로 침략한다. 게르만 족은 둘로 나뉘어 남하하였는데 하나는 테우토네스 족으로 전사만 해도 12여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킴브리 족으로 21여만의 전사를 대동하고 있었다. 마리우스는 동료 집정관이었던 카탈루스와 각각 가도를 봉쇄하였고 마리우스군이 지키는 가도로 테우토네스 족이 진입하였다.

마리우스는 테우토네스 족을 상대로 유리한 고지인 높은 언덕에 군대를 주둔시킨뒤 기병과 투창병을 내보내 이들을 유인하였다. 로마군을 연달아 쳐부숴 사기가 높았던 테우토네스 족은 이러한 유인에 걸렸고 이들은 언덕을 올라 로마군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3만이 죽는 대참패를 당한다.

패배 뒤 게르만 족은 마리우스 군이 사기가 높고 방비가 철저한 것을 보고 이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였고 이때 마리우스가 일찌감치 길목에 숨겨두었던 복병이 뛰쳐나와 게르만 족의 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게르만 족은 당황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그때 마리우스는 이들을 추격하여 10만에 달하는 게르만 족을 철저히 처부셨다. 사서에 따르면 게르만 족의 전사자는 10만에 이르렀고 마리우스군의 전사자는 1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승리한 마리우스는 다음 집정관 선거를 위해 로마로 되돌아간다.

이때 다른 집정관인 카탈루스는 킴브리 족을 상대로 전황이 여의치 않다고 하여 봉쇄하였던 길목에서 철수하고 마리우스와 합류하여 상대하기로 하였다.

다음해인 기원전 101년 마리우스는 편성한 로마군을 이끌고 카탈루스군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한다. 북이탈리아로 진입한 킴브리 족은 두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과 맞딱뜨린다. 숫적으로 우세한(21만 vs 5만) 킴브리 족은 자신만만하게 마리우스에게 회전을 하기 위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라고 말하였고 마리우스는 6월 30일 날 라우디네 평야에서 맡붙자고 대답한다. 다음날 아침 마리우스 군의 기병은 동트자마자 킴브리 족의 기병을 공격하였고 예상보다 이른 공격에 당황한 킴브리 족의 기병은 패주하기 시작한다. 기병이 패주하자 킴브리 족의 보병이 나와 응전하였고 마리우스의 로마 군단병이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고 이미 기병을 패주시킨 로마 기병이 이들을 협공하여 킴브리족은 무너지고 만다. 이때 킴브리 족은 14만이 죽고 6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로마군의 사망자는 1천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킴브리와 테우토네스 족은 113년에 이주를 시작하여 12년에 걸쳐 거침없이 갈리아와 스페인을 휩쓸고 지나갔었는데 이탈리아에 진입하여 모두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 게르만 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로마시민들은 마리우스를 열렬히 환영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다음해인 기원전 100년 마리우스를 또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한다. 이는 마리우스에겐 6번째의 영예였다.

6 호민관 사투르니누스

마리우스는 세번째 집정관이였던 기원전 103년에 호민관이었던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가졌다. 세트루니누스는 마리우스의 비호를 받으며 그를 위한 여러가지 법안을 민회에서 가결시킨바 있었다.

게르만 족의 전쟁을 끝내자 마리우스는 사투르니누스를 움직여 그의 휘하의 병사들에게 퇴직금으로 줄 영토를 확보하려 하였다. 그런데 사투르니누스는 그라쿠스 형제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또한 정치적인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였다.

그는 그라쿠스의 농지법과 흡사한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는 시실리 섬과 그리스, 그리고 갈리아에 있던 국유지를 마리우스의 퇴역병에게 주어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단지 갈리아에 퇴역병을 정착하고자 했던 마리우스의 구상보다 더 급진적인 법안이었다.

사투르니누스는 여기에 덧붙여 평민집회에서 법안이 가결되면 원로원 의원이 지키겠다는 맹세를 5일내에 해야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또한 마리우스의 퇴역병이 세울 신도시의 시민들은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갖게 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법안과 내용과 일치하였으며 이는 로마시민들의 저항에 부딛친다.

특히 원로원은 반대는 격렬했다. 원로원이 우려한 것은 새로 건설한 식민지 중 그리스와 시실리 섬의 영토는 원로원이 이미 점거하고 있었으며, 또한 신도시의 시민들이 로마 시민권을 가져 투표권을 갖게 된다면 이들이 모두 마리우스와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였다. 따라서 다른 호민관들은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또한 불길한 전조가 있다면서 평민 집회를 여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성난 마리우스의 퇴역병들은 로마로 몰려가 호민관들을 위협하였고 따라서 마침내 열린 평민집회에서 이 법안은 가결되고 만다.

원로원들은 억지로 가결된 이 법안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는데 이때문에 원로원은 사투르니누스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는다. 이때 마리우스의 상관이였던 퀸투스 메텔루스는 맹세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로마를 떠난다.

7 사투르니누스와 마리우스의 몰락

사트루니누스는 기원전 99년에 열린 호민관 선거에 다시 나서 당선된다. 뒤이어 그는 마리우스의 열렬한 추종자인 전직 법무관이었던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를 집정관으로 밀었는데 선거를 주재했던 집정관 마리우스는 글라우키아가 집정관 선거에 나올 법적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으므로 그의 후보 등록을 거부한다. 그러자 사트루니누스는 여기서 과도하게 나갔는데, 그는 글라우키아의 강력한 라이벌이였던 집정관 후보를 때려죽인다음 글라우키아의 후보 등록을 가능케 하기 위해 수정 법안을 민회에 제출한 것이었다.

원로원은 이에 분개하였고[10] 따라서 가이우스 그라쿠스 때에 이어 두번째로 원로원 최종 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발의한다. 이때 집정관 마리우스는 사트루니누스와 그의 추종세력을 체포해서 제거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었다. 사트루니누스는 마리우스의 세력이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 제거해야 했었다. 이는 마리우스에게 있어 매우 난처한 입장이었다.

사트루니누스가 원로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던 것은 순전히 마리우스가 군사력으로 뒤를 받쳐주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는 지나칠 정도로 행동하여 원로원을 자극하였고 마침내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킨 것이였다.

여기서 마리우스는 정치가로써의 자질이 없음을 보여주었는데 그는 사트루니누스의 행동에 제동을 가할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트루니누스의 행동에 끌려다녔던 것이었다. 사트루니누스의 법안은 마리우스가 원했던 것 이상으로 자극적이었고 또한 급진적이었다. 이 때문에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불신을 샀고 그는 이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었어도 마리우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사트루니누스를 행동을 방조하고 묵인하였다.

그 결과 원로원 최종권고가 발의되었는데 마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머물면서 이러한 결의가 되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군사력과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현직 집정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결의를 막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이것을 방관하였다.

원로원 최종권고의 발동으로 인해 마리우스는 양자택일을 해야하는 막다른 상황에 몰린다. 원로원의 명령대로 사트루니누스를 잡아다 처형한다면 마리우스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격하는 것이고 이는 그의 지지자에 대한 배신이므로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트루니누스를 지지하고 원로원의 명령을 거역한다면 이는 로마의 구체제에 대한 반역인 셈이였다.

이때 마리우스에겐 실질적인 군사력이 있었는데 그는 현직 집정관인데다 그의 퇴역이 결정된 병사들은 불과 일년 전까진 현역이였고 상당수가 로마시내에 머물고 있었다. 게다가 마리우스는 5년에 걸쳐 사실상의 독재관이나 다름없는 권한으로 게르만 족의 전쟁을 준비해왔었다. 따라서 실질적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마리우스며 이런 마리우스에게 그의 정치생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끝장내라는 주문을 원로원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권위를 믿은 것이었다.

때문에 훗날 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가 그리했듯 마리우스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원로원의 명령을 거부할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리우스는 원로원의 요구대로 군대를 이끌고 사트루니누스를 체포한다. 사트루니누스는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 마리우스에게 순순히 투항하였고 마리우스는 사트루니누스의 그의 지지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신전에 가둬두었다. 이때 원로원 지지파들은 몰려가 신전 천장에서 돌과 기왓장을 신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고 이때 사트루니누스는 목숨을 잃는다. 마리우스는 놀랍게도 이런 것을 방관하였을 뿐이였다.

이날 사트루니누스의 죽음과 함께 마리우스의 정치생명도 끝나게 된다. 마리우스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며 마리우스에게 원로원의 결의를 수호한 것에 대해 원로원은 감사 표시를 하였을 뿐 곧 잊혀지게 된다. 원로원의원들에게 있어 시민의 지지와 군대가 없는 마리우스는 단지 '한창때 잘나났던 시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리우스가 이렇게 순순히 원로원의 명령을 들어 자신의 정치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낸 것은 아마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이 안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군인으로써는 유능하였으나 정치가로써는 유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때문에 부유층, 기득권을 대표하는 옵티무스, 서민과 중산층을 대표하는 포풀라리와의 알력을 조정하는 섬세한 일에는 맞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결과 6번째 집정관이 만료되자 마리우스는 더이상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게 된다.

8 마리우스의 재등장 - 동맹시 전쟁

기원전 99년경에 봄 마리우스의 6번째 집정관 임기가 끝났고 마리우스는 잊혀진 존재가 된다. 그 뒤 기원전 91년에 시민권 확대 문제로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드는 동맹시 전쟁이 발발한다.

기원전 90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는 자신이 맡은 군의 고문으로 마리우스를 선임한다. 마리우스는 루푸스에게 새로 징집한 신병의 훈련이 부족하므로 전투를 하기 전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였으나 루푸스는 이를 무시하고 그들을 이끌고 나간다.

루푸스는 군을 둘로 나눈 뒤 마리우스와 각각 지휘하기로 한다. 루푸스와 마리우스는 각각 다리를 건설해 리리스 강을 건너고자 하였고 이들과 맞선 베티우스 스카토는 루푸스에게 대부분의 군이 마리우스 쪽으로 간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고 이것에 속은 루푸스는 경솔하게 도강하다 스카토 군에 포위되어 목숨을 잃는다.

이때 마리우스는 이 둘이 싸우는 동안 텅빈 적의 막사를 공격해 이를 점령한 뒤 패주한 루푸스의 군과 합류한다. 이렇게 되자 마리우스는 루푸스를 대신하여 군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마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은 그 해 내내 패배하지 않았고 그해 성공적으로 군사활동을 마친다. 그런데 마리우스는 겨울이 되자 지휘권을 반납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마리우스가 이렇게 지휘권을 반납한 이유는 불명확한데 그의 건강상의 문제로 그리했다는 가설이 있다.

9 호민관 술피키우스 루푸스

동맹시 전쟁의 결과로 로마 원로원은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내의 모든 라틴 시민권자들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한다. 기원전 88년엔 전쟁이 마무리 지어졌으며 그러자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어떻게 투표권을 줄 것인가가 중대한 이슈가 된다.

당시 로마의 투표 방식은 평민집회의 경우 로마 포럼에 모인 시민들을 주거지 별로 35개의 그룹으로 나눠 이 35개의 부족의 과반수를 가져가는 쪽이 이기는 방식이였다. 로마 원로원은 새로운 로마 시민들에게 8개의 부족을 할당하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새로 확대된 로마 시민권자의 수가 기존의 로마 시민들을 웃도는 것을 감안한다면 명백히 기존의 로마 시민들보다 불평등한 대우였다.

호민관 루푸스는 때문에 새로운 로마 시민들을 기존의 35개 그룹에 할당하려는 법안을 민회에 제출한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이 매우 거셌고 루푸스는 당황한다. 궁지에 몰린 루푸스는 마리우스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법안이 통과되게 도움을 달라고 부탁하였고 마리우스는 루푸스를 도와주는 대가로 로마에 반기를 든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원정군을 지휘하는 군사 지휘권(임페리움)을 요구하였다. 루푸스는 이에 동의하였고 그러자 마리우스는 자신의 퇴역병들을 로마 시내로 불러들여 루푸스의 법안을 지지하게 한다.

이렇게되자 이를 어떻게든 저지하고자 하였던 원로원은 휴일을 선포하고 모든 시내의 상업을 중단시키며 맞섰는데 그러자 마리우스와 루푸스의 지지자들은 시내에서 폭동을 일으킨다. 로마 시내 곳곳엔 이들 양파간에 패싸움이 벌어졌고 이에 휘말린 집정관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도망갔어야 했었고 이때 마리우스는 술라를 숨겨주는 대가로 휴일 선포를 취소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이어 열린 집회에서 루푸스는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를 35개 그룹에 배당하겠다는 법안을 가결시키고 뒤이어 놀라라는 도시에 집결했던 미트라다테스 원정군의 지휘권을 술라에게서 뺏고 마리우스에게 준다는 법안을 가결시킨다. 이로써 69세의 마리우스는 이전의 군사적인 영광을 성취하여 정계에 복귀할 기회를 얻게된 것이었다.

10 술라의 로마 진군

하지만 로마 역사상 군단 지휘권은 집정관 혹은 법무관이 갖는 것이 상식이였으며 예외의 경우가 임기가 만료된 집정관이 전직 집정관이라는 신분으로 지휘권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우스는 아무런 공직에 있지 않았던 민간인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 지휘권은 집정관 고유의 권한이였는데 이것을 빼앗아 일개 시민에게 주는 것은 전대미문의 폭거였다.

이때 눌라에 있었던 술라는 군단 편성을 마친 상태였는데 이때 마리우스가 이 군단을 지휘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술라는 격분하였고 따라서 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한다. 이것은 로마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로 수백 년간 수많은 집정관들이 군단을 지휘하였으나 한 명도 이 군대로 로마를 공격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술라는 대담하게도 수도 로마를 공격하였다.

술라의 로마 공격을 술라 휘하의 지휘관들은 한 명[11] 을 제외하곤 모두 불복한다. [12] 하지만 일선 병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술라 휘하에서 동맹시 전쟁을 치른 병사들이였다. 이들은 무산자들로 앞으로의 봉급 문제, 퇴직금 문제 등을 술라에게 기대고 있었으며 때문에 로마군이라기보단 술라의 군대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군사령관에 의한 사병화는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 준 폐혜였고 술라가 이런 폐혜를 이용한 첫 장군이였던 것이었다.

술라는 로마 공격에 6개 군단을 동원하였고 마리우스는 이를 저지하고자 노예와 검투사를 모와 군대를 이끌고 맞섰으나 쉽게 패배한다. 마리우스는 자신의 퇴역병들이 정착하고 있었던 북아프리카로 달아났고 술라는 로마에 입성한다.

술라는 로마 원로원에게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였는데, 그는 마리우스와 루푸스가 집정관의 고유의 권한인 군단 지휘권을 멋대로 바꾸었으며 이는 로마의 전통과 정치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나서서 이것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를 억울한 희생양으로 묘사하였고 마리우스의 루푸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였고 또한 루푸스의 모든 법안을 철회한다.

그러나 뒤이어 열린 집정관 선거에서 로마 시민들은 술라의 로마 진군에 대한 분노감을 표시하는데 따라서 술라가 내세운 후보들은 모두 낙선하였고 마리우스 일파에 가까운 후보들이 모두 당선된 것이었다. 술라는 로마 진군이이라는 행위를 지울만한 군사적 성취를 원했고 때문에 미트라다테스 원정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선된 차기 집정관들을 불러 술라의 법안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시키고 미트라다테스를 공격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떠난다.

11 집정관 킨나

이때 술라의 강요로 맹세를 한 두 집정관 중 한 명은 킨나였다. 그는 민중파에 해당되는 사람이였으며 마리우스의 지지자의 하나였다. 이런 킨나의 당선은 로마 시민들이 명백히 술라의 로마 진군이라는 만행과 그의 독단적인 법안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킨나는 술라에게 맹세를 하긴 하였으나 그는 이 맹세는 강요에 의해 된 것이므로 지킬 의무가 없다고 말하였고 과거 루푸스가 시도하였던 새로운 로마 시민권자들을 기존의 35개의 그룹에 배치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되자 원로원은 동료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움직여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였으며 궁지에 몰린 킨나는 로마를 떠나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을 방문하며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줄 것을 촉구한다. 이런 킨나에게 많은 지지자가 몰렸는데 킨나가 군대를 구성해서 로마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생각한 원로원은 그를 집정관 직에서 파면키로 하고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이렇게 되자 아프리카에 있었던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에 자신의 베테랑 군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킨나의 세력과 연합한다. 원로원도 서둘러 군을 편성하여 맞섰으나 마리우스와 킨나에 의해 패배하였고 이들은 로마를 점령하게 된다. 마리우스와 킨나는 술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으며 집정관인 옥타비우스를 살해한다. 그 뒤 집정관 선거에서 나란히 당선되었고 이는 마리우스에겐 7번째의 집정관직이었다.

12 마리우스의 최후

마리우스는 드디어 기원전 88년에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하게 되었다. 그가 로마에 영향력을 잃은지 10년만에 다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잘 활용하여 다시 권력을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집정관직에 취임한 지 보름만에 마리우스는 죽었고 폐렴으로 죽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최후는 마리우스가 실각한 이후 과거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것을 본다면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로마공화정을 위기로부터 구했으나 노년에 가선 이 공화국을 토대를 흔듦으로써 결국 공화정의 붕괴를 초래하게 만든 것이었다.

마리우스가 죽은 뒤 킨나는 사실상 로마의 일인자가 되어 4년에 걸쳐 연속으로 집정관이 되어 통치한다. 그러나 술라가 미트라다테스와 강화를 맺고 이탈리아에 상륙하려하자 군대를 편성하여 맞서려고 하다 군대의 폭동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다. 그 뒤 민중파들은 권력의 공백을 겪게 되었고 술라는 이들을 맞아 승리하여 로마를 점령한 뒤 민중파들을 철저히 숙청하고 전통적인 원로원 주도의 정치제도를 강화시킨다.

여담이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 되는 사람이다. 덕분에 소년기를 막 벗어날 무렵 마리우스와 그의 정적 술라 간의 내전에 휘말려야 했던 카이사르는 일찌감치 민중파의 일원으로 낙인찍히는 신세가 되었다.

민중파의 숙청과 함께 마리우스는 불명예스러운 인물로 취급되어 시신은 티베레 강에 버려졌고 조각상은 파괴되었다. 나중에 정계에 입문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복권되었다.
  1. 주의할 점은 당대 로마 귀족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점이다. 현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름 고향에서는 유력한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2. 라고 메텔루스는 생각했지만, 호민관 시절 마리우스가 메텔루스의 파벌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빅엿을(...) 먹임으로써 이 관계는 있으나 마나 한 게 되었다.
  3. 이는 중국의 병법가였던 오기도 그렇게 하였다. 오기는 휘하 병사에게 난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준 적이 있는데, 이러한 행동 역시 병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으므로 이 점은 마리우스와 오기가 비슷하다.
  4. 그 아들은 훗날 커서 메텔루스 피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집정관을 역임한 뒤 스페인에서 세르토니우스 반란을 진압하는 총사령관에 임명되게 되었다. 하지만 세르토니우스는 만만치 않았고 나중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진압하는데 성공한다
  5. 이는 선거운동을 할 시간을 최대한 뺏으려는 의도였다.
  6. 2위는 칸나이 전투 하지만 아리우시오 전투에 대한 기록자인 발레리우스 안티아스의 기록에 대해, 대체로 리비우스가 별로 높은 신뢰성을 부여하지 않는 점 및 일반적으로 당시 전투에 참가한 2개 야전군은 보통 4~6만으로 추산되는 점 등을 보아 군단병 8만+기타 4만이 전사했다는 기록은 과장이 있다고 평가된다.
  7. 집정관을 두 번 할 수는 없다는 법은 이미 200년 전에 규정되어졌고 이는 충실히 지켜졌다.
  8. 200년간 지켜온 전통을 저항없이 바꾼 것은 그만큼 로마가 위기에 직면했다는 의미가 된다.
  9. 5년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된 인물은 임기 제한이 없었던 공화정 초기에도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전대미문한 일이었다.
  10. 사트루니누스에게 맞아죽은 집정관 후보는 원로원 의원이였고, 또한 세트루니누스의 행동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였기 때문이었다.
  11. 이 한 사람이 나중에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지휘하게 되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이다.
  12.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한 명만 불복했다고 잘못된 언급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