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대 덴노 | ||||
33대 | → | 34대 | → | 35대 |
스이코 덴노 | 조메이 덴노 | 고교쿠 덴노 |
시호 | 오키나가노타라시히히로누카노스메라미코토 | |
능묘 | 오시사카노우치노미사사기(押坂内陵)[1] | |
휘 | 타무라(田村) | |
배우자 | 타카라 황녀(宝皇女), 타메 황녀(田眼皇女)[2], 호테노 이라츠메(法提郎女)[3], 카야노 우네메(蚊屋采女) | |
아버지 |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4] | |
어머니 | 아라테노히메 황녀(糠手姬皇女)[5] | |
자녀 | 나카노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 오오아마 황자(大海人皇子), 하시히토 황녀(間人皇女)[6], 후루히토노오오에 황자(古人大兄皇子) | |
생몰년도 | 593년~641년 음력 10월 9일(세는나이 : 49세) | |
재위기간 | 629년 음력 1월 4일(2월 2일)~641년 음력 10월 9일(11월 17일) | |
사망지 | 백제궁(百濟宮) |
1 소개
소가 씨의 피를 잇지 않은 비다츠 덴노 계열의 황족 중에서 최초로 황위에 오른 덴노이자 現 일본 덴노 가문의 직계 조상.[7]
비타츠 덴노의 황자인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押坂彦人大兄皇子)와 아라테노히메 황녀(糠手姬皇女) 사이에서 태어난 황자로 부모가 모두 덴노의 자식인 강력한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오시사카 황자는 비타츠 덴노 사후에 31대 요메이 덴노의 태자[8]로서 차기에 황위 계승이 가장 유력했던 인물이었으나, 소가 씨의 조정 내 영향력 확대와 황위 계승상의 우위를 확립하기 위한 대신 소가노 우마코의 공작으로 인해 결국 황위 계승이 좌절되었다.
아버지가 덴노가 되지 못했고, 스이코 덴노 즉위 연간에는 쇼토쿠 태자가 차기 황위 계승자로 낙점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무라 황자는 사실상 황위 계승 상에서 거리가 먼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621년 음력 2월 5일에 쇼토쿠 태자가 사망한 이후에도 무슨 연유인지 스이코 덴노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스이코 덴노 사후에 황위를 계승할 후보자를 정하는 것을 놓고 조정 내의 여러 씨족들 간에 알력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2 황위 계승 분쟁
7년이 지나 스이코 덴노가 죽기 전인 628년 음력 3월 6일에 스이코 덴노는 두 황자를 불렀다. 한 명은 타무라 황자이고 다른 한 명은 쇼토쿠 태자의 아들이자 소가 씨의 피를 잇는 황자로, 당대의 대신 소가노 에미시의 조카였던 야마시로노오오에(山背大兄)였다. 스이코 덴노는 두 황자에게 유언을 전했는데...문제는 이 유언 자체가 엄청나게 모호했다.
"임자(6일)에 덴노의 병이 심해져서 나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타무라 황자를 불러 “황위에 올라 나라의 기초를 닦고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원래 안이하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하고 잘 살펴 경솔하게 말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또 같은 날에 야마시로노오오에를 불러 “너는 아직 미숙하다.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어도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라.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따르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 일본서기 권 22 스이코 덴노 36년 3월 임자 조
위 내용을 보면 일방적으로 타무라 황자가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읽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야마시로 황자에 전한 유언도 그가 황위 계승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스이코 덴노의 유언은 한 사람을 후보자로 확정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후보자로 지명한 것이기 때문에, 유언의 내용에 따라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를 놓고 군신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때 소아하이신이 대신이었다. 그는 혼자 후계를 정하려고 하였으나, 군신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안배마려신과 상의하여, 군신들을 대신의 집에 모이게 하여 향응을 베풀었다. 연회를 끝내고 산회하려고 할 때 대신이 안배신에게 명하여 군신에게 말하도록 하였다.‘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사가 없다. 만일 속히 결정하지 않으면 내란이 일어날까 걱정이다. 지금 어느 왕을 후계로 해야 하는가. 천황이 와병 중일 때 타무라 황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대임이다.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 타무라 황자여, 신중하게 생각하라 태만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야마시로노 오오에 왕에게 ‘그대는 혼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라 삼가며 그릇됨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이것이 천황의 유언이다. 지금 누구를 천황으로 할 것인가?’ 그때에 군신이 침묵하여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다시 물었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그때 대반경련이 나아가 ‘천황의 유언을 따라야 합니다. 군신의 말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고 말하였다. 이에 안배신이 ‘무슨 말인가. 본심을 밝혀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반경련이) ‘천황이 어떤 생각에서 타무라 황자에 ‘천하의 통치를 위임하는 일은 대업이다. 태만하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에 따르면 황위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채녀신마례지, 고향신우마, 중신련미기, 난파길사신자 등 네 명의 신하가 ‘대반련의 말에 전혀 다른 이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허세신대마려, 좌백련동인, 기신염수 3인이 나아가 ‘山背大兄 왕, 이분을 천황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소아창마려신만이 혼자 ‘신은 지금 당장에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생각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대신은 군신이 화합하지 못하여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 일본서기 권 23 조메이 덴노 즉위전기 스이코 덴노 36년 9월 조
위 기사에서는 당시의 대신 소가노 에미시가 원래 독자적으로 후보를 선정하려 하였으나, 군신의 반발을 두려워하여 긴급히 회의를 소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왕위계승 자체는 왕실 내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기내 지역의 씨족들의 이해관계도 깊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의 후보자 중에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는 군신들 간에 큰 화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군신회의에서 의견 합의를 도출해 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에미시는 회의를 파했는데, 며칠 후에 회의의 결과를 전해들은 야마시로노오오에는 회의에서 타무라 황자를 지지하는 군신의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숙부인 에미시에게 사자를 보내 그의 뜻을 듣고 싶다고 전하였다.
이때 山背大兄은 반구궁에 있으면서 의논한 말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삼국왕, 앵정신화자고 두 사람을 보내 몰래 대신에게 “전하여 듣건대, 숙부는 田村皇子를 천황으로 삼으려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서서 생각해도, 앉아서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바라건대 분명하게 숙부의 생각을 알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대신은 山背大兄이 전하는 말을 듣고 혼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배신, 중신련, 기신, 하변신, 고향신, 채녀신, 대반련 등을 불러 상세히 山背大兄의 말을 전하였다. 이윽고 또 대부들에게 “그대 대부들은 함께 반구궁에 가서 山背大兄에게 ‘어찌 신하인 저 혼자서 후계를 결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천황의 유언을 받들어 군신에게 말할 따름입니다. 군신들은 유언과 같이 田村皇子가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하며 다시 누가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라고 모두 말합니다. 이것이 군신의 뜻입니다. 신의 혼자 생각이 아닙니다. 신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더라도 삼가 두려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얼굴을 뵙는 날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내가 말하였다고 전하여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부들은 대신의 말을 듣고 반구궁으로 갔다. 그리고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대신의 말을 山背大兄에게 전하게 하였다. 그때 대형왕은 여러 대부들에게 “천황의 유언은 어떠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대부들은) “신들은 깊은 것은 모릅니다. 오직 대신의 말에 따르면, 천황이 병석에 누워있던 날 田村皇子에게 ‘경솔하게 장래의 국정을 말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그대 田村皇子는 신중하게 말하고, 태만해서는 안된다.’라고 명을 내리고, 다음에 대형왕에게는 ‘그대는 아직 어리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반드시 군신의 말에 따르라.’라고 명하였습니다. 이것은 가깝게 모시고 있던 여러 여왕 및 궁녀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또한 대왕이 분명히 알고 계시는 바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대형왕은 “이 유언은 도대체 누가 들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것은 기밀이기 때문에 신들은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山背大兄이) 다시 대부들에게 “친애하는 숙부가 마음을 써서 사자 한 사람만 보내지 않고 중신들을 보내 깨우쳐 주셨다. 이것은 큰 은혜다. 그런데 지금 군경이 말하는 천황의 유언은 내가 들은 것과 조금 다르다. 나는 천황이 와병 중이라는 것을 듣고 달려가 궁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중신련미기가 궁 안에서 나와 ‘천황이 부르십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아가 내전으로 향하였다. 율외채녀흑녀가 뜰에서 맞이하여 대전으로 안내하였다. 들어가 보니 근시인 율하녀왕을 위시하여 궁녀 유녀 8인 등 모두 수십 인이 천황 옆에 있었다. 또 田村皇子도 있었다. 천황은 병이 위중하셔서 나를 보지 못하셨다. 그래서 율하녀왕이 ‘부르신 山背大兄 왕이 왔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천황이 몸을 일으켜 ‘짐은 덕이 없는 몸으로서 오랫동안 대업을 맡아왔다. 지금 명운이 다하여 병을 피할 수는 없다. 그대는 본래 짐의 심복이다. 총애하는 마음은 비할 데가 없다. 황위의 계승은 짐의 세대에 한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에 충실하여라. 그대는 어리더라도 삼가 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일은 당시에 거기에 있던 측근들이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이 대은을 입어 두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가의 통치는 중대한 일이고, 나는 어리고 현명하지 못한데 어찌하여 대임을 맡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숙부 및 군경들에게 상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말할 기회가 없어서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이전에 숙부의 병문안을 하려고 왕경에 가서 풍포사에 묵은 적이 있다. 이 날 천황께서는 팔구채녀유녀를 보내 ‘너의 숙부인 대신은 항상 너를 걱정하며 언젠가는 반드시 황위가 그대에게 갈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삼가고 자중하라’고 명하셨다. 전에 틀림없이 이러한 일이 있었다.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내가 어찌 천하를 탐하겠는가. 오직 들은 것을 밝히는 것뿐이다. 천신지기가 함께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천황의 유칙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대신이 보낸 여러 경들은 원래 신성한 창의 가운데를 잡는 것처럼 공정하게 주상하는 사람들이니 숙부에게 잘 말씀하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에미시는 회의에 따라, 군신의 의견은 타무라 황자의 옹립으로 통일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스이코 덴노의 뜻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반대로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자신이 유조를 들었을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자신은 왕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유언의 올바른 뜻을 알고 싶다고 전하였으나,
山背大兄은 삼국왕과 앵정신을 군경과 함께 대신에게 보내서 “대답을 듣고 싶다.”고 말하도록 시켰다. 그러자 대신은 기신과 대반련을 보내 삼국왕과 앵정신에게 “전일에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신은 감히 어느 왕을 가볍게 여기고 어느 왕을 중하게 여기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며칠 후에 山背大兄은 또 앵정신을 보내 대신에게 “전일의 일은 내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다. 오히려 숙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날 대신은 병이 나서 직접 앵정신을 만나 말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대신은 앵정신을 불러, 안배신·중신련·하변신·소간전신·대반련을 보내어 山背大兄에게 “흠명천황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군경은 모두 다 총명합니다. 오직 신만이 현명하지 못하지만, 때마침 인물이 없는 때를 만나서 어긋나게 군신의 윗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황위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중대합니다. 전언하여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노신이 힘들어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유칙을 거스르지 말자는 것으로, 신의 사사로운 생각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에미시는 계속 스이코 덴노의 뜻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직접 말하기를 꺼리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야마시로노오오에는 자기는 그저 들은대로 말했을 뿐이라면서 어찌 숙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냐며 태도를 유보하였다. 이 시기에 야마시로노오오에가 왕위계승을 포기함에 따라 실질적으로 타무라 황자의 왕위계승이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그런데 타무라 황자의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야마시로노오오에의 지지자였던 사카이베노오미마리세는 에미시에게 반기를 들었다. 마리세는 전대 대신인 소가노 우마코의 동생으로 에미시의 숙부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그는 스이코 20년에 황태부인 키타시히메[9]를 긴메이 덴노의 능에 합장하는 행사에서 "씨성의 본"[10]을 誄하였으며 그의 일족으로 추정되는 대덕 사카이베노오미오마로의 존재로 볼 때, 스이코 조에는 우마코 다음가는 실력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신회의에 앞서 에미시는 숙부인 마리세를 찾아가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인지를 물었는데, 이는 그가 소가씨 내부에서 장로격인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에 앞서 대신이 홀로 경부마리세신에게 “지금 천황이 붕어하시고, 후계자가 없다. 누구를 천황으로 세워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山背大兄을 천황으로 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결국 야마시로 황자의 왕위계승이 좌절되자 마리세는 형 소가노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던 소가씨의 막사를 파괴하는 등, 대대적으로 깽판을 친 뒤에 야마시로 황자의 이복형제인 하츠세베나카츠왕의 궁으로 숨었다.
이미 대신은 안배신·중신련을 통하여 다시 한 번 경부신에게 “어느 왕을 천황으로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경부신은 “일전에 대신이 친히 물으셨을 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새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크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갔다. 이때 소아씨의 일족이 모두 모여서 도대신을 위해 묘를 만들려고 묘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때 마리세신은 묘소의 막사를 부수고, 소아의 전가로 물러가서 출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은 분노하여 신협군승우와 금직수적저를 보내 “지금 나는 그대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친족의 의리로서 해칠 수는 없다. 다만 타인이 그르고 네가 옳다고 하면, 나는 반드시 타인에 거슬러도 너를 따르겠다. 만일 타인이 옳다고 하고 네가 그르다고 하면, 나는 당연히 너를 등지고 타인을 따를 것이다. 이 때문에 네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너와 틀어질 것이다. 나라도 어지러워질 것이다. 그러면 후세 사람들이 우리 둘이 나라 일을 망쳤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후대의 오명이 될 것이다. 너는 삼가 반역을 일으키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따르지 않고 마침내 반구로 가서 박뢰왕의 궁에서 머물렀다. 대신은 더욱 노하여 군경을 보내 山背大兄에게 “요새 마리세가 저를 배반하여 박뢰왕의 궁에 숨어 있습니다. 마리세를 내보내 주시면 그 이유를 추문코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형왕이 “마리세는 원래 성황이 좋아하셨다. 지금 잠시 와 있을 뿐이다. 어찌 숙부의 마음과 다를 것인가. 허물하지 말길 바란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마리세에게 “그대가 선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온 것은 몹시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대 하나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울 것이다. 또 선왕이 임종하실 때 여러 아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 좋은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을 받들어 길이 훈계로 삼고 있다. 그래서 사사로운 정이 있어도 참고 원망하지 않는다. 또 나는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바라건대 앞으로는 꺼리지 말고 여러 경들의 의견을 따라 거역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이때 대부들은 마리세에게 “대형왕의 말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마리세신은 의지할 바가 없어졌다. 이에 울면서 집에 돌아와 지낸 지 십여 일이 되던 날, 박뢰왕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이에 마리세신이 “나는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의지할 사람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대신은 경부신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보냈다. 경부신은 군사들이 왔다는 것을 듣고, 차남 아야를 데리고 문을 나가 걸상에 앉아서 기다렸다. 곧 군사들이 와서 내목물부이구비에게 목 졸라 죽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이들을 같은 장소에 묻었다. 다만 장남인 모진만은 니사의 기와집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그는 거기서 비구승 한둘을 범하였는데, 비구승 하나가 질투하여 그 사실이 밝혀졌다. 절을 포위하여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도망하여 무방산에 들어갔다. 그래서 산을 수색하였다. 모진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결국 그는 목을 찔러 산중에서 죽었다. 사람들이 노래하였다. "무방산은 들어선 나무가 적어도 거기에 의지하려고, 모진이라는 젊은 분은 여기에 숨어 있었던가."
그런데 당시에는 한 씨족의 대표자가 죽었을 때, 일족 전체가 모여서 묘소를 조영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묘소 조영뿐만이 아니라 차기 대표자의 족장권과 정치적 우위를 대대적으로 공인받는 관습이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은 마리세의 자충수가 되었는데, 형 우마코의 묘소를 조영하기 위해 모인 일족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소가 씨 전체의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 바꿔 말하면, 소가 씨 전체에서 에미시의 족장권 승계를 공인했다는 얘기가 되므로 마리세는 결국 에미시 좋은 일만 한 셈이다.
숙부가 자기 아버지의 묘소를 공격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에미시는 마리세에게 사자를 보내 "당신 때문에 우리가 후세에 역적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냐? 지금이라도 당신 말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면 살려주겠다."라고 했지만 결국 이걸 거부하고 하츠세베나카츠왕의 궁궐에 숨은 것이다.
이에 에미시는 이 사태를 야마시로 황자에게 고하였고, 야마시로 황자는 마리세에게 "그대는 우리 아버지가 총애하던 신하였고 그 뜻에 따라준 것은 고맙다. 근데 지금 너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난 숙부를 배반할 수 없다. 부탁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따라라."라고 말했다. 마리세는 조정 내에서 완전히 고립된데 더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었고, 결국에는 10여일 후에 하츠세베나카츠왕이 병으로 급사함과 동시에 에미시가 보낸 군대의 손에 두 아들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629년 음력 1월 4일, 에미시를 중심으로 군신들은 타무라 황자에게 신새를 바치고 왕위에 오를 것을 종용하였다. 타무라 황자는 고사하였으나 결국에는 군신의 뜻을 받아들여 즉위하였다.
2.1 즉위 이후
2.2 즉위전기의 문제점 : 압도적인 장문의 기사
일본서기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상당수는 조메이 덴노의 즉위전기 기사가 압도적인 장문으로 기술된 것에 대해 후대의 윤색 또는 가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일본서기의 편찬을 지시한 덴무 덴노가 아버지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장문의 기사를 편술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일부 대목에서 가필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처음에 열린 군신회의에서 의견이 합치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메이 덴노의 즉위를 정당화하는데 오히려 역효과임을 지적한 견해가 있다.
추가바람.- ↑ 일본 학계에서 비정한 서명천황의 능.
- ↑ 비다츠 덴노-스이코 덴노의 딸.
- ↑ 소가노 우마코의 딸이자 소가노 에미시의 여동생.
- ↑ 비다츠 덴노-히로히메(広姫) 황후의 아들.
- ↑ 비다츠 덴노의 딸로 오시사카노히코히토노오오에 황자의 이복여동생.
- ↑ 코토쿠 덴노의 황후.
- ↑ 조메이 천황 계열은 38대 덴지 덴노 이후에 임신의 난으로 고분 덴노가 실각하면서, 40대 덴무 덴노 계열로 이어졌다가 덴지 덴노의 손자였던 46대 코닌 덴노를 시작으로 오늘날에 이른다. 즉, 오늘날의 덴노 가문은 조메이 계열, 정확히는 덴지 계열로 이어져 온 것이다.
- ↑ 단, 오시사카 황자가 요메이 덴노의 태자였다는 기술은 일본서기에만 보인다. 그리고 고사기에서는 덴노로 즉위하지 못했음에도 오시사카 황자의 혼인 및 가족관계가 대단히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거의 덴노에 준하는 위치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8세기 일본서기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당시 덴노 가문의 직계 조상이었던 오시사카 황자를 높임으로서 조메이 덴노 계열의 집권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기술을 집어넣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 29대 긴메이 덴노의 비로 31대 요메이 덴노, 33대 스이코 덴노의 어머니. 소가노 우마코와 사카이베노오미의 자매이다.
- ↑ 쉽게 말하면, 당시 왕권의 중앙부에 위치하던 여러 씨족들의 연원에 대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