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지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37대38대39대
사이메이 덴노덴지 덴노고분 덴노

天智天皇
? ~ 672년 (재위 : 668 ~ 672년)

1 설명

일본의 제38대 덴노. 아버지는 조메이 덴노, 어머니는 고교쿠 덴노. 이름은 카츠라기(葛城)이지만 나카노오호에(中大兄)로 잘 알려져있다.

2 소가씨를 몰아내다

664년에 호후코우지(法興寺)의 느티나무 밑에서 타국(打毱) 경기를 하다가 가죽신발이 제기공과 함께 벗겨져 땅에 떨어졌고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가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주워주자 나카노오호에도 이에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받은 것을 계기로 서로 친해지고 마음 속에 있던 것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와 함께 부치노선생(南淵先生) 밑에서 배우면서 소가노 이루카를 도모할 계획을 상의하고 인재를 천거받았으며,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의 주선으로 소가노 쿠라야마다노마로(蘇我倉山田麻)의 장녀를 비로 삼아 결혼했다.

645년 6월 12일에 을사의 변을 일으켜 대극전으로 들어갔고 사에키노 무라지코마로(佐伯連子麻呂),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무라지아미다(葛城稚犬養連網田) 등이 위세에 눌려 이루카를 공격하지 못하자 함성을 외치면서 갑자기 뛰어나와 이루카의 머리, 어깨 등을 베었고 사에키노 무라지코마로,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무라지아미다도 뒤늦게 나와서 이루카를 암살하는 것에 성공한다.

3 실권을 장악하다

14일에 고교쿠 덴노에게 양위를 받았지만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의 조언에 따라 이를 사양하면서 카루 황자에게 양위되어 코토쿠 덴노로 즉위하면서 나카노오호에는 황태자가 되었는데, 이는 자신이 황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인심을 사면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649년 3월 17일에 아헤노 쿠라하시마로노오호오미(阿陪倉梯麻呂大臣)가 죽자 코토쿠 덴노, 다른 공경들과 함께 애도했으며, 나카노오호에는 소가노 오미히무카(蘇我臣日向)로부터 장인인 쿠라로야마다노 오호오미(倉山田大臣)가 모반을 일으킨다고 모함하면서 오호토모노 코마노무라지(大伴狛連), 미쿠니노 마로노키미(三國麻呂公), 호즈미노 쿠히노오미(穗積嚙臣) 등을 보내 쿠라로야마다노 오호오미를 추궁하자 직접 덴노를 뵙고 전해드리겠다는 대답을 받았다.

결국 고교쿠 덴노가 군사를 보내 쿠라로야마다노 오호오미를 죽였고 나카노오호에는 처리 과정에서 쿠라로야마다노 오호오미가 결백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으며,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인 소가노 미야츠코노히메(蘇我造媛)가 매우 슬퍼하다가 죽자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했다.

653년에는 민법사(旻法師)가 죽자 사신을 보내 조문하게 했으며, 코토쿠 덴노에게 아스카로 천도할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하자 다른 황족들과 함께 아스카카와베 행궁(飛鳥河邊行宮)으로 옮겨 정치적으로 코토쿠 덴노를 고립시켰다. 654년에 코토쿠 덴노가 죽자 655년에 사이메이 덴노를 세우도록 했고 660년에 물시계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줬다.

4 백제 부흥 운동 지원

661년에 사이메이 덴노가 죽자 차기 군주가 없는 상태에서 국정을 맡아 8월에 나가츠노미야(長津宮)로 옮겨 거주하면서 백제 부흥군을 위한 군사 파병을 지원해 여러 장수들을 보냈으며, 9월에 부여풍에게 관직을 주었으며, 662년에 귀실복신, 부여풍에게 여러 물품을 지원하면서 수군 170척을 보냈다.

663년에는 군사 2만 7천명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결국 백강 전투에서 파견한 일본군이 전멸하고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665년에 백제의 남녀 4백여 인을 오미국(近江國)의 카무사키노코호리(神前郡)에 살게 하면서 나가토국(長門國), 치쿠시국(筑紫國)의 오오노(大野), 키(椽) 등에 성을 쌓게 했다.

666년에는 사헤키노 코마로노무라지(左伯子麻呂連)의 집에 가서 그를 병문안했으며, 미야코(京都)의 쥐들이 오미국으로 가자 백제의 남녀 2천여 명을 토호쿠(東國)에 살도록 했다. 667년 3월 19일에 도읍을 오미로 옮겼고 8월에는 쿄(京)로 행차했으며, 11월에 야마토국(倭國)의 타카야스노키(高安城), 사누키국(讚吉國) 야마다노코호리(山田郡)의 야시마노키(屋島城), 츠시마국(對馬國)의 카나타노키(金田城) 등을 쌓았다.

5 덴노 즉위 이후

668년 1월 3일에 덴노로 즉위[1]했고 7일에 연회를 했으며, 야마토노히메오호키미(倭姬王)를 황후로 삼고 오치노이라츠메(遠智娘), 오치노이라츠메의 누이동생 메이노이라츠메(姪娘), 타치바나노이라츠메(橘娘), 히타치노이라츠메(常陸娘) 등을 빈으로 삼았다.

궁인 중에서 시코부코노이라츠메(色夫古娘), 쿠로히메노이라츠메(黑媛娘), 코시노미치노키미이라츠메(越道君伊羅都賣), 이가농네메야카코노이라츠메(伊賀采女宅子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

여름 5월 5일에 카마후노(蒲生野)에서 놀러다녔고 669년 여름 5월에 야마시나노노(山科野)에 사냥을 나갔으며, 가을 8월 3일에 타카야스노미네(高安嶺)에 올라가 성을 쌓는 일을 의논했다. 겨울 10월 10일에 나카토미노 카마코노무라지의 문병을 갔고 16일에 그가 죽자 후지와라(藤原)씨를 성씨로 내렸으며, 19일에 그의 집에 행차해 조서를 내리면서 금 향로를 하사했다.

또한 타카야스노키를 쌓으면서 당나라에 견당사를 보냈고 670년 정월에 궁문 안에서 조정의 행사를 열었으며, 2월에는 호적을 만들면서 도적, 부랑자를 단속했다. 카마후노코호리(蒲生郡)의 히사노노(匱迮野)에 가서 궁지를 살펴보고 타카야스노키(高安城)를 수리해 나락, 소금을 쌓아두었다.

672년 2월에 여러 대신들을 임명했고 9월에 병이 위중[2]했으며, 겨울 10월에 호후코우지에 사자를 보내 여러 보물들을 불전에 올렸고 17일에 병이 더욱 위중했다. 12월 3일에 오미야(近江宮)에서 죽었다.

6 왜곡된 기록

일본서기의 목적인 덴노와 유력씨족의 위엄을 높이자라는 것으로 인해 왜곡된 부분이 많이 보이는데, 왜곡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661년 3월 4일에 신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고구려는 조정에 구원을 요청했다.[3]
  • 668년 가을 9월 12일에 신라가 사탁 급찬 김동업 등을 보내 조를 올렸다.
  • 67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올렸다., 겨울 10월에 신라가 사찬 김만물을 보내 조를 바쳤다.

7 백인일수

백인일수
덴지 덴노지토 덴노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야마베노 아카히토사루마루노 다이후
오토모노 야카모치아베노 나카마로기센 법사오노노 코마치세미마루
오노노 다카무라승정 헨조요제이 덴노미나모토노 토오루고코 덴노
아리와라노 유키히라아리와라노 나리히라후지와라노 도시유키이세모토요시 친왕
소세이 법사훈야노 야스히데오에노 치사토스가와라노 미치자네후지와라노 사다카타
후지와라노 다다히라후지와라노 가네스케미나모토노 무네유키오시코치노 미쓰네미부노 다다미네
사카노우에노 고레노리하루미치노 쓰라키기노 도모노리후지와라노 오키카제기노 쓰라유키
기요하라노 후카야부훈야노 아사야스우콘미노모토노 히토시다이라노 가네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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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온지 긴쓰네후지와라노 사다이에후지와라노 이에타카고토바 덴노쥰토쿠 덴노
제 1번 덴지덴노(天智天皇)

秋の田の かりほの庵の 苫をあらみ / わが衣手は 露に濡れつつ
아키노타노 카리오노이오노 토마오아라미 / 와가코로모데와 츠유니누레츠츠
가을 들녘의 볏단 쌓은 초막의 성긴 지붕에 / 나의 소맷자락은 이슬이 젖어드네

  1. 다른 기록에는 667년 3월에 즉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 다른 기록에는 8월에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3. 고구려가 도움을 실제로 요청한 것은 일본 조정이 아니라 백제 부흥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