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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년 9월 21일 ~ 1972년 4월 27일)
가나의 정치가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가나의 독립 운동을 지휘하여 아프리카 독립 운동의 아버지라 불린다.
1 초기생애
당시 영국령이던 골드코스트 출생으로 어렸을 때 가톨릭 선교사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그가 소속된 아칸 부족에서 낮은 계급을[1] 가졌지만 가나의 수도 아크라의 대학을 들어갔으며 졸업 후 교사가 되었다. 이후 1935년에는 친족들에게서 돈을 빌려 미국으로 유학하여 링컨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45년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서 런던 경제 대학교(LSE)에서 공부하던 중, 서아프리카 학생동맹[2] 부회장을 역임 했다. 그 이후 아프리카의 탈식민지화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1947년 은크루마는 다시 가나로 돌아와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이다 1949년에 투옥됐다.
2 감옥에서 총리로
하지만 그의 행동으로 국내 위기가 계속되고 국가 행정이 마비되기에 이르자 은크루마는 다시 체포되어 중노동이 부과되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51년 2월 8일에 실시된 첫 번째 총선에서 인민의회당은 자신들의 위력을 힘껏 발휘했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은크루마는 감옥에서 석방되어 1952년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는 1951년 미국을 잠시 방문하는 동안 링컨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민회의당은 의회의 전체 104석 중 72석을 확보해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야당들은 지역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온존시키는 것은 그에게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이에 따라 은크루마는 1957년 12월 지역 정당들을 강제적으로 하나의 전국적인 야당으로 통합시켰다. 이듬해 은크루마는 위험인물로 간주되는 사람을 재판 없이 구금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예방구류법을 제정했다.
1960년 가나가 독립 후 그는 아프리카의 현 문제는 서구가 가져온 자본주의의 악영향 때문이라고 보고 자본주의가 가져온 변화를 수용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는 마르크스 사상에 기초한 흑인민족주의와 아프리카 사회주의이다 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공업과 교육, 외교, 정치 지지자 육성에 매진하였다. 또한 외부로는 자신이 아프리카의 실질적 맹주가 되기위해 노력했다.
3 실각
감옥을 반대세력 수집 콜렉션 서랍장으로 만들었고 일당독재를 추진했으며 그의 지지자 들이 권력을 남용해 반대파등의 사람들을 무단으로 잡아가도 눈을 감고 무시하였다 또한 자신이 가용할 자금 동원을 위해 카카오 유통 공사를 악용했다. 본디 이 기구는 골드 코스트에서 생산 된 카카오를 모두 매입 수출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본래는카카오의 가격 변동을 억제해 안정된 수입을 카카오 농가에 가져오게 하기위해 만들었지만 은쿠루마는 그의 자금동원을 위해 카카오 매입 가격을 낮추고 차액을 자신이 가져갔다[3] 및 농업인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이로인해 대부분의 신생국이 가지는 무질서와 국가와 국민의 역량부족으로 인한 혼란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거기에 말로는 좋은 것들을 갖다 붙이면서 실상은 아프리카가 가지는 지역/민족/부족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목놓아 비판하던 식민지 시절 국경선과 지배체계를 그대로 내지 약간 바꿔서 사용함에 따르는 어둠의 다크함까지 합치면 접임가경. 물론 이에 대한 은크루마의 대응은 너 감옥. 예를 든다면 58년 금 광산 광부 파업 이후 만든 법을 이용해 61년 철도 노동자 파업당시 반대파들을 자신의 감옥 콜렉션에 수집한 일이 있다.
국내 경제에 대한 외국 자본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래 만든 외국 기업의 국내 직접 투자를 불허하는 정책은 국내 개발을 추진 민간 자본을 해외에서 도입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그리고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카카오 집단농장도 실패로 끝났다. 카카오는 원래 소규모 농가에서도 충분히 채산성이 나오는 작물이며, 집단화시키는 필연성이 부족해 정책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기는 커녕 반대가 심했었지만 그의 사상을 위해 밀어붙인 정책이었다. 또한 집단농장 정책이 실패함에 따라 기계화에 필요한 비용도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볼타 강에 거대한 인공 호수를 만들고 그 전력으로 알루미늄 정련 공장 등의 공업지대를 가동시키고 동시에 주변국에 잉여 전력을 판매하고 외화를 얻는다는 계획도 1962년 1월 착공해 1966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지만 예상을 밑도는 성과 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시간이 지나면서 은크루마가 권력의 힘을 동원해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경찰의 서슬에 눌렸긴 했지만 국민의 그에 대한 불만은 높아져갔으며 개인적으로는 경찰을 완전히 수중에 넣어 자신의 호위겸 수족으로 쓰면서도 암살 위협에 대해 상당히 두려움을 느꼈다 한다. 거기에 경제정책은 별 효과없이 망크리를 조금씩 타며 1957년 2억파운드의 외화와 2천만의 부채를 가지고 있던 건전한 재정을 말아먹고 있었고[4] 자신이 주도한 외교전은 아프리카 통일기구로 그 결실을 맺긴했지만 본부도 그에게 반대파벌이었던 이디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에 위치했으며 기구의 성격도 이쪽에 가까운 등,자신의 사상을 투영시키지도 못해 반쪽짜리 성과가 되어 어디가서 맘껏 자랑하기엔 힘들었기 때문. 그 후 1964년에는 지지율 99.91%라는 기적의 수학을 발휘한 부정선거를 벌여 일당독재, 종신대통령체제를 만들었으나 그가 국가 및 국민의 역량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벌린 공업정책이 실패해 발생한 경제 혼란,그의 사상에 기반한 사회주의 국가와 가깝게 지내고 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더욱더 제2세계 국가들에게 다가서는 행동으로 서방국가들의 어그로를 모는 행동을 한 덕분에 그는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었다.
결국 1966년 2월 24일 베이징에 그가 갔을 때 경찰로 이루어진 친위대 설치 및 군 숙청을 한 덕분에 반은쿠르마 세력이 강한 상황이었던 군이 서방국가 첩보기관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서아프리카로 돌아온 은크루마는 기니에 망명처를 마련했는데 당시 기니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는 그와의 유대를 표명하기 위하여 은크루마를 기니의 공동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그 후 그는 망명생활을 하며 저작활동을 하다가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1972년 암으로 사망한다.
4 현재와 평가
2010년대 초반 기준 젊은 층들은 아프리카 독립의 아버지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그를 좋아하지만 중장년층들은 그를 매우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은쿠르마로 인해 발생한 혼란과 고통은 92년까지 지속되었으니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 가나에서는 묘소와 기념비, 동상을 세워주는 등 그가 가나와 아프리카 독립에 대해 기여하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해 열심히 활동한 공만큼은 인정하는 듯 하다.
2015년 SBS '좋은 아침' 설 특집에서 샘 오취리의 가나 고향집 방문기에서 방송중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가자마자 맨 먼저 독립광장을 찾아 콰메 은크루마의 묘소에 참배하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이 항목이 만들어진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