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튼 에이브럼스

그가 탑승했던 전차인 Thunderbolt VII

Creighton Abrams
1914~1974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미군 장교이자 주 베트남 미군 사령관(1968-1972)

2 활약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조지 S. 패튼 중장의 직속 부하로 미 3군에 소속되었다. 미국 육군의 주력전차 M1 에이브럼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는데, 2차 대전 당시 빛나는 활약상을 보여줬기 때문. 특히 1944년 9월 프랑스 로렌 지역 전투로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는데, 당시 그가 지휘하던 4기갑사단 37전차연대 1대대는 75mm 탑재형 M4 셔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호 전차 판터가 주장비인 독일군 기갑여단을 공군 지원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완전히 쳐바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 때, 포위된 한 개 사단의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 정중앙에 들어간 상황이었는데, 부하와의 대화가 유명하다.

"항복해야합니다. 포위되었습니다! 이러다간 전멸하게 됩니다!" 포위가 아니라 적진 중앙에 걸어들어갔다

"오, 좋군. 이제 주변이 모두 적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마음껏 발포해라."

물론 당시 기상상태가 좋지 않았고 숲이 많은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다. 더욱이 독일군의 당시 기갑여단이 숙련도 낮은 병력으로 구성된 대대급 전투단에 불과한 부대긴 했지만, 그래도 셔먼 가지고 판터를 대량으로 때려잡은 사례 자체가 드물다.

그리고 그의 활약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1944년 독일군이 감행한 최후의 대도박인 벌지 전투에서 미 제101공수사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 부대는 바스토뉴에서 독일 기갑부대의 맹공에 밀려서 완벽히 포위당해 거의 두들겨맞고 있었다. 누가봐도 장비나 병력이나 모든 것을 따져봐도 전멸할 것이 뻔했다. 이때 독일군 47기갑군단장 하인리히 폰 뤼트비츠 기갑대장, '말장수'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그가 "2시간 안에 항복하면 명예롭게 그 목숨을 살려주겠지만 끝까지 버틴다면 모두 쓸어버리겠다"며 최후통첩을 남겼다. 당시 지휘관인 맥클리프 준장은 "엿 먹어라(NUTS)!"라고 응수하며 버텼지만 현실은 거의 시궁창 레벨로, 포병은 포문당 탄약이 10발도 안 되고 병사들은 소총탄도 없이 전장에 달려와서 후퇴하는 아군의 탄약을 넘겨받아서 개인화기 탄약을 확보할 정도였다.[1]

공수사단이 독일군 기갑부대에 포위당해 고전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은 패튼이 바스토뉴 구원에 나섰는데, 이때도 에이브럼스의 1/37전차대대가 101공수사단 구출부대의 선두에 섰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도 에이브럼스의 전차대대는 독일 전차를 대량으로 때려잡는 기염을 토했으며, 이때의 분전으로 에이브럼스는 다시 한 번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다. 수훈십자훈장을 두 번 받는 것은 보통 의회명예훈장급의 영예로 취급받는데, 2차 세계대전 중 수훈십자훈장을 받은 사람은 5,000명이 넘지만, 두 번 받은 사람은 육해공군 통틀어 16명뿐이다. 이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육군 수여자 15명(나머지 1명은 해군 장교) 전원 공수부대 아니면 레인저, 그리고 육군항공대 조종사였다.

이 시점에서 에이브럼스가 지휘하던 37전차연대 1대대가 포함된 4기갑사단 B전투단은 말 그대로 패튼의 "가장 단단하고 날카로운 창끝"이었고, 그 선두에는 항상 1/37전차가 있었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37전차연대 1대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전차와 돌격포를 500대 이상 때려잡았다고까지 일컬어졌다. 수치 자체가 확실히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37연대 1대대는 거의 독일군 중전차대대 만한 활약을 보여준 셈이 된다. (...) 독일군 중전차대대의 격파전과는 통상 소련 전차 500~1500대 선이므로 1/37전차는 독일군의 우수한 중전차대대만은 못하고 평범하거나 약간 수준이하 중전차대대와 비슷한 전과를 거둔 셈이다. 그런데 독일 중전차대대는 적 전차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을 가지고 있고 미군 전차대대는 절대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만약 진짜로 독일 전차 500대를 격파했다면 정말 후덜덜한 전과다. 물론 격파교환비가 얼마나 될는지 그러므로 격파교환비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추가바람

그의 활약을 전해 들은 패튼 장군은 부하가 전공을 세운 게 못마땅했는지, 감탄한건지 "그 친구는 너무 유능해. 아무래도 오래 살 것 같지가 않은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이가 에이브럼스보다 훨씬 많은 패튼 자신보다 빨리 죽을거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오래 살지못한 건 바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패튼 장군 자신이 되어버렸고(…), 에이브럼스 장군은 이후 승승장구하여 1972년에 미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2년 뒤, 참모총장 재직중인 1974년 폐암으로 사망하는데 이 때 나이는 패튼이 죽은 나이보다 한 살 적어서 결국 최후에는 다른 의미에서는 패튼의 말이 맞아버렸다... 패튼이 자동차 사고로 오래살지 못했긴 했지만 사망 당시 나이는 60세였다. 에이브럼스는 59세(60세 생일을 못넘겼다)에 사망.
그리고 에이브럼스는 이 참모총장 재직 기간에 차기 주력전차 개발을 지시했다. 당시만 해도 "핵폭탄 있고 대전차 헬기에 대전차 미사일이 쫙 깔렸는데 탱크는 왜 만드냐. 님 바보임?"하고 비웃는 여론이 대다수였으나, 에이브럼스 장관은 주력전차 개발을 밀여붙였다. 그래서 나온 놈이 바로 M1 에이브럼스[2][3] .....
탱크로 이긴 탱크사람다운 발상이다. 그리고 올탱크 독트린도 붕괴했지만 지상의 왕자라는 전차의 아성을 무너뜨린 지상 무기 역시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P-47은 어쨌든 날아다녔잖아?

한국과 인연이 있어서, 한국전쟁 후반기에 미 제1군단과 9군단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20개 사단 증편시도와 한국군 1군 창설에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며. 이때 백선엽 장군과도 친분을 쌓았는데, 후일 백선엽 장군이 베트남에 들렀을 때 마침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으로 근무하던 에이브럼즈가 관저로 초대하기도 했다. 같이 간 주월 한국 대사에게 "마땅히 대사를 주빈으로 모셔야하나 백 장군은 한때 나의 상관이셨으니 양해해달라." 며 백선엽 장군을 주빈으로 모셨다고.

베트남 전쟁에서는 1967년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장군의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가 1968년 여름에는 그의 뒤를 이어 사령관이 되었다. 그가 베트남 미군 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닉슨 독트린과 '베트남화' 정책으로 미군의 단계적 철수가 시작했다. 최초의 철수는 69년 7월에 시작되었으며 매년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들은 감소되었으며 최종적으로 73년 3월에 소수인력[4] 을 빼곤 모두 철수했다. 닉슨 독트린 발표이전 베트남에 있었던 미군의 숫자는 약 55만명에 육박했는데 69년 연말엔 43만5천명 1970년 연말엔 33만명, 71년 연말엔 16만명, 72년 춘계공세 당시엔 9만5천명, 72년 8월엔 4만5천명, 73년 초엔 1만명, 73년 3월 완전 철수했다.[5]
그 과정에서 여전히 큰 규모의 작전은 여러 번 있었다. 이때문에 미군 병사들의 상관살해가 크게 증가했다. 처음엔 사병들이 자기들을 사지로 몰아붙이는 장교,하사관에게 시도했는데 나중엔 하급장교들이 상급장교에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관살해 대상자를 두고 현상금을 책정하기도 했으며 사병들이 발행하는 비공식 신문에 뜨기도 했다. 그외에 수색에 투입된 소부대가 구색만 맞춘채 수행중이라고 거짓무전보고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놓고 전투를 거부하는 부대도 있었으며 이때 장교들은 사병들과 타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망원인이 불분명한 비공식적 장교사망자가 천명을 넘었다.

이런 상관살해와 함께 군기가 하락하는등(마약복용, 강간등등) 미군내에서 여러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 미군은 분명 철수진행중이었고 수십만의 미군 병사들은 그들이 귀국할 날만을 기다리며 소극적으로 행동하는데 다반사였다. 그런데 상부에서 계속 수색과 작전을 밀어붙이니 병사들이 환장해버린 것. 무능하고 공명심에 취한 상층부와 갈수록 사람냄새가 없어지는 사병들도 합쳐서.

3 여담

참고로 아들 셋을 뒀는데, 셋 다 을 달았다. 장남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3세는 육군 준장으로 전역, 차남 존 넬슨 에이브럼스는 육군 대장(교육사령관을 지냈다)으로 전역, 늦둥이인 삼남 로버트 브루스 에이브럼스도 15년 8월 육군전력사령관에 착임하며 대장으로 진급되었다. 이거 별이 몇개라냐... 큰형님 시무룩행 큰형을 제외하면 모두 기갑 병과에서 활약했다. 위키백과에도 큰 형님만 항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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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크레이튼 에이브럼스 3세(좌측의 인물). 포병 출신이다. 1962년에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했고 육군에 입대했다. 최종계급 준장. 아버지가 주니어인데 아버지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아버지가 주니어인 게 생략돼서 그가 주니어인 것처럼 알려진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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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존 에이브럼스. 1946년 메인주에서 태어났다. 1966년 OCS로 입대했다. 육군교육사령관을 지내고 전역했다. 최종계급 대장[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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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둥이인 삼남 대장 로버트 에이브럼스. 1960년 독일에서 출생했다. 미국육군사관학교 1982년 졸업자이다. 2015년 6월에 버락 오바마에 의해 마크 밀리[7]에 이어 육군전력사령관 후임자로 임명되었으며 8월 14일 대장 진급과 동시에 전력사령관에 착임하였다.
  1. 밴드 오브 브라더스 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2. 실질적으로 핵은 사용 되지 못하니 그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3.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M1 에이브람스는 세계최고의 전차로 평가 받고 있다
  4. 1973년 3월 이후로 잔류한 미군은 1965년 이전, 그러니까 통킹만 사건 이전에 존재했던 군사고문단으로 이루어진 부대와 비슷한 형태였다.
  5. 베트남에서의 미군의 지상 군사작전은 1971년 라오스 침공(- 그것도.. 이 작전에서의 미군의 역할은 수송수단을 제공하는 전투지원이었지.. 직접 전투를 담당하는게 아니었다. 작전중 그들 자체의 예상밖의 손실(- 이 시점에서의 북베트남군은 헬기강습을 활용한 미군의 작전에 익숙해져서 그걸 역이용하여 고지대에 대공화기를 세팅하여 미군의 헬기와 군용기를 상당수 격추하는 성과를 가졌다.)은 미군이 맡은 전투지원의 역할을 축소했으며 그 결과 라오스 침공은 결론적으로 실패했다.) 이후로 막을 내렸으며 미군의 지상 전투부대의 핵심은 71년까지 모두 철수되었다. 구글로 알아본 결과 1972년 4월 북베트남의 춘계공세 시점에서 2개여단 규모의 미군 전투부대가 있었지만.. 직접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다. 그 2개 여단도 72년 8월에 철수한다. 72년의 북베트남의 공세에서 지상전투는 전적으로 남베트남군이 담당했고 미군이 직접 전투에 가담하진 않았다. 72년 공세에서의 미군의 역할은 군사고문단과 미국 해군과 공군의 공중우세의 역할만 담당했다.
  6. 사진은 제 10대 미 육군교육사령부 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시절 찍은 것이다.
  7. 레이먼드 오디에어노에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내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