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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의 제1야전군사령관 | ||||
초대 백선엽 | → | 2대 송요찬 | ||
대한민국 육군의 참모총장 | ||||
6대 이종찬 | → | 7대 백선엽 | → | 8대 정일권 |
9대 이형근 | → | 10대 백선엽 | → | 권한대행 이형근 |
대한민국 국군의 합동참모의장 | ||||
3대 유재흥 | → | 4대 백선엽 | → | 권한대행 유재흥 |
목차
1 개요
친일반민족행위자부터 한국전쟁 영웅까지, 평가가 극과 극인 인물.
白善燁. 1920년 11월 23일~ (2016년 10월 기준 95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국의 독립군을 전문적으로 학살하던 간도특설대 장교이자 대한민국의 군인, 전 육군참모총장, 장관, 기업인, 교육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개명했던 일본식 이름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1]
2 출신 및 친일행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냈으며 이후 1941년 만주국 봉천의 봉천군관학교[2]를 제9기로 졸업한 뒤 자무쓰 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943년 간도특설대로 전근, 3년 동안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어 활약했는데, 이 부대가 지원자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를 주로 상대하는 잔혹한 부대였다는 점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신의 자서전인 '실록 지리산', '군과 나' 등에서 해당 경력을 언급했다. 본인은 간도특설대 경력에 대해 밝히고는 있으나 특별히 후회한다고 언급하거나 사죄한 적은 없다.[3]
오히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들 때문에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니고 일본과 싸웠더라도 독립이 빨라지거나 한건 아닐꺼라고 항변하면서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민중의 평화를 위한 군인의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에서 발간한 친일진상규명위 보고서에 백선엽의 회고록 가운데 일본서적에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시인하고 있다(白善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白善燁回顧錄!, 草思社, 2000年, 71~79쪽). 이 책은 군과나의 일역판 조선전쟁 천일의 개정판이다. 군과 나 자체도 2010년에 개정판 회고록이 출간되었다.
(전략) 봉천의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나는 견습사관으로서 동부 만주의 寶淸(파오칭)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국군 보병 제28단(=연대)에서 근무하였다. (중략) 이어서 佳木斯(자무스)의 신병훈련소의 소대장으로 전임되었는데 (중략) 1943년 2월, 나는 만주 동부의 한반도에 접하는 간도성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전임되었다. (중략) 간도성 연길현 명월진(明月鎭)에 설치되어 있던 간도특설대는 조래의 국경감시대를 모체로 하여 1938년 12월에 창설되었다. 당초에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박격포를 장비한 기박 1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중에 보병 2개 중대로 증강되어 대대 규모가 되었다. 부대장과 간부의 일부가 日系 軍官이고 나머지 전부는 한국계 군관이었는데, (중략) 간도성 일대는 게릴라(동북항일연군 등 항일무장세력을 게릴라라고 지칭하고 있음)의 활동이 왕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계속하여 치안작전을 수행하느라 바빴는데 간도특설대의 본래의 임무는 잠입, 파괴공작이었다(게릴라전에 대한 다른 책에서는 솔직히 식민지 백성으로 이런 부대에 참가했다는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고백은 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대소전 발발시 후방잠입 특수업무가 주요한 일이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수부대, 스페셜 포스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만주 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소련의 침공이 너무 전격적이어서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부대는 말 그대로 와해되거나 자진해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731 부대도 마찬가지). 만주국군 중에서 총검대회, 검도, 사격 대회가 열리면 간도특설대는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중략) 내가 간도특설대에 착임하였던 1943년 초두에는 게릴라의 활동은 거의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대단했다고 한다. 관동군 독립수비대와 만주국군은 1939년 10월부터 41년 봄까지 여기 동부만주에서 대규모의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최전성기의 관동군의 위신을 걸고 철저하게 시행된 작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항상 대서특필할만한 전과를 올렸던 것은 간도특설대였다. (후략) |
백선엽이 일본에만 출간한 책인 게릴라전 관련 전술서적인 "미국은 왜 베트남에서 패배했는가?"에서 당시 상황을 알수 있는 일본 독자들을 위해서 2차 대전 당시 간도특설대에 들어간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당대와 그때의 고민 및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 나름 변명과 유감을 표명하고 있으나 이 책 자체는 회고록이기 보다는 대게릴라전 전문가로서 베트남전을 평가하는데 주 목적으로 한국에서 출간한 지리산보다 더 빨치산 토벌에 대한 전술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책 자체는 우에다 신의 컴뱃 바이블 2에서 한국군의 대게릴라전 전술 부분에 백장군의 캐리캐처와 함께 부분 발췌 수준으로 소개되었고 서해문집에서 나온 일제 하 소련억류자들을 다룬 서적에서 부분 발췌되었을 뿐 정식 번역은 되지 않았다.
사실 백선엽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사실대로 밝히지 않은 것은 5.16 군사정변을 전후한 시점에서의 군내 알력[4]과 자신이 받을 비판에 대한 부분 정도인데, 이 부분은 이례적으로 유난히 자기미화가 심한 편이다.
이후 만주군 중위을 지내다가 해방 직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조만식 선생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했다가 김일성과 공산주의 세력의 득세를 목격하곤 1945년 12월에 월남한다.
그 직후 군사영어학교를 마치고 국방경비대에 입대, 5연대장을 맡았다. 국방경비대가 정식 한국군이 된 이후에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중이었으며, 이때 벌어진 여순사건 당시 공산 게릴라 소탕과 주동자 색출 및 처벌의 재판장이었다. 1950년 4월에 대령 계급으로 제1보병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3 박정희 구명
1949년 2월 박정희는 '군병력 제공 죄'로 사형을 구형받은 뒤 결국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백선엽은 육군본부에서 정보국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김안일 과장을 통해 박정희와 면담한후 박정희의 만주 시절 동료 20명으로부터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는 보증서를 제출받고 무죄방면시켜줬다. 뿐만 아니라 백선엽은 불명예제대한 박정희를 정보국에서 문관신분의 북한반 상황실장으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5]
4 한국전쟁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장성들 중 단연 최고의 속도로 승진을 거듭해 마침내 국군 최초의 4성 장군 및 꽤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지위에 오르는 등 한국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다.
4.1 개전 초기 지연전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당시. 그는 서울에서 아내와 갓난 아이를 만나고 있다가 연락을 받고 급히 복귀해 사단을 지휘했는데, 그의 사단 담당지역은 북한군의 주 공격로 위에 있어 T-34 전차 등 북한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음에도 부대를 유지하며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차가 몰려오자 일부 병사들은 폭발물을 들고 달려들어 저지하는 투혼을 벌였는데, 이는 지시한 적도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 사단장인 그도 숙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병사들만 나선게 아니라 대대장, 중대장까지 직접 수류탄을 들고 북한군 전차에 달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38선 전체에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로 인해 퇴각을 하지만, 그의 부대는 퇴각중에도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회고록에 따르면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리자 포위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도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끊긴 1사단은 그제서야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하지만 배도 구하기 어려운지라 몇명의 부관과 함께 행주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멀쩡히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의 6사단, 그리고 8사단이 유일했다.
또한 6사단의 경우 후퇴하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는데 바로 춘천-홍천 전투다. 수도권을 치던 북한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공격의 강도가 덜한데다 부대장 재량으로 병력의 외출, 외박을 제한해 병력이 비교적 많은 상태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한군 제2군단을 3일간 저지했고 제2군단장 김광협은 해임당했다.
그리고 8사단의 경우 주문진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혔음에도 강릉을 빼앗긴 그날 밤 기습공격을 하여 인민군에게 적잖은 패배를 주는등의 활약을 하고 3일간 방어하면서 태백산맥을 타고 안전히 후퇴할수 있었다. (강릉전투)
그렇다고 1사단쪽이 사정이 나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개전 시점에 1사단이 담당한 구역은 적이 고지대에서 진지까지 단단히 구축한 후 빤히 쳐다보고, 배후에 바다가 있으며, 방어선으로 삼을 곳이 거의 없는 100km다. 또한 수도인 서울에서 가까워서 개전 당시 의정부시 회랑 방면과 함께 적의 주공이 밀려온 곳. 이런 곳에서 3일이나 버틴 것이 용사다.
이들의 교전으로 전선이 전면적으로 붕괴되지 않고 서울 점령 때까지 그나마 3일의 시간적 여유를 벌었으나 이 성공적인 방어전에서도 결점은 많아서, 육군본부의 전후 공간사에서는 지휘역량이 아직 부족했고 부대 장악 수준이 충분치 않았던 탓에 조속한 대응에 실패, 더 잘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처음 이틀 동안 긴장과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발에 못이 박히고도 다음 날에나 전투화를 벗었을 지경이었다고 전해지며, 1사단이 상태가 그나마 가장 양호한 부대였으므로 학도병과 신병들을 계속 보충받아 한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해서 수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4.2 다부동 전투
낙동강 방어선에서 유명한 다부동 전투를 겪게 되는데, 북한군은 병력 21,500명에 T-34 전차 20대+14대 가량을 앞세워 전진했으나 1사단의 7,600명 병력이 이들을 8월달까지 지연시켜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이렇게 사단장이 직접 돌격하는 것은 사단장 돌격이라고 불리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중의 하나. 일단 이 행동과 비슷한 사례로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중 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진격한 경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준장이 노르망디 상륙을 최전선에서 함께했던것 정도.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
다부동 전투 항목에서도 나왔듯이, 국군과 미군, 유엔군은 경상남도까지 밀린 상황이었고, 이 전투가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멸망했을 것이다. 경상도에서도 국군의 희생은 너무나 커서 한 전투에서 수천명씩 전사하는 일도 흔했다. 특히 부산에서는 국군이 수만명과 미군 수천명이 죽는 그야말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끝내는 북한군을 막아낸 것이다.
4.3 평양 점령
이후, 부산에 미 1기병사단이 상륙함에 따라 1사단은 전력재건을 위해 임무를 교대했으나 미 1기병사단은 9월달즈음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때쯤에는 성공적인 방어작전의 결과로 준장으로 진급했다.
북한으로 역진공하던 때의 에피소드인데,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자신이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으며, 사단장인 자신은 평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와 길을 잘 안다. 단지 자신들에게는 미군과 같은 종합적인 화력이 없는 것 뿐이라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대대를 지원해주면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미군 장군이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빠른데, 보병 뿐인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리하여 미군 전차대대를 배속받게 되며,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국지휘관에게 맡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약속대로, 실제 1사단 장병들은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맹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나중에는 미군 전차대대 장교들이 '우리까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라고 하자 전차대대에는 숙면을 취하게 하며 '이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협조하라'고 하며 배려해줬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았다. 이때 당시 장교들이 한 말은 정확하게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막힌 대답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가 있다.
결국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는데, 1사단과 평양 점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7사단 역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날 평양에 입성해 최초 입성부대라며 자랑하곤 한다. 평양 점령 후 김일성의 집무실에 1사단 지휘소를 차리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본인이 평양 출신이었던 덕분에 평양 점령 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사단 통신참모가 북한군의 통신선을 발견해 도청을 하다 통신이 연결되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 통신참모는 평양 사투리를 못해 사단장인 백선엽에게 직접 해주십사 하고 요청을 했다. 백선엽은 유창한 평양 사투리로 현재 적이 유엔군의 전력에 눌려 사기가 바닥을 치고 후퇴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미군이 대동강을 도하하느라 진격을 못하고 있던 틈에 수심이 얕은 곳으로 병력을 도하시켜 가장 먼저 평양 중심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1사단의 고문관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신기해 하자 "나는 어렸을 때 평양에서 수영을 배웠다. 물 위는 물론이고 물 아래까지 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랐지만, 중국군의 반격에 휘말리며 38선 이남으로까지 밀려가게 된다. 이때, 최초로 미국과 북한-중국간의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군 장교를 빼놓고 휴전 협정을 할 수는 없다며 강력히 주장해 참관인으로 참석했다.
4.4 빨치산 토벌전
휴전회담 도중 동부전선 상황이 악화되는데다 1군단장의 사고사로 인해 긴급히 후임으로 강릉으로 부임했다가, 다시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를 하던 중, 군단장으로 복귀한다. 전투가 뜸해진 1951년. 남한 후방지역, 특히 지리산 지역에 인천 상륙작전 이후로 후퇴하지 못한 빨치산들이 대거 몰려있음이 알려지자 이들을 퇴치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성을 따서 '백 야전사령부'가 창설되어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벌어지며, 성공적인 작전을 마쳐 빨치산 토벌을 완수한다. 작전의 결과로 5,800명의 빨치산을 사살했으며 특히,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최종적으로는 5,700명이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어, 통합 11,500명을 토벌한 것이다. 이전 11사단의 견벽 청야 작전이 거창사건으로 대변되는 작전에서 진일보한것으로 평가된다.
재미있는 건 거창 사건으로 대변되는 양민학살의 실질적인 주범인 쓰레기 최덕신의 경우는 비난에서 벗어나서 영웅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월북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북을 택하지 않고 박정희 정권의 고위직으로 일생을 마쳤으면 지금 빨치산 토벌로 백선엽이 받는 비난은 최덕신이 받을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최덕신이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월북때문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 최덕신의 월북은 박정희 정권에서 대접을 제대로 안 해줬다는 점 때문으로, 최홍희를 비롯한 고위급 월북자들이 대부분 그랬다시피 70년대 반정부 투사로 인정되기에는 상당히 지저분한 내막을 가지고 있다.
4.5 전쟁 후기
[6]
그 이후에는 새로이 재창설된 1군단에서 군단장을 맡고, 미군의 지원[7]으로 1952년에 새로 창설되는 2군단에서 군단장을 맡는다. 그리고 다시 1952년 7월에는 그동안의 전공으로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하며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32세였다. 이후 한국군의 규모 확대와 급여, 복지문제 개선과 지원을 확대하는데 애썼다.
이런 저런 활약과 더불어 전쟁중 부대 궤멸이나 대패, 총퇴각 같은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미군에게도 큰 신뢰를 쌓고, 빨치산 토벌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등 큰 업적을 쌓은 덕택에 미군은 한국군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높게 했으며, 계속 장비 지원을 해 세력을 확충시키는 한편, 카투사 제도 등으로 미군부대에 한국군 병사들을 배속시켜 같이 싸우려고도 했다.
이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것은 장비 지원에 대해 반감을 가진 미군장성이 매우 많았으며, 기본적으로 6.25당시의 국군에 대한 미군의 시각은 조잡한 민병대 정도였으므로 장비를 주면 잃어버려서 적이 오히려 노획한 장비로 중무장을 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장진호 전투를 치른 해병 1사단장도 한국군의 무기고가 되는 것에 우려를 가지고 장비지원을 하라는 상부명령을 거절한 사례가 있다. 자기 부하 빼간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리 전투의 소식이 전해지고, 그 여파로 3군단은 해체되었으며 그 이후로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에게 넘어간다. 나중에 백선엽 본인은 '유재흥 장군이 실전경험이 없어서...' 라고 끝끝내 아쉬워했다고 한다. 유재흥에 대해서는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혹평 및 비난이 많고 본인도 그다지 높게 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따로 언급하지 않는 면에서 중후한 인품이 엿보인다. 백선엽은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수많은 당대 지휘관들이 부하 탓, 상관 탓, 미군 탓을 한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이는 회고록 '군과 나'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이기붕에게조차 나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5 전후활동 및 이야기거리
전후에는 중화민국 대사 등을 역임하고,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낸 뒤 비료회사 사장을 지냈다고 한다. 워낙 영향력 있는 인물이던지라, 훗날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영문명으로 'Park'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에서는 백선엽이 쿠데타를 일으킨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유명인물. 현재 미 2사단 훈련평가원실 건물 이름이 '백선엽관'이다.
대단히 정치적이었고 군사 쿠데타를 누구보다도 두려워했던 그럼에도 정치군인 양성에 힘썼던 이승만은 쿠데타 가능성이 높은 군 실력자들을 서로 경쟁시켜서 가급적 힘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수행했는데 백선엽, 이형근, 정일권이 교대로 참모총장이 되면서 상호 견제하는 체제로 나갔다. 이후 정치에 발을 실제로 들였던 건 정일권.
여담이지만 대식가라고 한다. 2009년 2월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육군협회 관련 행사에 참석한 이의 증언으로는 계속 꾸벅대다가 만찬이 시작되자마자 접시를 순식간에 비워낸 어르신이 백선엽인 걸 나중에 알고 황당했다고.
한국군 고위장교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친미성향이 짙으면서 실력으로도 대단히 유능했다는 것이 공통된 평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실력은 있으나 미군과 친하지 않아서 찬밥을 먹는 장교들이 많았는데 노령의 문제도 있지만 김홍일 장군이나 김석원 장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나중에 실력에 비해서 한직으로 밀려난다. 또한 유능하지 않으나 미군과 친한 이유로 과대평가되는 장교들도 있었는데 김교식에 따르면 장도영이 이런 케이스였다고 한다. 물론 장도영 정도는 그나마 실력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다행이고 태백산맥에서 자주 나오는 썩은 국군 장교들의 경우 이런 경우가 꽤 많았다. 전선에서도 바쁜 와중에 틈틈히 영어공부를 했고 미군들에게 예의바른 표현을 익히기 위해 미군 표창장에 적힌 찬사문구를 메모해서 틈틈히 외워서 감사인사에 써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5.1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원수 추대 가능성
2009년에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을 손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다. 만일 성공하면 한국군 사상 최초의 5성 장군이 된다.
그러나 친일 경력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곧, 우리나라 최초의 원수 칭호가 친일파에게 섣불리 수여되기보다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사회적 토론이 선행되야 하지 않나 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이 인물의 몇몇 전공과,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임무였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과오가 너무도 대립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극명한 대립양상을 보아 합의를 보기 힘들 것을 예상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명예 원수 추대가 성사되는 것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5.1.1 무산된 원수 추대
"큰 일 낼 사람들이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 의식이 희박한지 모를 일이오. 건국 이후의 첫 명예 원수 추대는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중요하오. 만약 일본군·만주군 출신에다 독립군 토벌 작전의 지휘관 경력자가 명예 원수로 추대된다면 우리나라 건국사와 국군사는 하루 아침에 북한 역사관에 종속될 거요."(채명신)"제 생각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사령관님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일반 국민들의 상당수가 백선엽 자신에 의해 과장된 6·25 전쟁사를 통해 (백선엽을) 낙동강에서 조국을 구한 유일한 영웅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일반인 뿐만 아닙니다. 국방장관을 역임한 예비역 장성과 중앙일보 등 일부 보수 일간신문도 백선엽이 우리나라 제일의 전쟁 영웅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내용 상당량이 과장된 것이지요."(박경석) - 박경석, 《불후의 명장 채명신》, 460쪽
2008년도 말부터 MB정부에서 명예원수 추대에 대해 논란이 있자, 박경석[8]은 즉시 "백선엽 장군이 명예 원수에 추대된다"는 사실을 채명신 장군에게 알려 위와 같은 대답을 받았다. 이에 박경석은 '백선엽이 일본국 괴뢰정부인 만주국 간도특설대의 육군중위 계급으로 독립군 소탕작전을 지휘한 명백한 증거가 있다는 점, 낙동강 전선에서 활약이 과장 평가 되었다는 점, 북한이 남한에 대해 건군 과정을 헐뜯는 내용이 일본군과 만주군에 의한 건군인데 백선엽이 건국 첫 명예원수가 된다면 그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는 점'을 담은 성명서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는 세기의 난센스다>를 인터넷 <박경석 서재>에 게재하였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명예 원수 추대를 기정 사실로 하고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이때 백선엽은 장관에게 "내가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사실은 있지만, 독립군 소탕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하였다.
다행히 김태영 장관은 역사의식이 뚜렷한 사람이라 국방부 인사복지실장(육군 소장)과 담당과장(육군 대령)을 박경석에게 보내 사실 조사를 하게 하였다. 그러자 박경석은 백선엽이 직접 자기입으로 1950년대 일본 작가에게 자신이 토벌했던 게릴라 중에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라고 말한 대담집을 제공 하였다.
국방부 인사복지실장은 이어 채명신 장군을 만나 의견을 구했다. 채명신 장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파월한국군 사령관으로서 성공적인 임무 수행으로 한국사회에서도 명망높은 장군이며 그 때문에 채명신장군의 백선엽 장군의 명예원수 추대 반대의사는 정부로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인사복지실장은 채명신 장군과 대담 후 더 확신을 가지고 김태영 장관에게 보고하였다. 이로써 명예원수 추대 해프닝은 끝났다. 박경석 장군이 말하길, 명예원수 추대를 무효화시킨 이 일은 채명신 장군이 조국에 바친 마지막 봉사라 한다.
2013년도에도 예비역영관장교연합회를 통해 백선엽 장군을 '명예원수'로!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뉴데일리 외에는 취재하는 언론이 거의 없는 듯 하다.
5.2 형보다 나은 아우는 없다
위의 친일 논쟁과는 별도로, 그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백인엽(白仁燁) 때문에 싸잡혀서 욕 먹는 경우도 있다.
자세한 건 백인엽 항목 참고.
5.3 미화논란
2011년 06월 24일 KBS에서 한국전쟁 당시 그를 주목하는 방송을 해 논란이 되었다. #
한국전쟁 61주년 특집다큐였으나 백선엽의 기억과 코멘트를 중심으로 그의 활약상을 조명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2011년 8월 국립서울현충원이 친일 논란에 휩싸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91·사진)에 대해 사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내 묘역 안치를 약속했다.#
국방부는 2012년,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을 모델로 한 '더 프로미스'라는 뮤지컬에 수 억원을 투자했는데 이것이 국정감사때 문제가 되었고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은 " 잘못된 ‘과’를 가지고 있는 이 민족반역자를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잘못을 청산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 사람을 칭송해야 된다는 현실이 참 부끄럽다 "라는 발언을 하여 군과 새누리당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새누리당 측에서 전쟁 영웅에 대한 모독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김광진 의원은 "백 장군은 법률이 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국가에서 규정한 것으로 논쟁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면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해야 할 것”이라며 사과를 거부했다. ###
육군은 살아있는 백선엽의 이름을 따 사실상 그의 기념실을 만들었다. 계룡대에 위치한 이 기념실은 지난 2005년 3월 개관한 것인데 이 당시 친일 논란이 있는 생존 인물의 이름을 따 이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해 비난 여론이 일었다.
한국전쟁 당시 백선엽이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육군 1사단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2013년 6월 문화재청이 백선엽이 한국전쟁 당시 입었던 군복을 '대한민국 근현대사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공고를 냈다.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의 반대 운동과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격렬한 항의에 밀려 취소됐다.
2013년 9월,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그의 이름을 따 '백선엽 한미 동맹상'이 제정되었다.
2013년 9월 민주당 김광진 국회의원이 국방부 등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백선엽은 지난 2003년 11월부터 지난해까지 근 10년간 업무용 에쿠스 차량 1대와 운전병, 그리고 4급 상당의 개인 보좌관 등을 국방부로부터 지원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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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학술정보원(원장 오경두 대령)은 육군사관학교 교내 포털사이트에 자서전 '군과 나'를 기초로 한 웹툰을 올렸다. 그림은 현역병 차출###
6 저서들
6.1 군과 나
6.25 전쟁 회고록 한국전쟁 당시 실제 작전 입안자로서 6.25 전쟁을 회고하는 최초의 회고록이다. 사실 한국전쟁을 회고하는 수기류는 정책적으로 많이 나왔지만 공산권 자료의 미비, 최근에도 일제하 전력이라든가 작전실패, 민간인 학살 관련 등 여러 문제에 대한 당사자들의 증언 회피, 어른의 사정 등으로 객관적인 저서가 나오지 않았던 반면에 6월항쟁 이후에 객관적이고 거시적으로 한국전쟁을 볼 수 있는 시기에 나온 최초의 회고록이라는데서 의의가 있다. 실제로 이 책 이후에 나온 이형근, 정일권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이 비판받을 부분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원래 경향신문 연재물이었는데 대륙출판부에서 최초로 단행본이 나왔고 앞에 말한 이유뿐 아니라 문장이 수려해서 가독력이 좋아. 한국전쟁에 대해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작품. 심지어는 국군 최악의 패전인 현리 전투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이 잊혀진 걸작이라고 한탄하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책으로서는 의외로 단행본이 많이 나왔다. 앞서 말한 대륙출판부판, 다른 중소출판부판, 시대정신판 등등... 영문판으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이 제목은 전 UN군 사령관 클라크의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와 제목이 비슷하다. 조선전쟁 천일이라는 제목으로 일역판도 출간되었다.
2010년 중앙일보에서 이 회고록의 추가 개정판이 연재되었다. 다만 이 판본은 중국군 개입부터로 순서를 조정했다.
6.2 실록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 출간 이후 동아일보 연재로 토벌대의 입장에서 대국적으로 그린 빨치산 기록이다. 저자 자신이 백야전사 작전에 참가했던 기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 남한 빨치산 약사-> 자신이 겪은 이야기 후기의 형식인 반면에 이 작품은 백야전사 작전-> 남한 빨치산 약사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단행본은 고려원 출간.
백야전사 부분을 제외하고는 빨치산 종군기자였던 이태의 남부군에 대한 토벌대의 입장이기 때문에 남부군을 읽지 않으면 갑툭튀한 서술이 좀 이상할 정도이다. 사실 남부군은 이후 나온 모든 빨치산 관련 작품(전향한 빨치산 작품)들이 인용하거나 비판하는(비전향 종북주의자 작품) 가장 중요한 텍스트인데, <실록 지리산>역시 국군 토벌대의 입장을 반영한 매우 중요한 텍스트로, 전투경찰대 연대장인 차일혁 총경의 아들이 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와 함께 가장 많이 빨치산 문학에서 인용된다.[9]
여담으로 차일혁 총경은 만주에서 항일유격대 팔로군계 항일유격대에 소속되어 일본군, 만주군과 목숨걸고 싸운 독립군이였다. 해방후 군사영어학교를 갈 기회가 있었지만 "좌파들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득세"한다는 소리를 듣고 입교를 포기한다. 다시 말해 만주에서 백선엽의 만주군과 싸우던 독립군이 바로 차일혁으로, 백선엽 같은 인간들이 군사영어학교에 득실 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안간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였다
토벌대 사령관 입장으로 썼기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겠지만 의외로 객관적이다. 자료 조사를 위해 지리산 곳곳을 다녔고 구빨치산 출신의 참전자들을 일일히 인터뷰했다. 토벌에 참가했던 국군의 잔학행위 증언도 빠짐없이 실어주었다. 이를테면 생포한 여자 빨치산을 바세린을 발라가면서 집단으로 검열삭제하는 류의 이야기가 버젓이 나온다.
이런 증언을 소개하면서 토벌작전 책임자로서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 참조
7 기타
6.25전쟁 중 한미상호방위조약 관련으로 미국에 방문해서 기자회견을 열었을때 어느 기자가 "당신은 동양인이면서 왜 키도 크고 안경도 쓰지 않고 금니도 없느냐."라고 묻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에 백선엽이 그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그런 질문엔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자 기자가 부끄러운 듯이 물러났다고.(...) 미제 기레기
한국전쟁 때 여러 차례 만남을 계기로 알레이 버크 제독과 절친이 되었다. 버크 제독이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에 참석해 해상자위대 대표들에게 버크 제독이 자위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육사를 방문해 생도들에게 자신의 저서를 나눠주거나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 윤봉길이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폭사시킨 일본 육군 대장의 이름이기도 하다.
- ↑ 장춘의 4년제 만주군관학교의 전신으로 2년제 였다. 참고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2기 출신이다.
- ↑ 일본군 경력을 부끄럽다고 고백하면서 일본군 장교자리 버리고 독립운동하다 초죽음이 된 동기 이종혁을 보고 진심으로 슬퍼하며 장한 일을 했다고 칭찬했던 김석원과는 다르다.
- ↑ 이를테면 정일권이 주도한 함경도 세력과 백선엽 자신이 주도한 평안도 세력의 막장행각,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한 5.16 군사정변은 이런 군내 파벌들의 행각을 대의명분 중 하나로 내세우면서 세를 결집시킨 장교들의 작품이기도 하다.
- ↑ 그리고 여기서 박정희는 김종필을 만난다
- ↑ 1951년 7월 10일, 유엔군 대표단과 나란히 서 있는 백선엽 장군(홀로 철모를 쓰고 있는 사람). 참고로 사진 속 오른쪽에서 3번째 자리에 수류탄을 가슴에 매달고 서 있는 사람이 매튜 리지웨이 장군으로, 당시 유엔군사령관이다. 가운데는 협상단 대표였던 터너 조이 제독.
- ↑ 여기서 미군 고문단으로 파견된 이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의 현대화에 굉장히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
- ↑ 월남전 당시 채명신의 맹호부대 산하 재구대대 대대장. 파병 준비중 산하 중대장인 김재구 대위가 수류탄 훈련중 사망하였다. 준장 전역 후 전업 작가
- ↑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비전향 종북주의자 빨치산을 부모로 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라는 작품이 있다.(철저하게 종북주의자 시점에서 집필 되었다.) 이상 4개의 작품이 수십종이나 되는 빨치산 문학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텍스트이다. 4개의 작품이 이태의 남부군의 문학적 대성공을 보고 시기적으로 거의 동시에 나왔고, 다시 남부군 개정판에서 이들 3개 작품을 대폭 인용하여 기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