度支部[1]
조선말에서 대한제국에 존재했던 관청. 국가 재정 전반을 담당하던 부서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재무부)에 해당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설치한 탁지아문을 1895년에 개칭한 것으로 갑오개혁 이전 국가재정을 담당했던 호조의 기능을 거의 이어받아 정부의 재무를 총괄하고 회계·출납·조세·국채·화폐·은행 등에 관한 일체 사무를 관장하며 각 지방의 재무를 감독했으며 전국 9개의 관세사와 220개의 징세소를 두었다.
그러다가 1905년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다 다네타로에 의해 통감부에 예속되기 시작했다. 1905년 7월 1일 메가다는 이른바 재정정리사업의 일환으로 화폐정리사업이란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화폐가치를 급락시키고 조세징수권까지 찬탈되었고 1906년 9월 24일의 칙령 제55호로 '건축소관제'를 공포하고 탁지부 건축소를 설치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폐지되었다.
소속 기관으로는 대신관방·사세국·사계국·출납국·회계국·서무국이 있었다. 그 중 사세국·사계국은 1등국, 출납국은 2등국, 회계국·서무국은 3등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관원으로는 대신 1명, 협판 1명, 국장 5명, 참서관 3명, 주사 64명으로 구성되었다.
아래는 탁지부의 소속 기관들의 업무다.
- 대신관방: 탁지부의 기밀, 소속 관리의 진퇴신분, 대신의 관인·부인의 관수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였다.
- 사세국: 탁지부의 1등국중 하나로 토지 제도나 조세·세무·세관·수출·수입·지방세를 담당했고, 집세과와 관세과, 잡세과를 두어 각각 담당하게 했다.
- 집세과: 농지에 관한 제도·세금이 붙어 있는 토지, 토지세부과 및 징수, 토지세의 예산·결산, 세무의 관리 및 감독을 담당하였다.
- 관세과: 관세의 부과·징수, 관세의 예산·결산, 세관 감독, 세관 수출입의 상황·조사, 외국 무역의 선박·수출입품 감독을 맡아보았다.
- 잡세과: 잡세 부과 및 징수, 관유재산[2]의 수입·관업 이익금·벌금·몰수금·제경비·기타 잡수입, 여러가지 형태의 금품과 곡식, 잡세·잡수입의 예산 및 결산, 지방세를 담당하였다
- 사계국: 사세국과 함께 탁지부의 1등국으로 세입·세출의 예산 및 결산, 예산 항목의 전용과 예산 외의 지출, 지출 예산의 승인과 수입과 지출, 세입과 세출, 여러 가지 경비의 결산 심사와 보호 회사의 회계와 은행의 감독에 일을 관장하며 경리과, 감사과로 업무가 나누어진다.
- 경리과: 세입·세출의 예산 및 결산, 예산 항목의 전용과 예산 외의 지출, 수입·지출 과목, 세입·세출의 등부, 제경비 결산의 심사를 담당하였다.
- 감사과: 지방예산 승인, 보호회사의 회계 및 감독, 은행, 회계법규의 의의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다.
- 출납국: 탁지부의 2등국으로 국고에 속하는 현금과 물품의 관리·출납, 모든 경비의 지출 집행, 출납 관리의 감독과 그 보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고 있으며, 금고과와 미름과로 업무가 나누어진다.
- 금고과: 국고 현금의 관리 출납, 제경비지출의 집행, 현금출납의 결산을 관장한다.
- 미름과: 국고미곡·기타물품의 관리출납, 미곡·기타물품의 급여·집행, 현품·금의 출납과 결산을 관장했다.
- 회계국: 탁지부의 3등국으로 탁지부에서 관리하는 경비의 예산과 결산·회계·관청 소유의 재산과 물품과 그 장부 작성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고 있으며 경비과와 조도과로 업무가 나누어진다.
- 경비과: 탁지부에서 관리하는 경비의 예산과 결산·회계를 관장한다.
- 조도과: 탁지부에서 관리하는 관유재산·물품·장부의 작성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였다.
- 서무국: 회계국과 함께 탁지부의 3등국으로 국채·은급·화폐·지방채의 감독, 탁지부의 관련 문서 작성·편찬 등을 관장했으며, 업무는 국채과과 문서과·각국과로 나누어졌다.
- 국채과: 국채·은급·화폐·지방채의 감독을 관장했다.
- 문서과: 공문서·성안[3]문서의 접수 및 발송, 통계보고의 조사, 공문서류 편찬·보존, 회계법규의 제정·폐지·개정에 관한 성안조사,
- 각국과: 대신관방과 각 국의 관리에 속하지 않은 사항을 관장한다.
- 탁지부 건축소: 1906년 9월 24일의 칙령 제55호로 '건축소관제' 공포한 후 설치된 관서로 이전까지 궁궐 영건 및 개수 등을 담당해온 영선도감과 공조를 대신하는 최초의 근대적 상설건축기구로 전국에 근대적 관립시설의 건립을 관장을 했으나 1년이 지난 1907년 12월 13일 칙령 제42호로 관제를 개정하고 일본인 탁지부 차관이 건축소 소장을 겸임하도록 함으로써 건축소 운영의 실질적인 권한은 일제에 속하게 되었다.
- 실무 부서로서 공사부를 설치하여 건축 업무와 토목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고, 감독계와 영선계를 운영함으로써, 조사, 계획, 내역 뿐 아니라 시공, 감리 등 건축물 건립공사 전 과정을 맡도록 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는 출장소를 개소하여 전국의 공사현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토록 하였으며, 벽돌의 원활한 수급을 위하여 벽돌제조소를 설치하고 직접 생산하게 하였다. 또한 산하에 회계과를 두고 문서와 직원의 관리 및 예산, 계약, 회계 등의 각종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 탁지부가 건축한 건물들은 주로 벽돌조와 목조 건물들의 관청들로 목조 건물들의 경우 일본식 가옥이나 아니면 일본 목조 건축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절충된 의양풍 양식으로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 검사국: 1906년 설치된 관서로 회계검사에 대한 사무를 관장했다.
탁지부 청사는 1907년 현재의 서울특별시청 서소문별관 자리에 있었던 청사로 본래 한성부 청사를 이용했고, 그러다가 의정부의 청사 활용될 계획이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면서 본래의 건립계획과 달리 완공 후에는 탁지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연건평 435.2평의 벽돌조 2층 건물로 계획되었으며, 공비 81,034원(圓)의 건물이었다.
구체적인 평면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는 중앙 중정을 가진 방형으로 중앙부를 정면으로 돌출시키고, 첨탑을 세워 정면성을 강조되고, 좌우대칭이며 네 모서리 부분이 사방으로 돌출된 형태로 계획되었다. 입구는 정면과 측면의 세 곳에 계획되었으며, 정면의 현관에는 포치가 구성되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홀과 좌우로 뻗은 복도를 마주하게 된다. 홀 정면으로는 중정으로 나갈 수 있는 계단이 계획되었다. 좌우의 복도를 통해 마루바닥의 실들이 배치되었다. 복도는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중정 후면에 배치된 대형 실을 다시 한 번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8’자로 계획되었다. 건물의 양 측면 부분에는 소형 실이 계획되었다.
후면의 1층에는 베란다, 열주랑을 만들어 2층에서 테라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즉, 돔이 있는 ‘잉글리쉬 르네상스 양식에 세제션식을 가미한’ 고전적인 외관으로 계획되었다. 청사의 외벽은 구조가 벽돌조였음에도 당시 치장벽돌 수급의 문제로 회반죽으로 마감되었다. 다만, 회반죽 마감으로 석조건물을 모방하여 시공한 것이 특이하다. 지붕은 쌍대공 트러스 구조로 일본식 기와가 사용되었으며 중앙부 첨탑은 동판으로 마감하고 정상부에는 피뢰침을 설치하였다. 지붕에는 일본식 기와가 사용되었으며 중앙부 첨탑은 동판으로 마감하고 정상부에는 피뢰침을 설치하였다.
이후 1909년 청사 동쪽에 증축청사가 계획되었고, 증축청사의 평면 또한 알 수 없으나 배치도 상으로 볼 때 제1 청사와 대략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 벽돌조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왕대공 지붕틀로 계획되었다. 정면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의 입면으로 관공서로서의 권위적 입면으로 계획되었고, 정면부에 철물장식 등을 통하여 현관을 강조하였다. 증축청사의 측면으로는 목조 교량형식의 연결복도로 본 청사와 연결동선을 계획하였고, 후면에는 변소와 식당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추가로 계획되었다.
1910년 탁지부 통계과 자리에 신축된 제2청사의 부지 계획은 종래의 고가(古家)를 전용하던 탁지부 통계과 건물을 철거한 자리에 계획되었다. 탁지부 제2청사는 정면 약36.3m, 측면 약 34.5m 크기로 중정이 있는 ㅁ자 형태로 계획되었다. 양식목조 2층 건물이며, 지붕은 목조 트러스로 계획되었다. 입면은 비늘판벽으로 계획되었으며, 현관 포치를 돌출시켜 중앙부를 강조하였다. 이는 1910년대 초중반의 양식목조구법에 의한 관립시설에서 전형적으로 관찰되는 입면상의 공통점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건물은 탁지부 제2청사로 활용되지 못하고, 준공 이후 토지조사국 청사로 전용되게 되었다.
본관 청사의 경우 본래는 건립 당시의 덕수궁에 임어한 고종황제를 고려하여 덕수궁 남쪽에 바로 면하는 부지에 들어서게 된 것인데, 결과적으로 덕수궁을 위압하는 건축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1911년부터는 경성고등법원, 1928년부터는 형사지방법원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에도 법원 시설로 운영되었다가 1970년에 새로운 법원 청사를 신축하기 위해 철거되었다.
증축청사의 경우에도 본연의 목적과는 달리 일제의 어용 기관인 중추원 청사로 활용되었고, 해방후 법무부 청사로 활용되다가 본관 청사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 철거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마찬가지로 서소문 별관이 되었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