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樞院
목차
1 고려와 조선의 중앙기관
고려부터 조선까지 이어진 왕명 출납·궁궐·숙위(宿衛)·군국기무(軍國機務) 등의 정무를 담당한 중앙 관청으로, 추밀원(樞密院) 또는 밀직사(密直司)로 불리기도 했다
중추원은 991년 성종대에 한언공(韓彦恭)의 건의에 따라 북송의 추밀원을 따라서 설치하였다.
고관으로서의 추밀과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승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추밀은 종2품의 판원사와 원사 등 4직과 정3품의 부사, 승선은 정3품인 지주사와 좌우승선 (혹은 승지)로 구성되었다. 고려는 겸직이 가능했고 조선시대엔 왕권 강화를 위해 쓰이지만 너무 성장해 반대로 왕권 약화를 초래하는 기구가 되기도 한다.
1.1 구성
- 추밀: 대개 2품 이상의 고관으로 군국 기무와 군사 기밀을 담당했다. 하지만 군사 쪽에 관련한 건 고려 후기의 일이지 전기에는 단순이 타 기구인 도병마사와 같은 군정에 관여 했을 뿐인 걸로 보인다. 추밀은 2성 6부의 중서문하성의 재신 6부 판사[1]로 겸임
쓰리잡이 가능했다.
- 승선: 대개 3품 이하 중하급 관리로승선의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명을 출납하는 일이었다. 왕명의 하달은 반드시 승선을 거쳐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왕 직속 셔틀이였지만 승선이 왕명의 품달 여부를 결정할 권한까지 있었으며 당시에는 엄청난 권력직이였고 용후(龍喉) 또는 후설(喉舌)이라 부르기도 했다.
2 독립협회의 건의로 탄생했던 의회
아관파천 이후 환궁한 고종에 대해서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정을 주장하였고, 내심은 전제군주정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대외적 이미지상 그래도 근대화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던 고종과의 합의에 의해서 탄생하게 된 최초의 근대식 의회였다. 일단은..
하지만 그 성립부터 실제 시행까지 엄청난 대립이 있었다. 독립협회 측은 일본이나 미국 등 자신들과 끈이 닿는 이들을 이용해서 국가의 권력을 자신들이 가지려고 꾀하고 있었고[2], 그 과정에서 고종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서도 아무리 봐도 일본 끄나풀 같아 보이는 이들을 때려잡을 준비를 암암리에 벌이고 있었다. 실제 역사를 보면 고종과 독립협회는 일본이라는 요소 하나 때문에라도 공존하기가 어려웠으나, 외국 눈치를 보던 고종[3]과 이를 기회로 여론몰이를 하면서 정권을 획득하려고 했던 독립협회가 암묵적 대립을 이어갔다.
2.1 독립협회와 정부의 이견차이
1. 체제에서 독립협회는 영국식의 입헌군주정을, 조정과 황국협회는 독일식의 외견적 입헌군주정을 주장했다. 하지만...
2. 독립협회는 개화된[4] 서울에 한정하여 대표를 선출하는 상원만을 구성할 것[5]을, 반대측인 황국협회에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하원도 복설할 것[6]을 주장했다.
3. 중추원 의원의 권한에 있어서 독립협회는 법률제정, 행정과 자문, 여론 수렴, 대신임명권, 군주가 내리는 칙령의 개정과 폐지, 모든 지방의 건의가 군주에게 올라가는 것을 검열하는 권한 등을 모두 중추원에 줄 것을 주장했고, 조정은 특히 대신 임명권을 포함한 권한이 너무 크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4. 중추원 의원의 구성에 있어서 독립협회는 관선과 민선으로 하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는 민선은 독립협회에서 선거를 거쳐서 선발하겠다고 해서 독립협회가 중추원을 장악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내세웠고, 조정은 이에 대해서 정변급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대립들은 독립협회의 주장이 점점 과격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현대의 입장에서는 독립협회의 주장에 그나마 말이 되는 부분이 많지만, 당시 집도 절도 없던 독립협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무리한 주장인 것이 사실이었다.
2.2 성립과정
1. 1898년 2월 20일. 독립협회 청원권 행사 결의. 대략 이 시기부터 조정 관리들이 독립협회를 이탈하기 시작.
2. 동년 7월. 중추원을 통한 관제 결의.
3. 동년 9월. 연좌제[7] 부활과 연관된 대신들의 파면과 박정양을 포함한 독립협회에 우호적인 내각수립 주장. 연좌제는 철회되지 않지만 내각은 재편됨.
4. 동년 10월. 앞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주장을 담은 중추원 관제 개정건 발의. 일부 수정[8]후 수용.
5. 동년 10월 29일. 관민공동회가 열려서 헌의6조 발표[9]. 이후 고종 역시 조칙 5조를 내려서 수용
6. 동년 11월 4일. 중추원 관제 발표[10].
7. 동일.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한다는 익명의 궤서 발견[11].
8. 조정은 조칙 5조를 폐지하고 독립협회 해산 및 독립협회 임원에 대한 체포령 발표[12][13]
9. 독립협회 복설과 중추원관제 부활을 주장하는 만민공동회 개최.
10. 정부에서 독립협회에 주었던 민선의원 지분을 배제한 중추원 복설을 제안하지만 만민공동회에서 거절.
11. 결국 이미 해산된 독립협회와 역시 해산되었던 황국협회가 충돌. 폭동 수준으로 번지면서 고종은 독립협회 복설을 허락.
12. 2일 후,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려서 중추원관제 복구를 요청했고, 독립협회 지분을 반으로 줄이는 선에서 독립협회의 참여를 허락하며 황국협회는 다시 해산명령.
13. 10일 후, 중추원 설립이 느리다는 이유로 다시 만민공동회 개설.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함. 고종은 윤치호를 서울시장격인 한성판윤에 임명하고 중추원 개설을 서두르면서 결국 중추원이 문을 열게 된다.
2.3 중추원의 구성과 권한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게 성립된 중추원이었기 때문에 그 내용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정치 타협의 결정체였다. 일단 독립협회의 주장을 기반으로 해서 대신임명권 등이 제외되어 독일식과 영국식의 타협에서 다소 독일식에 가깝게 변했다. 구성은 원래 독립협회 계열이 과반수였다가 개설될 때에는 총 50명 가운데 독립협회 계열이 17명, 황국협회 계열이 16명, 황제가 직접 임명이 17명으로 독립협회 계열은 1/3 수준으로 감소했다.
2.4 그리고 흑역사로
중추원이 개설되어서 첫 의회가 열렸는데 첫 의회가 마지막 의회가 되고 말았다. 우선 독립협회 계열 의관들이 권한에도 없는 대신 11명에 대한 추천과 임명을 통한 투표를 제의했고, 그게 바로 1회 의제로 통과되고 말았다. 이건 분명한 월권행위였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미국인으로 이미 고종의 눈밖에 나서 추방된 서재필과 역시 반란혐의로 추방되어 당시에 1급 반역자 취급을 받던 박영효가 포함되어 있었다[14]. 그리고 대신 총수인 11명에 맞춰서 최소 8표에서 최대 18표를 얻은 대신들이 선발되었다. 여기서는 최익현을 포함한 보수파 3인을 제외하면 모두 독립협회가 지지한 인물들이었고 이중에는 문제의 박영효와 서재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해외 공사관 등에 다시 연락을 통해서 강경대응을 할 경우에 어떻게 나올 것인지를 알아보았고, 이를 방관하겠다는 각국 대사관 대답을 얻자 바로 중추원은 정지되었고 만민공동회에 대해서도 최초로 무력진압 명령이 내려졌다[15]. 이후 특히 박영효를 추천한 인물에 대해서는 필적감정까지 해가면서 다 잡아내어서 처벌하면서 중추원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열리자마자 문을 닫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회였던 중추원은 민주주의의 꽃으로 주장하기에는 너무나도 껄끄러운 부분이 많아서였는지 '설립단계에서 무산되었다', '결국 열리지 못했다' 등으로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는 한다.
3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어용단체. 친일파들이 대거 참여시켰으며, 의장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총리격)이 겸임했다. 실제로는 유명무실했기 때문에 3.1 운동시기 까지 단 한차례의 회합도 없었다.
설립 당시 중추원의 임원구성은 의장 1명, 부의장(칙임대우) 1명, 고문(칙임대우) 15명, 찬의(贊議, 칙임대우) 20명, 부찬의(副贊議, 주임대우) 35명과 서기관장 1명, 서기관, 통역관이 각 직책별로 약간 명 구성되기도 했다.
1919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총독으로 부임한 후에는 찬의, 부찬의를 통틀어 참의(參議)로 개칭되었다. 이후 중추원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대부분 참의 관직이[16] 내려졌기 때문에, 중추원 참의를 받았다 = 거물급 친일파 인정이라는 것이 현재의 판례일 정도로 당대의 유명한 친일파들의 집결지였다.
3.1운동 이후 자치론이 부각되면서 중추원 기능을 활성화하자는 자치론자들의 주장도 존재하였지만, 중추원의 기능 자체는 결국 자문기관을 넘어서지 못하면서 끝났다.
- ↑ 당시 행정 장관으로 보면 된다.
- ↑ 필립 제이슨의 영향으로 독립협회는 점점 과격해졌다. 여기에 국외 야심가들이 세력을 심으면서 걷잡을 수 없게 변한다.
- ↑ 고종이 독립협회와 관련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독립협회도 아니고, 한양 시민들도 아닌, 한양에 머물던 서양 외교관들이었다. 단적으로 무력진압에 나서기 전에 고종은 공사관들의 상황을 먼저 살폈다.
- ↑ 이라고 하고 독립협회의 영향력이 미치는으로 해석하는게 더 올바름
- ↑ 앞의 영국식 입헌 군주정과 상원만을 개설하면 사실상 메이지 유신 형태의 과두정에 가까워진다.
- ↑ 이렇든 저렇든 전국적으로 따지면 근왕은 여전히 먹히니까.
- ↑ 문제의 대상이 고종 암살을 기도한 김홍륙 독다사건의 김홍륙이었다는 것에서 고종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 ↑ 민간 의원이 원래는 독립협회에서만 선발하는 조건이 담겨 있었다. 때문에 여기서는 일시적으로 독립협회에서 시행하고 이후에는 다른 민회에서 의원을 선발할 수 있도록 수용한 것.
- ↑ 헌의6조는 독립협회 기준으로는 상당히 조정을 인식해서 내놓은 주장이었다. 공화국 드립치던 내부 단속도 했고, 왕실 이야기도 넣어주는 등.
- ↑ 이대로만 끝났으면 독립협회는 명예혁명을 이루는 셈이었다.
- ↑ 이에 대해서 당사자인 윤치호의 윤치호일기, 역시 독립협회 참여자인 정교의 대한계년사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독립협회 측에서는 친러파 고관이 꾸민 음모로 이해했다. 물론 개연성은 없진 않으나 관련 글들이 모두 당사자의 주장이라서 좀 애매하다. 애초에 윤치호, 박영효 등의 대통령설은 만민공동회에서도 꾸준히 나오던 이야기였다. 때문에 관민공동회 시기 독립협회가 대중들에게 내린 포고의 첫항은 황제와 황실에 대한 불경한 언어를 엄금하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금한다였다.
- ↑ 대부분의 교양역사서나 교과서에서는 이 단계에서 황국협회의 급습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 참고로 이 때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 공사관에 사전 협의를 했고, 양국 모두 동의했다. 이는 일본 공사관 기록이 남아있다.
- ↑ 서재필과 박영효를 추천하는 것에 있어서는 독립협회계열 내부에서도 반발이 존재했으나 결국 강행되었다.
- ↑ 이후 만민공동회의 참여 인원은 급감했다. 독립협회에 대한 민중의 지지도가 어느정도인지를 보여준 사례였고, 이와 관련해서 윤치호 등은 민중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면서 냉소주의로 돌아서게 된다.
- ↑ 부의장 이상의 직책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들이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