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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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백제후백제미군정대한민국
진한신라신라
변한가야
우산국대한민국 임시정부
탐라국
대한제국
大韓帝國
국기국장[1]
250px
1897~1910 (13년)
표어광명천지(光明天地)
(모든 땅에 밝은 빛을 내리리다.)
국가애국가
위치한반도
수도한성부
정치체제전제군주제[2]
국가원수황제
주요 황제초대 고종(1897~1907)
2대 순종(1907~1910)
국성전주 이씨
언어한국어
민족한민족
주요사건1897년 칭제건원,광무개혁
1898년 만민 공동회 개최
1899년 대한국 국제 선포
경인선 대통
1904년 러일전쟁
중립국 선언
한일의정서 체결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천도교 설립
1906년 통감부설치
1907년 헤이그 밀사
국채보상 운동
신민회 설립
고종 강제퇴위
순종 즉위
1909년 안중근 하얼빈 의거
대한제국 군대해산
1910년 한일강제병합
통화
성립 이전조선
멸망 이후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1 개요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근대국가였지만,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비운의 제국

국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국기는 대한제국 태극기, 국가는 대한제국 애국가, 황실 상징이자 국장은 이화문(李花紋)이다. 여기서 국명의 '대한(大韓)'과 국기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사용 중. 황실 상징인 이화문은 전주 이씨 종친회가 계승하여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가(노래)는 국권 침탈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가 광복하면서 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서로 다른 국가(하지만 제목은 둘 다 애국가)를 채택하면서 사실상 소멸.

영어명 Empire of Dai Han은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명칭이고, 일반적으로는 Korean Empire나 Empire of Korea가 주로 통용되었다. Korea의 어원이 '고려'인데 바로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였던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진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이 대한제국을 코리아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해서, 'Korean Empire'라고 하지 말고 'Empire of Dai Han'이라는 영문 호칭을 사용해주길 주한 외국 공사관에 요청하기도 했는데 무시당했다. 일본어 잔재론에서 Corea떡밥 관련 부분 참조.

1897년 10월 12일 ~ 1910년 8월 29일까지의 12년 10개월 18일 동안 존속했던 한반도의 나라. 조선 왕조 까지 합치면 당연히 1392년부터다. 동화약품의 부채표 활명수가 생긴게 바로 직전인 1897년 9월 25일이다. 한국은행도 그렇고, 서울의 많은 대학도 그렇고. 대부분의 "백년 역사"는 이때 비롯된게 많다.

대한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 제국국권을 강탈하면서 사라진 국가로서, 한반도에 존재했던 제국(당연히 전제군주제)이다. 대한민국과 구별하기 위해 구 한국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기 전이라고 하여 구한말이라고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구한말'이라는 용어 자체는 대한제국 시기를 가리킨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시점 혹은 흥선대원군(명목상으로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3년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1905년을사조약 이후론 망국과 다름 없어서 실질적 황제는 고종 황제밖에 없다. 1907년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 황제가 뒤를 이었으나 별 의미는 없었다. 비공식적으로 광무제, 융희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당시의 공식 의전 명칭이 아니다. 흥했으면 모르겠지만, 10년만에 멸망했기에 조선사의 연장선상으로서 다뤄지고 순종도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여겨진다.

또한 국호가 바뀌기는 했지만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갈아엎힌 것도 아니고 있는 왕조가 이름을 바꾼 것일뿐더러, 어차피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봤자 왕의 호칭이 황제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그 전의 조선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 머리 속에서의 역사상의 비중은 '그런 게 있었지' 수준이다. 이 시대를 구한말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선 언제 망했어?' 물어보면 1910년의 경술국치를 대는 상황이다. 이런 시각은 당대에도 널리 퍼져 있던 모양인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새 나라의 국호를 정하자는 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조선'이란 이름과 경쟁을 했었다. 전주 이씨의 황실 복원도 '대한제국'이 아닌 '조선 황실 복원'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다만 황실 복원 관련 인물이나 단체들은 '대한제국 황실 복원'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한다.

정식 국호는 '대한제국'이지만, 아래 항목에서 설명할 대한국 국제의 경우처럼 1890년대 초창기에는 국호 '대한국'과 섞어 쓰기도 했다. 따라서 이 문서는 대한국으로 검색해도 접근할 수 있다. 약칭으로는 '대한'과 '한국'이 사용되었는데, 보통 단체명 등에서 접두어의 개념으로 대한이 더 자주 사용되었다. 다만 미-소 군정 시절까지 사용된 '조선'에 비하면 그 용례가 상대적으로 적다.

흔히,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의 건국 시점부터 근대 시대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2 대한국 국제

이 문단은 대한국 국제(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1899년 8월 17일 발표된 국제. 두산백과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한국 국제에서 볼 수 있는 특색있는 점은 대한제국 반포가 당시 조선 왕실(정부)의 혁신을 통한 유의미한 발전을 꾀하려던 것으로, 국가의 권력의 주체를 황실에 두고 이에 따른 권력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전제주의적 성격이 강한데 대부분의 근대 헌법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한 국가의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권력의 주체를 인민으로 보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대한국 국제는 국민주권, 의회주의, 기본권 보장과 같은 요소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근대적 헌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다못해 외견적 입헌주의에 해당한다 불리우고 진정한 근대적 헌법 취급은 받지 못하는 비스마르크 헌법이나 메이지 헌법 조차도 제한적으로나마 기본권(최소한 일본의 경우 이는 학문적으로 일종의 은혜로 해석했다.)이나 의회제같은 것이 있었다.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제일조(第一條) : 대한국(大韓國)은 세계 만국(世界萬國)의 공인(公認)되온 바 자주독립(自主獨立)하온 제국(帝國)이니라.

제이조(第二條) : 대한국(大韓國)의 정치(政治)는 유전즉 오백년 전래(由前則五百年傳來)하시고 유후 항만세 불변(由後恒萬歲不變)하오실 전제 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삼조(第三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무한(無限)하온 군권(君權)을 향유(享有)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립 정체(自立政體)이니라.

제사조(第四條) : 대한국 신민(大韓國臣民)이
대황제(大皇帝)의 향유(享有)하옵시는 군권(君權)을 침손(侵損)할 행위(行爲)가 유(有)하면 기이행 미행(其已行未行)을 무론(勿論)하고 신민(臣民)의 도리(道理)를 실(失)한 자(者)로 인(認)할지니라.

제오조(第五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국내(國內) 육해군(陸海軍)을 통솔(統率)하옵시어 편제(編制)를 정하옵시고 계엄(戒嚴), 해엄(解嚴)을 명(命)하옵시나니라.

제육조(第六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법률(法律)을 제정(制定)하옵시어 그 반포(頒布)와 집행(執行)을 명(命)하옵시고 만국(萬國)의 공공(公共)한 법률(法律)을 효방(效倣)하사 국내 법률(國內法律)도 개정(改定)하옵시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복권(復權)을 명(命)하시옵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정 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칠조(第七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행정(行政)각 부부(各府部)의 관제(官制)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俸給)을 제정(制定) 혹(或) 개정(改定)하옵시고 행정(行政)상(上) 필요(必要)한 각항(各項) 칙령(勅令)을 발(發)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행 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팔조(第八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출척(黜陟)임면(任免)을 행(行)하옵시고 작위(爵位) 훈장(勳章) 급(及) 기타(其他) 영전(榮轉)을 수여(授與) 혹(或) 체탈(遞奪)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선 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구조(第九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각 유약국(各有約國)에 사신(使臣)을 파송, 주찰(派送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급(及) 제반 약조(諸般約條)를 체결(締結)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견 사신(自遣使臣)이니라.

출처는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1899년 9월 17일자 「대한국 국제 관보」. 원 출처의 강제개행 역시 똑같이 적용하였다. 참고로 여기서 강제 개행을 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높으신 분을 쓸 때에는 무조건 행갈이를 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개행 문서에도 나와 있으니 그쪽도 참고하자.

3 허울 좋은 제국일 뿐이었나?

일단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국력이나 영토가 크게 신장된 것이 아니라 뻘짓으로 보기도 하는데, 동아시아에서 제국의 의미는 단순히 강대한 세력을 가진 국가라기 보다는 타국에 복속되거나 조공을 바치거나 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 국가임을 의미하기도 하는만큼, 이를 천명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몇십 년도 못 버티고 일본에 먹힌 건 잠시 잊자

여기서 더 나아가서독립국가를 주장한 것에 비중을 두어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를 제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일본과 국내의 소수 학설이다.

어쨌든 제국 선포 후 대한제국의 행보는 단순히 대외적인 자주국임을 선포한 것 이외에도, 의외로 국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국가주의적 면모는 독립협회를 위시로 한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같은 지식인 계층들도 가담했고, 위에 언급한 황권의 강화 외에도 청일전쟁 이후 청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보고 본격적인 간도 합병을 노리기까지 했다. 거기다 청나라와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을 맺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나라와 대등한 황제국 관계로 외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 성립

4.1 입헌군주제 덕에 생긴 전제군주국

칭제 드립은 근본적으로 갑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3일 천하에 그쳤으나 김옥균 등은 왕의 공식 칭호를 군주(君主)에서 대군주(大君主)로, 전하폐하(陛下)로, 왕 자신의 호칭을 (朕)으로 부르도록 하였고 이 대군주가 내리는 명령을 칙(勅)으로 하는 등 사실상의 칭제 계획을 올린다. 여기서 보듯, 제국의 선포는 곧 자주국의 선포였다. 물론 이런 꿈도 결국 사흘만에 청나라위안스카이가 들어오고 명성황후 민씨의 복귀로 실질적 독립조차도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아관파천이 독립협회의 요청으로 중단되고,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황제 드립이 시작된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를 주장하였고 고종도 내심은 그게 아니었지만 일단 겉으로 동의한 상태였다. 하급 관료와 황실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영국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런데 독립협회도 엄연히 종친이 관여하고 이완용등 관료의 상당수가 참가했기에 단순히 입만 산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이름만 빌려 줬다는 말도 있지만, 왕세자 이름으로 당시로는 적지 않은 지원금이 나간 것을 봐서는 초기에는 정부에서 만든 단체로 이해하기도 한다.

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영국식은 영국과 일본이, 독일식은 당연히 독일이 체택하고 있었다. 사실 이 둘의 결정적 차이는 군주가 정치에 참여할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때문에 군주가 주도하거나 동의한 경우는 독일식이 되는거고, 하부에서 군주권을 뺴앗는 식으로 입헌군주제가 되면 영국식이 되는 것이다. 이래서 메이지 유신을 거친 일본이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취한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고종은 당연히 전제 군주정 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 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계속된 지원을 받았으며 언제든 폭력집단으로 활용이 가능한 보부상들을 대거 끌어들였다. 흥미로운 건 서울과 중추원(상원)으로 제한을 두려고 한 독립협회에 대항해서, 황국협회는 전국적인 선거를 통한 하원 설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출범한지 얼마 안되는 독립협회의 영향력 범위가 아직 서울 일부로 제한적이었다는 약점 때문이었다. 결국 지방민들은 아직 왕을 하늘로 떠받드는 근왕 의식이 남아있었던 만큼 황국협회의 세력은 작지 않았다. 이걸 단순히 독립협회에 대한 안티테제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황국협회를 주도한 홍종우 역시 프랑스 유학을 거친 근대적 지식인이었고, 독립협회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과욕이었다. 집도 절도 없고, 애초에 독립문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던 독립협회가 당시 한양의 어설픈 동조자들을 기반으로 하고 해외 대사관들을 암묵적 배경[3]으로 해서 정권 하나를 통으로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하간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상원)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독립협회 임원들의 거대한 막장짓으로 시작과 동시에 박살이 난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문제였다. 내각 구성권을 의회가 가지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반역죄로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나 국외추방된 미국인 필립 제이슨[4] 등의 이름이 나온 것도 원인이었다. 이것은 독립협회가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더구나 이 둘은 각각 일본과 미국의 대변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립협회내부의 친미, 친일쪽 계파들 성향을 그대로 반영할 인물들이었다. 무엇보다 고종이 가장 혐오하던 인물들이기도 했는데, 이들을 귀국시켜서 각료에 앉힐 수 있다는 것은 고종의 인사권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5] 중추원은 바로 해산당한다. 더불어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례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박살내었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강성화되어서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까지 나오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박영효 국왕설은 반대파의 모략이라고 해도,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 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 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일단 중추원이 성립되자 바로 기존의 자세로 돌아갔고, 강경파들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4.2 고종, 제국을 선포하다

고종은 이 상황에서 외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제는 중립화론, 3.1 운동의 독립청원, 상해임시정부국제연맹을 이용(?)한 외교독립론 등 끝이 없이 이어진다. 처음엔 제국 선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기가 러일전쟁으로 나아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언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기록을 보면 고종은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용이야? 이런거 안 하면 안 될까?'하는 말을 계속하고는 있었다.

황제 선포 괜히 했다가 휘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인데 본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종은 환구단을 이미 짓고 있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전에는 사직단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는 환구단을 짓고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나라 예산만 축날 뿐이니 하지 말자고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원구단의 경우는 세조가 실제로 지었고, 광해군이 하려다 못한 것이긴 했다. 이것만으로 고종이 제국이 되는걸 반겼다는 걸 증명하기엔 조금은 부족하다..만 심증은 된다.

고종은 몇 번이고 사양하면서도 비등한 여론에 못 이기는 척하며 급하게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자기들 나라 이름은 외자로 쓰고 인근 민족과 나라 이름은 두 자로 써왔다. 근세에 서양 열강과 접촉하면서부터는 이들 나라의 이름을 굳이 세 글자에 맞추어 미리견, 영길리, 불란서, 노서아 등으로 썼다. 서양 열강의 침탈로 중화주의가 패퇴한 뒤에야 이들 나라 이름을 한 글자로 고쳐 불렀다.

주자학적 화이론(華夷論)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제국은 당연히 외자 이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정한 '한(韓)'은 고종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옛부터 중국 등에서 불렀으며, 삼한을 이었기 때문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大)'는 대청제국, 대명국 등 당시 중국왕조들이 관용적으로 쓰던 접사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4.3 상제는 황제를 도우소서

앞서 보듯이 정치적으로는 입헌 군주정 운운하던 세력이 전멸한 상황. 이제 길은 하나 뿐이다. 결국 대한제국은 헌법격인 대한국 국제를 통해서 만세무궁한 전제 군주국으로 태어난다. 이런 전제 군주화는 실제로 미국인과 영국인이었던 당시 법률 고문들이 전제 군주정이 아니라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의 막장 상황이긴 했다. 고종의 경우는 반대파도 많았다. 박영효 등의 야심가는 국내와 연락해서 꾸준히 반란 시도를 이었고, 부친인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형제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과 연루되었다. 거기에 자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고 자기 목숨이 오락가락한 상황을 꾸준히 겪은 고종의 불안감이 더해진 결과였다. 결정타는 앞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입헌 군주국 헛발질이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1. 언제 러일전쟁이 터져서 열강에 의해 하던 것이 리셋될지 모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2. 그나마 배웠다는 인물들은 독립협회 사건 등으로 병크짓 벌리다가 밀려나가는 인적풀의 고갈이 더해지는 절망적 상황이 더해지는 전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고종이 그나마 자기 측근이나 믿을 만해 보이는 외국인 고문들 몇명 데리고 좌충우돌 하는 형태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엽기적 상황으로 흘러갔다. 이른바 광무개혁의 시작이다

5 제국의 노력과 냉랭한 현실

광무개혁 항목 참조.

6 상제는 황제를 돕지 않고...

국제 정세나 외교에는 큰 힘을 기울였지만 감각은 부족했던 고종의 노선은 제국 선포 8년 후인 러일전쟁 때 제대로 깨지게 된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대한제국이 살아남는 길은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고종이 러시아 황제와 같은 황제의 입장에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부동항을 할양하고 친러 세력으로 뛰어들면 국가가 망하지는 않을 가능성은 존재했다. 러시아의 공산화, 즉 러시아 혁명피의 일요일 등 러일전쟁의 패배가 미친 영향을 고려하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으면 대한제국은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은 그렇게 높지만도 않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자기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중립국을 선언한다.[6] 물론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가볍게 씹고 고종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는 뒤이어 전쟁에 승리한다.

7 광무융희가 되고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해 방해물을 제거한 후 을사조약을 맺어 병탄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여기에 미국과 영국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명확하게 인정하게 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가 고종을 한마디로 물먹인 이야기는 항목 참조. 고종은 빌헬름 2세에게 붙어서 애걸복걸해 보았고, 빌헬름 2세는 "카이저 폰 코리아"(한국의 황제께)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명했으며, 황제의 내탕금 백만냥(500억 상당)을 독일은행에 입금까지 시켜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정세 하에서 독일 황제가 직접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하게 되었다. 일만 잘 돌아갔으면,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그 동맹 파트너라고 쓰고 시다바리인 일본을 견제할 좋은 찬스로서 독일이 한국에 적극 개입했을지도 모르기에 나름대로는 고종이 머리를 잘 쓴 거긴 했다. 삼국간섭의 선례도 있고. 하지만 망했어요. 그리고 삼국간섭의 결말이 을미사변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대한제국이 이런 막장 상황에서 탈출할 마지막 실날같은 희망은 결국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승리 밖에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망했어요 이에 고종은 최후의 한 방으로 만국 평화 회의에 헤이그 특사를 보내게 되지만 정식 초대장을 지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몰아내고 순종을 옹립했다.

8 융희명치가 되다

순종융희황제가 즉위하고 일본은 불평등조약과 사법권,경찰권 등에 국가권력을 빼앗았고 그렇게 제국은 기본적 권리마저 모두사라진 말그대로 허울뿐인 제국이 되었다.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맞이해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으로 격하되어 일본의 귀족이 되고 대한제국의 모든 영토는 일본 제국의 영토가 된다. 아무리 외교를 잘해도 자기 밑천이 없으면 허사라는 교훈을 준다.

9 대한제국의 영향

사실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 등은 대한제국을 엄청 깠고 옛 황실 우대를 반대하면서 명칭을 대한이 아닌 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조선인민공화국을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구를 비롯한 임정 주류의 의견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였기 때문에 국호는 대한이 되었다. 이후 1948년 제헌의회에서 7월 1일자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정해졌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대한이란 국명은 남아서 후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대한제국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없었다면, 아마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없을 것이고, 북한과 우리는 북조선, 남조선하면서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막을 따지자면 한민당은 고려공화국을 지지했다. 맨땅에서 아이디어를 파올리지 않는 한,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용된 자신들이 스스로를 부르기 위해서 쓰인 정식 국호는 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 고려(고씨고려, 궁예고려, 왕씨고려), 백제(부여씨백제, 견훤백제), 신라, 발해 뿐이었다. [7]

그런데 한(韓)은 고대부터 이 지역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꾸준하게 사용되었다. 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키는 삼한으로 시작해서, 삼국 통일을 대신하여 일통 삼한이라는 말이 과거에는 더 광범위하게 통용되었다. 그런데 마한, 진한, 변한을 이르는 원삼국시대삼한으로서의 정의는 근대 이후에 생기기 시작한 개념이다. 그 전까지는 때 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를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삼한'이라 하면 원삼국시대의 세 나라 보다는 삼국시대의 세 나라를 지칭하는 의미로서 많이 사용된다잘못된 교육의 결과.[8].

성리학적 개념에서도 위만 조선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 삼한으로 내려와서 한왕이 되었다는 구절 때문에 '한정통론'이라는 것이 조선 시대 역사 학계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한(韓)이라는 명칭에는 전반적으로 남부 지역의 이미지가 강해서, 임시정부 시기에서도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서 더 선호했던 것도 특징적이다. 단적으로 한반도 자체가 대한민국 기준에서는 '한반도', 북한이나 중, 일 기준에서는 '조선반도'다. 결국 이름이 대한제국-상해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법통 계승 측면에서 대한의 명칭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삼한 항목 참고.[9]

10 군사

대한제국군 참고.

11 대한제국의 국가

대한제국 애국가 참조.

12 역대 황제

대수묘호연호이름재위기간즉위전 지위/군호능호
1대고종(高宗)개국, 건양, 광무이희(李熙)1897 ~ 1907익성군홍릉
2대순종(純宗)융희이척(李坧)1907 ~ 1910(왕세자 -> 황태자)유릉

13 추존 황제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태조 고황제진종 소황제장조 의황제정조 선황제순조 숙황제문조 익황제헌종 성황제철종 장황제
추존황제이름능호
태조고황제이성계건원릉
진종소황제이행영릉
장조의황제이선융릉
정조선황제이산건릉
순조숙황제이공인릉
문조익황제이명수릉
헌종성황제이환경릉
철종장황제이변예릉

14 대한제국과 수교한 국가

다음 국가들은 대한제국이 수교한 순서대로 나열되었다. 괄호 안의 날짜는 태양력이다.

이 가운데 일본 제국만 1910년 국권침탈 때까지 수교 상태에 있었으며, 나머지 국가들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모두 단교하였다.

15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

일반적으로 내각을 포함한 산하 관청 및 궁내부, 사법 기관 등의 관청들로 칭제건원 후부터 1905년 을사조약이 있기 이전의 관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16 대한제국군

17 이시대에 들어온 근대문물

18 이시대에 일어난 사건

대한제국 선포 후에 일어난 사건들 목록이다.

19 관련문서

  1. 국기와 국장, 그리고 그 아래의 그림은 위키백과가 출처다. [1], [2]
  2. 갑오개혁독립협회에 의해 입헌군주제의 틀을 마련했었지만, 대한제국에서 공인한 헌법황제무한한 군주권을 규정한 대한국 국제뿐이다.
  3. 고종이 독립협회 해산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한양내 독립협회 지지층이 아니라, 정도에 있던 외국 대사관들이었다. 독립협회를 해산하는 것이 대외적으로 나쁜 이미지를 주지 않을까를 고민했던 흔적이 많이 보인다. 참고로 그 서양 대사관들은 독립협회의 해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한 반응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
  4. 당시 박영효는 반란 시도를 하다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 필립 제이슨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귀화한 다음 독립문 관련해서 귀국했다가 다시 정치적으로 사고를 쳐서 추방된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조선인도 아니다.
  5. 특히 박영효를 쓴 사람이 주요 대상이었다. 박영효는 이 시점에서도 조선 내부와의 연결과 반란을 시도하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즉 박영효를 추천한 사람은 외환죄로 취급된 것.
  6. 어차피 일본이 승리하면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에서 차라리 러시아 편을 들어 반일 정책을 펴고 러시아의 승리 이후 콩고물을 챙기는 편이 그나마 합리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고종 자신의 안전이 담보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일본은 청일전쟁이 일어날 즈음에는 경복궁을 포위했고, 러일전쟁 발발시에도 후술되지만 중립국안마저 씹고 고종을 협박했다. 대한제국의 군사력으로는 내부 반란도 제대로 제압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이 시점에서 고종은 강제 퇴위되고, 순종이 일본의 꼭두각시로 즉위하는 일이 좀 더 빨리 벌어졌을 것이다.
  7. , 부여, 옥저, 동예, 가야, 탐라는 고려대상이 아니었을것이다.
  8. 왜냐하면, 조선중기까지는 삼한이 변해서 삼국이 되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게 깨지는 것이 이익과 그 제자 안정복에 의한 것인데, 이 사람들 남인이라서 조선의 역사적 인식을 주도하지 못했다. 애초에 삼국지 위지 동이전만 봐도 고구려와 삼한이 별개 항목을 존재하는데도 도대체 왜 삼한=삼국이라고 믿었는지는 의문.
  9. 다만, 대한제국의 '大'는 삼한을 통합, 계승한 국가라는 적통의 가치를 내세운 것으로, 대영제국, 대명국 등의 용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더불어 근왕파 독립운동이 만연했던 1910년대까지만 해도 축약어로 '대한'이 널리 쓰였으나, 21세기 현대에는 '한국'이라는 약식 표현이 확연히 많은 것도 소소한 차이.
  10. (청량리∼서대문)운행을 1898년부터 시작하였다
  11. 한성 전기 회사가 1900년에 가로등 3개를 종로에 설치를 처음으로 설치 하였다
  12. 1905년에 선교사인 필립 질레트 가 야구를 전파하였다 또한 <황성 YMCA 야구단>을 세웠다
  13. 1907년 질레트가 농구를 소개하면서 농구를 전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