奪門之變
한 황제가 제위(帝位)를 징검다리식으로 중임한,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례를 만들어 낸 사건
1457년 명나라에서 경태제를 정통제가 폐위한 쿠데타. 둘은 이복형제 사이다.
토목의 변 이후 정통제가 유폐되고 조정은 정통제 파와 경태제 파로 나뉘었다. 경태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주견제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1457년 1월 경태제가 병을 앓아 누워 있는 중에 대장 석형(石亨), 태감 조길상(曹吉祥), 서유정(徐有貞)이 정변을 일으켰고 경태제는 폐위되었다. 폐위된 지 한 달 후에 병사했다.
그렇게 정통제는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르니, 내심 찔렸던지 이전의 '정통' 연호를 그대로 쓰지 않고 '천순'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내걸었다. 일단 정통제 때와는 달리 꽤 괜찮은 정치를 하긴 했지만 두 번째 재위도 편치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조길상에게 휘둘렸으나, 조길상은 천순제를 폐위하고 황태자를 옹립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책형에 처해졌고 7년 후 천순제는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한다.
황제로 지낸 두번째 시기 동안에는 상당히 개념찬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자기를 다시 황제로 만들어 주었지만 간신으로 평가받는 조길상이나 석형 등을 제거하고 이현(李賢)과 같은 훌륭한 신하를 기용한다든지. 이 때 천순제는 자기의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조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 다음에는 조회를 보고 그 다음에는 밥 먹고 상주문 읽는 것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다. 다만 조길상, 서유정의 모함에 속아서 토목의 변 때 북경을 지킨 공신인 우겸을 죽이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비록 우겸이 경태제를 옹립한, 천순제 본인에겐 반역자와 같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매우 불가피한 경우인데다 우겸 본인은 매우 청렴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있는 인물이라서 대국적으로 용서해 주었다면 우겸 또한 천순제에게 충성했을 것이므로 이는 큰 실책이라는게 후대의 평가. 천순제도 이후 우겸이 훌륭한 신하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다고.
그리고 건문제의 유일한 후손이자 그의 차남 윤회왕 주문규를 56년 만에 유폐에서 해방시켰으며[1] 자신이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힌 기억을 참고해서 그때까지 남았던 자신이 죽고난 뒤 비빈들의 순장을 금지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명나라 내부에 남았던 몽골의 풍속은 뒤틀린 폐습인 경우가 많아서 매우 개념찬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