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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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謙
(1390 ~ 1457)

명나라의 인물. 자는 정익(廷益), 호는 절암(節庵).

제2의 정강의 치욕을 200년 뒤로 늦춘 인물

최악의 상황에서, 총대를 매고 최선의 결정을 함으로서 나라를 구했으나, 자신은 망친 인물

절강 전당 사람으로 1421년에 진사가 되었고 강서 순무로 부임하기도 했으며, 성미가 강직해 왕진의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힌 적도 있지만 관리들의 탄원으로 풀려놨다. 1448년에 병부시랑이 되었으며, 1449년에 오이라트의 추장 에센이 변경을 침입하자 정통제가 왕진의 권고로 인해 싸우러 나갔다가 정통제가 사로잡히는 토목의 변이 일어난다.

집단패닉에 빠져 최소 황하, 최대 장강도하를 결행할 것을 재촉하는 북경의 뭇 대신들을 상대로 당시 병부시랑(조선의 병조참판, 오늘날의 국방부 차관에 해당)이었던 우겸은,

"수도는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길 바라는가? 북송이 어찌 망했는지 모르는가?"

라 일갈한 뒤 스스로 나서 포로가 된 황제를 태황제로 올리고 황제의 동생 주기옥을 새로이 천자로 등극시키는, 후일 대역(大逆)의 죄를 뒤집어 쓸수도 있는 일련의 수습과정을 추진한 뒤 방어군을 지휘, 북경성 주변의 성읍들과 연계하여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한 뒤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린다.

"북경성문을 걸어 잠궈 퇴로를 없이하라. 선봉이 물러서면 후위가 선봉을 참할 것이요, 사졸이 장군의 명을 듣지 않고 퇴각하면 그 역시 참할 것이요, 장수가 사졸을 돌보지 않고 도망한다면 그 또한 목을 벨것이다."

군령을 내린 뒤 몸소 성밖에 나가 야전군을 지휘한 우겸은, 토목보에서의 승리 뒤 파죽지세로 명을 들이치려 했던 에센의 오이라트군의 진격을 일차적으로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점차적으로 전황이 교착되어가는 와중에 명군측으로는 남쪽에서 징발되어 온 근왕병과 물자들이 속속히 공급되기 시작했고, 결국 에센은 정통제를 지랫대 삼아 협상을 시도하나 명 측에서 '그분은 이미 태상황이 되셨고 우리는 새로이 천자를 세웠다' 라며 쌩까버리는 상황까지 이른다. 격노한 에센은 북경으로 진공했으나 이미 명군은 22만의 대군과 막강한 화력으로 철옹성을 구축해 놓은 터, 에센의 오이라트군 역시 토목보에서 명군에게 노획하거나 명군이 버려놓고 간 화기들을 득템하여 일단 보유는 하고 있었으나 그 사용법을 몰랐다는 안습한 당시의 실정탓에 전투 내내 발포가 불가능했다.

결국 창의문과 덕승문 일대의 공성전에서 명군측의 불쇼에 처절히 농락당한 끝에 에센은 동생까지 잃고 카라코룸을 향해 퇴겔하는 역관광을 당하게 된다. 오이라트 입장에선 데리고 있어봐야 쌀아니 말젖도둑 육포도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버린 정통제는 이후 무사하게 송환되어 태상황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겸이 경태제를 친정을 하게 해 오이라트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만약 황제랑 중앙군이 캐발살난 상태에서 황하 이남이나 남경으로 수도를 옮겼다면 오이라트군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오이라트는 대대적인 침공을 하여 몽골제국-원나라 때처럼 다시 한번 중원을 공략하였을 것이고 만주족의 청나라보다 200년 앞서 오이라트의 북경함락이 일어나 위진남북조 이래 제 3의 북방민족의 중원 정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경태제는 정통제를 태상황으로 하고 남궁에 안치했다. 이후 복건, 절강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우겸이 모두 진압한다.

마침내 1457년에 석형, 조길상, 서유정 등이 탈문의 변을 일으켜 정통제를 복위시키자 그리고 사실상 이로서, 우겸의 비참한 최후는 결정지어진다. 우겸은 외번을 끌어들여 모반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가 처형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지만 값나가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고 곳간에서 경태제가 하사한 예복, 검, 무기 밖에 없다고 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래서 정통제도 우겸을 처형한 것을 후회했다고 하며, 나중에 복권되었다. 홍치제때 숙민(肅愍)이란 시호를 받았고, 만력제때 고쳐 충숙(忠肅)이라 했다.

그렇지만 우겸의 사형 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라.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용의자 0순위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즉위한 천순제에게 우겸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겸은 경태제를 옹립시킨 1등 공신이다. 다른 걸 떠나서 자기를 공기로 만든 존재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겸은 황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고, 북경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그의 능력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용서했다면,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대뻘짓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우겸이 청렴결백한 신료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하며,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자기 측근들을 처형했다.

매체에서

이우혁의 소설 <쾌자풍>이 토목의 변,탈문의 변과 그에 얽힌 우겸 일족의 복수를 조선인 입장에서 다룬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