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역대 황제 | |||||
8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 | ← | 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 → | 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
묘호 | 헌종(憲宗) | |
시호 | 계천의도성명인경숭문숙무굉덕성효순황제 (繼天凝道誠明仁敬崇文肅武宏德聖孝純皇帝) | |
연호 | 성화(成化) | |
성 | 주(朱) | |
휘 | 견심(見深) | |
생몰기간 | 1447년 12월 9일 ~ 1487년 9월 9일(41세) | |
재위기간 | 1464년 2월 28일 ~ 1487년 9월 9일 |
역대제왕묘 배향자 |
1 개요
성화제는 중국 명나라의 제 8대 황제로, 이름은 주견심(朱見深).
초명은 견준(見濬)이며 정통제의 맏아들이다. 시호는 계천의도성명인경숭문숙무굉덕성효순황제(繼天凝道誠明仁敬崇文肅武宏德聖孝純皇帝).
토목의 변으로 경태제가 즉위한 이후 잠시 황태자에서 폐위되었다가 아버지인 영종이 다시 즉위하여 무사히 황위에 올랐다.
2 똑똑한 황제였던 시절도 있었다
성화제는 재위 중에 우겸[1]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으며 아버지의 두 번째 재위 시기에 격하된 경태제의 신분을 다시 황제로 올려 주었다. 자기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낸 사람인데도.
성화제 시기에는 변방에서 일어난 큼직한 사건 (형양의 반란이나 광서지역의 반란 등) 몇 개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온한 편이었으며, 대체로 원만한 치세를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명사에서는 평하기를, 인선의 치세가 돌아왔다고 할 정도였으며, 명대 사람들은 성화-홍치로 이어지는 시기가 명나라의 마지막 평화였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재위기간은 23년. 끝까지 이대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3 말년에 도에 심취하다
말년에 성화제는 방술을 지나치게 믿어, 방술사와 승려들을 고관에 앉히는가 하면 환관들을 기용해, 권력을 잡은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거침없이 자행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4 연상을 좋아한 황제폐하
또한 성화제는 19세 연상(!)의 만귀비를 총애하였다. 당대의 사회상을 생각하면 거의 모자관계 수준의 나이차이인데 실제로 만귀비는 성화제가 열 살 때부터 모신 유모 같은 여인이다. 일종의 모자관계 같은 것이 자라면서 애정관계로 변한 것(...) 성화제는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신분도 낮고 궁녀 출신인 그녀를 황후로 만들려고 온갖 애를 썼으나 무리수. 결국 오씨 성을 가진 여인을 황후로 삼고 만씨는 비빈으로 두긴 했으나 당연히 궁내 실세는 만귀비였다. 그녀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황후 앞에서도 싸가지없이 굴었을 정도였다. 결국 빡친 황후가 그녀에게 군기 교육을 시도하다 황제에게 주저없이 폐위크리를 당하고 새 황후인 왕황후는 선임의 사례로 배운 게 있었는지 만귀비 앞에서 설설 기었다...
이 만귀비도 황제만큼이나 심각한 인물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요절하자 온갖 패악은 기본에, 성화제의 다른 후궁이 임신하면 기어이 낙태시키고야 말았다. 가까스로 태어난 황태자 주우극은 모친과 함께 독살당했다. 때문에 성화제는 말년까지도 후사가 없었고, 환관이 숨겨서 기른 주우당이 나타나 겨우 후사를 이을 수 있었다.[2][3] 한편 만귀비는 주우당마저 죽이려고 들었으나 태후가 맡아 기르는 바람에 무다무다.
만귀비는 나이가 든 후에는 뚱뚱해졌는데, 이 때문에 고혈압이 왔던지 궁녀에게 무슨 일로 화가 나 궁녀를 때리다가 혈압이 올라 쓰러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사망. 성화제는 이를 슬퍼한 나머지 '우리 자기야가 갔으니 내가 더 살아서 뭐함ㅠㅠ' 하는 발언을 남기며 시름시름 앓다 결국 같은 해에 죽고야 말았다.
5 기타
조선 중기 채수의 설공찬전에도 등장한다.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1년 정도 연장시켜 달라고 애박이란 사람을 보내 염라대왕에게 요청했는데, 염라대왕이 한 달 이상은 곤란하다고 해도 계속 보채자 결국 화가 난 염라대왕이 "아무리 천자라 해도 사람 살리고 죽이고 하는 건 내 권한인데 어디서 땡깡질고유권한 침해냐"며 수명 연장이고 뭐고 없이 당장 그 신하를 잡아오라고 한다. 성화제는 놀라서 본인이 몸소 염라대왕에게 찾아가고, 염라대왕이 앞서 황제가 수명 좀 늘려 달라고 부탁한 그 신하를 잡아다 손을 삶으라고 명령하는 부분에서 소설이 끝난다.[4]
아버지인 정통제와 성화제의 어진이나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닮은 것을 넘어 거의 쌍둥이 수준(...)이다.
- ↑ 정통제 시기의 대신. 토목의 변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았다.
- ↑ 홍치제의 어머니 기씨는 소수민족 수령의 딸로 아버지가 토벌당하면서 죄인으로 끌려와 서적 관리하는 곳에서 일했다. 그러다 성화제의 눈에 띄어 하룻밤 상대가 됐었는데, 이때 홍치제를 임신한 것. 그녀에게도 낙태약을 내리는 궁녀가 찾아갔으나 낙태약 내리는 궁녀가 동정심이 발휘됐던지 약을 덜 줘서 다행히 아이를 낳을 수 있었다고.
- ↑ 참고로 홍치제 이후로는 만귀비가 포기한 건지 몰라도 성화제는 여러 아들을 뒀다. 어쨌든 홍치제가 태어나서부터야 겨우 후사 걱정을 한시름 놓은 건 사실이다.
- ↑ 정확하게는 이 뒷부분이 전해지지 않는다. 설공찬전 자체가 내용이 요망하다고 해서 진작에 조정에서는 거두어 불태워버리도록 명했고, 그걸 이문건이라는 사람이 자기 일기 뒷면에 국문으로 번역해 몰래 베껴둔 게 발견된 것이 현재 알려진 설공찬전의 전부이고, 이나마도 뒷부분 내용을 안 적어서 그 뒤의 이야기는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