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도 헤이스케

藤堂平助宜虎
(토도 헤이스케, 토도 타카토라)
코카 원년(1844년) - 케이오 3년 11월 18일(1867년 12월 13일)

신센구미 8번대 조장.

무사시노쿠니 에도 출신으로, 쓰번(津藩)의 번주 토도 다카유키의 사생아라는 설이나 히사이번(久居藩)의 가로 토도 하치자의 하들이라는 설 등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는 그의 검에 새겨진 이름이 가즈사노스케 가네시게(上総介兼重)로 당시 쓰번의 전속 칼 장인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가네시게의 칼은 꽤 비싼 편으로, 일개 낭인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칼이 아니었기에 실제 토도 가문의 일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도 한다.

북진일도류 계통으로 치바 도장 현무관의 문하생이었다고 한다.
고료에지(御陵衛士)의 동료였던 가노 와시오의 증언에 의하면, 이토 가시타로가 운영하는 이토 도장에 머물던 제자였다고도 하는데 후에 어떤 이유로 면허를 얻기 전에 도장을 그만두었다.

후에 곤도 이사미가 운영하는 도장 시위관에 가입하였으며, 여기서 신센구미의 초기 멤버가 된 곤도 이사미, 오키타 소우지, 나가쿠라 신파치 등을 사귀었다. 검술 실력은 이들과 함께 '곤도 4천왕'이라 불렸던 만큼 뛰어났을 것이라 여겨진다.
크지 않은 키에 미남자였으며,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맨 앞에 나서서 싸워, 신센구미 내에서는 '돌격선생(魁先生)'으로 불렸다.

또한 빠릿빠릿한(…) 북진일도류 출신답게 의식예절이 몸에 배어, 신센구미 내에서는 접객 대면과 사무 처리를 주로 담당하였다고 한다. 단 품행은 좋지 않아서, 곤도 이사미가 자주 이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게이오 원년 2월, 북진일도류 동문이자 시위관 시절부터 동료였던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신센구미로부터 탈주하였다가 붙잡혀 할복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때문인지는 모르나 게이오 3년 3월, 헤이스케는 이토 가시타로와 함께 신센구미를 이탈하여 고료에지를 결성한다. 이후로 헤이스케는 이름을 난부 야시치로(南部弥七郎, 또는 야하치로(弥八郎)라고도 함)로 바꾸고, 대외 유세 등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게이오 3년 11월 18일, 아부라노코지 사건 때 고료에지 대원들을 습격한 신센구미에 의해 살해되었다.
곤도 이사미가 "토도만은 살려두고 싶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가쿠라는 헤이스케가 빠져나갈 길목을 열어두었으나, 그 사정을 알지 못한 대원 미우라 쓰네사부로가 헤이스케를 베었다고 한다. '돌격선생'으로서의 자존심과 동료들을 버릴 수 없다는 의리때문에 죽을 때까지 싸웠을 것이라고도 한다.

헤이스케의 시신은 그보다 앞서 살해된 이토 가시타로의 시신과 함께 덫으로 이용되어 이틀 정도 방치되었다.
이후 같은날 죽은 고료에지 동료인 이토 카시타로, 모나이 겐모츠, 핫토리 타케오와 함께 게이코 사 경내에 매장되었다. 이때가 향년 24세로 알려져 있다.

단, 아부라노코지 사건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요코하마에서 수도공사사업 건으로 떼돈을 벌어 행복하게 잘 살았고 1922년 경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게임 박앵귀에서는 말 그대로 철부지 장난꾸러기 캐릭터로 그려져서 게이머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참조로 성우는 요시노 히로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