服部武雄三郎兵衛
1832~1867
일본 막말기, 신센구미 대원. 통칭 사부로베에(三郎兵衛).
원래 아코(赤穂)번 출신으로, 번을 쥐고 흔들려는 간신을 베고 출번하였다는 설이 전해지나, 진위여부는 불명이다.
신센구미에 합류 후, 1864년에 5번대 대원[1]으로 편성되었다.
거한이었으며, 검술과 유술, 창술 등에 통달한 인물로 양손 모두 칼을 잘 썼고, 신센구미 내에서도 1,2위를 다툴 정도의 실력자였다고 전해진다.말그대로 국중최강(局中最强).
핫토리 타케오는 피비린내나는 신센구미의 역사 속에서도, 실제 출동시 사람을 베었다거나 하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기록이 남아있는 부분의 공통적인 기술은 '엄청난 검술실력'이다.
이 때문에 1865년 봄, 감찰 겸 격검사범[2]으로 임명되었고, 가을에는 국장 곤도 이사미의 큐슈 출장 동행, 이듬해 가을에는 산죠제찰사건(三条制札事件)[3]시, 감시역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867년 봄, 사상 차이로 신센구미를 탈퇴한 이토 카시타로(伊東甲子太郎)[4]를 따라, 고료에지(어능위사 : 御陵衛士)를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 아부라노코우지 사건당시 신센구미와의 혈투 끝에 전사했다.
신센구미에게 암살되고 이틀 동안이나 길바닥에 방치된[5] 이토 카시타로의 시신을 찾으러 가기 전, 고료에지 대원들에게 '적은 필시 신센구미일 것이므로, 최소한 갑주를 착용하고 무장을 한 뒤에 출발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는 '만일 전투가 벌어진다면 어차피 중과부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오. 갑주를 착용한 채로 죽으면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테니, 평복으로 갑시다'라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자신만이 몰래 평복 안에 갑주를 착용하고 무장을 하여 출발하게 된다.
이토의 시신을 찾으러 간 고료에지 대원은 일곱 명. 그리고 잠복한 채 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신센구미 대원은 40~5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중 모우나이 아리노스케(毛内有之助)는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고, 토도 헤이스케 또한 도주하지 않고 살해당하였다.[6] 그리고 오직 혼자서만 무장을 하고 온 핫토리 타케오만이 벽을 등진 채 혈투를 벌인다.
이 틈에, 나머지 네 명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양 손에 든 검이 모두 부러지고, 최후에는 하라다 사노스케의 창에 찔려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7]
핫토리 타케오의 묘소에, 신센구미의 일부 광팬들이 하라다 사노스케의 일러스트를 그려놓은 일도 있었던 듯.
사건 직후 현장을 목격한 쿠와나번의 번사, 코야마 마사타케의 증언에 따르면,
'핫토리 씨의 최후는 실로 너무도 장렬하였다. 양 손에는 칼을 쥔 채로 적을 향하여 큰 대자로 쓰러져 있었는데, 그 얼굴 전후좌우로부터 어깨, 좌우 팔, 배 등 온 몸에 상처가 약 이십 여 군데나 나 있었고, 그 상처로부터 흐른 피는 바닥에 흥건하였으나 얼굴만은 살아있는 듯 생생하였다'
고 전한다.
나중에 핫토리 타케오의 시체에서 피투성이의 시문(詩文)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이 한 몸으로 중적(衆敵 : 많은 적)에 대항하여, 이로써 동행의 네 사람을 구하리'
(一身を以って衆敵に抗し、以て同行の四人をして逃脱せしむ)
라는 싯구가 씌여 있었다.
이토의 시신을 찾으러 출발하기 전, 혼자서 무장을 하며 이미 자신의 목숨을 미끼로 하여 다른 동료들의 목숨을 구하려는 생각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시에도 능했던 인물로, 사카모토 료마 암살 당시, 아래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たずぬべき人もあらしの激しくて 散る花のみにぞ驚るかれぬ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