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일도류

1 개요

北辰一刀流

에도 시대 말기의 검호 치바 슈사쿠(千葉周作)[1]가 치바 가문의 가전무술인 북진류(北辰流)[2]와 북진몽상류(北辰夢想流)에 그가 수행한 나카니시파 일도류(中西派一刀流[3]를 통합하여 창시한 일도류의 계파.

일어로는 '호쿠신잇토류(ほくしんいっとうりゅう)'라고 읽는다. 한국에서는 '북진일도류'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북극성을 뜻하는 '北辰'은 '북신'이 원음이지만 북진보살(北辰菩薩)처럼 관용음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한국한자음에 관해서는 문서를 참조할 것.

2 유래

북진일도류의 개조(開祖) 치바 슈사쿠는 1794년 일본의 미야기현 게센누마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4]

슈사쿠는 어린 시절부터 검에 재능을 보여 아버지 치바 츄자에몬 나리타네(千葉忠左衛門成胤)로부터 가전무술인 북진류를 배웠으며, 치바씨 동족인 치바 요시노죠 츠네나리(千葉吉之丞常成)에게 북진몽상류를 배웠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치바현 마츠도시로 이주, 당시 마츠도 출신 검사로 유명했던 나카니시파 일도류 아사리 마타시치로 요시노부(浅利又七郎義信)의 문하생으로 입문하여 일도류를 익혔다.

그의 문하에서 2년간 수련한 치바 슈사쿠는 스승인 아사리 요시노부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고, 요시노부는 그를 양자로 삼아 도장을 잇게 하려고 나카나시파 일도류의 4대 종가인 나카나시 츄베에 츠구마사(中西忠兵衛子正)에게 슈사쿠를 보낸다. 이 시기에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호구와 죽도를 사용한 훈련방식을 도입하여 에도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슈사쿠는 나카니시파 종가에서 3년 동안 수련하여 23세 때 나카니시파 일도류의 종가로부터 면허개전을 받고, 무사 수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무사수행을 마친 뒤, 요시노부의 조카딸과 결혼하여 아사리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아사리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번주의 검술사범역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아사리 요시노부의 계획대로였는데, 문제는 슈사쿠가 나카니시파 일도류의 종가 도장에서의 수행과 무사수행을 통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새로운 기풍에 눈을 뜬 것이었다. 때문에 슈사쿠는 쿠미타치(組太刀)를 개혁하여 시대에 뒤쳐진 교수법과 불분명한 이론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이에 나카니시파 종가로부터 은혜를 입은 아사리 요시노부[5]는 절대로 안된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결국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결국 열받은 아사리 요시노부는 치바 슈사쿠를 호적에서 파버렸다.(……)

치바 슈사쿠는 하루 아침에 도장에서 쫓겨나 알거지 신세가 되었고, 새로운 일파를 만들어 나카니시파 일도류로부터 독립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솜씨가 좋아도 27세 듣보잡일 뿐이었고, 때문에 슈사쿠는 다른 유파와의 시합을 통해 이름을 떨칠 요량으로 코즈케와 무사시 지방을 중심으로 무사수행을 떠나게 된다.

이때 같은 일도류 계열의 유파인 갑원일도류(甲源一刀流)[6]의 검객과 겨뤄 이기기도 했으며, 신사에 봉납 액자를 걸어 유파를 알리려 했으나 현지의 마니와 넨류(馬庭念流)의 검객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험악해져 코즈케 지방에서 철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슈사쿠는 자신의 이름과 유파를 알리는 데 성공한다.

무사 수행을 마친 슈사쿠는, 1822년 가을에 에도로 돌아와 니혼바시 시나가와쵸(日本橋品川町)에 현무관이라는 작은 도장을 세운다. 그리고 3년 뒤인 1825년에 현무관을 오타마가이케(於玉ヶ池)로 이전한다.

치바 슈사쿠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치바 슈사쿠 참조.

3 특징

치바 슈사쿠는 평소의 신념대로 합리성[7]에 기반을 두고 검을 가르쳤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도 명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때문에 북진일도류는 자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북진일도류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단을 8개로 나누어서 전수하였는데, 북진일도류에서는 단을 3개로만 나누었다.[8] 당시에는 단이 오르면 스승과 선배, 동문에게 예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어서 가난한 자는 실력이 있어도 승단하지 못하는 폐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략한 단급제와 빠른 전수, 합리적인 기술은 문하생들에게 크게 환영받는 요소였다. 더불어 검술 위탁 교육을 활발하기 갔기 때문에 30개가 넘는 번에서 가르침을 청해 모여들 정도여서 현무관은 '막말 에도 3대 도장'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고, '기술의 치바'라고 불릴 만큼 융성하였다. 현무관에는 50명이 묵는 2층 기숙사까지 지었다고 한다.

다른 일도류와 마찬가지로 기본 자세는 정안(正眼)[9]의 자세이며, 죽도를 이용한 연격과 계고 및 목도를 이용한 카타를 중시하였다. 기술적으로는 일도류답게 세밀하고 직선적인 검풍을 갖고 있다. 보폭을 좁힌 스리아시를 이용한 빠른 전후방 이동으로 신체를 운용하며, 일도류 계열의 장기인 손목공격과 찌르기를 구사한다.

치바 슈사쿠는 죽도 검술을 검술육십팔수(剣術六拾八手)로 총정리하였는데, 여기에 현대 검도의 기술은 다 모여 있다고 한다. 할미새 꼬리 기법[10]처럼 현대 검도의 상징적인 기술로 여겨지는 것까지 만들었으며, 그 외에 삼살법(三殺法)과 같은 현대 검도의 이론도 북진일도류에서 비롯되었기에 현대 검도의 실질적인 선조에 가깝다고 여겨진다.[11] 물론 검술육십팔수에는 현대 검도에도 없는 옛 기술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당시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원래부터 죽도와 호구를 사용해서 계고를 활발히 하고 있었으므로 북진일도류와 나카니시파 일도류가 본질적인 형태의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진일도류는 별명이 기술의 치바다. 상술한 삼살법, 할미새 꼬리 흔들기 등 치바 슈사쿠가 독자적으로 만든 기술이 존재한다. 특히 할미새 꼬리 흔들기 기술은 당시에 경망스럽다고 비난이 있었을 정도로, 일본의 검술 중에 매우 특이한 기법이었다. 즉, 북진일도류는 기존 일도류를 기본으로 치바 슈사쿠가 고안한 기법들과 교수법이 조화되어 있다.

또한 여타의 일도류와 마찬가지로 목검을 사용한 쿠미타치(組太刀)인 타치 43본(太刀四十三本)를 가르치는데, 쿠미타치의 경우 원류인 오노파 일도류(小野派一刀流), 나카니시파 일도류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본을 세는 법이 좀 다르며, 북진일도류 고유의 내용도 좀 있다고 한다. 죽도 기술과 진검 기술을 조화시킨 것이 북진일도류의 장점이다.

그 외에도 고류 유파답게 거합(居合), 소태도(小太刀), 나기나타 [12](長刀)를 교육한다. 특히 거합과 쿠미타치, 죽도검술을 균형있게 구사할 수 있어야만 북진일도류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4 유명인

도장이 융성했던 만큼 당대에 이름을 떨친 검객이나 막부 말기의 거물급 인사들이 많은데, 특히 현무관 출신으로 사카모토 료마가 유명하다.[13] 하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카모토 료마는 치바 슈사쿠의 오타마가이케 현무관 출신은 아니며, 슈사쿠의 동생인 치바 사다키치가 가르친 오케마치(桶町)[14] 치바 도장[15] 출신이다. 이외에 신센구미에도 야마나미 케이스케, 토도 헤이스케, 이토 카시타로 등의 북진일도류 문하생이 있었다.

문하생 뿐만 아니라 치바 슈사쿠의 세 아들도 당대 유명한 검객이었으며, 특히 차남 치바 에이지로(千葉栄次郎)는 무패의 검사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삼형제 모두 서른을 전후로 요절하였다.

5 현대의 북진일도류

메이지 유신과 함께 검술이 쇠퇴하면서 북진일도류의 종가인 오타마가이케 현무관(於玉ヶ池玄武館)은 1872년 폐관하였고, 북진일도류의 직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현대의 북진일도류는 몇 개의 방계 계보가 남아 있으나, 이 중 2개의 계보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북진일도류의 계보들 모두 북진일도류를 온전하게 전하고 있지는 않으며 그 일부만을 보존하여 전하고 있다.

첫번째 계보는 북진일도류의 개조인 치바 슈사쿠의 제자로, 검술형 사범이었던 구 미토 번의 무사인 오자와 토라키치(小澤寅吉)가 1874년에 구 미토 번에 연 북진일도류 도장인 미토 동무관(水戸東武館)[16]의 계보이다.

미토 동무관의 오자와 가문은 단절되지 않고 꾸준히 북진일도류를 이어왔는데, 이 덕택에 일본 고무도 협회로부터 북진일도류의 계보임을 인정받았으며, 미토 동무관의 제 4대 관장인 오자와 타케시(小澤武)는 일본 고무도 협회로부터 북진일도류의 종가로 인정되었다. 2013년(헤이세이 25년)에는 미토 동무관에서 계승되고 있는 북진일도류가 미토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미토 동무관의 제 7대 관장인 오자와 사토시(小澤智)가 미토 동무관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미토 동무관에 소속된 사범급 이상에게만 전수되고 있으며, 북진일도류의 쿠미타치인 타치 43본[17]을 전하고 있다.

두번째는 북진일도류 2대 종가 치바 미치사부로 테루타네(千葉道三郞光胤)[18]의 수제자인 구 우츠노미야 번의 무사 코바야시 세이지로 사다유키(小林誠次郎定之)[19]의 양자 코바야시 시로 스케유키(小林四郎祐之)[20]가, 1913년(다이쇼 2년)에 미치사부로의 아들에게 오타마가이케 현무관 명칭 계승을 허가받아 북진일도류 3대 종가를 표명하며 홋카이도 오타루에 연 북진일도류 도장인 오타루 현무관(小樽玄武館)의 직계 스기나미 현무관(杉並玄武館)의 계보이다.

이후 오타루 현무관은 코바야시 시로의 아들인 코바야시 요시카츠 사다유키(小林義勝定之)[21]가 제4대 관장이 되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쇼와 25년)에 오타루 현무관의 내제자였던 코니시 쥬지로 나리유키(小西重治郎成之)가 오타루 현무관을 계승하여 도쿄 스기나미구에 도장을 열고 제5대 관장이 되었으니 이른바 스기나미 현무관(杉並玄武館)이다. 현재는 제5대 관장의 친자식인 코니시 신엔 카즈유키(小西真円一之)가 제6대 관장으로 오타루 현무관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스기나미 현무관은 대외적으로는 치바 슈사쿠의 오타마가이케 현무관의 직계 종가로 알려져 있으나, 오타루 현무관을 계승한 계보이며, 1883년(메이지 16년)에 치바 슈사쿠의 손자가 치바 슈사쿠의 수제자인 야마오카 텟슈(山岡鐵舟)[22]와 이노우에 하치로(井上八郎)[23]의 후견을 받아 도쿄 간다센마치에 북진일도류 현무관을 재건하였는데 이곳과도 무관하다. 북진일도류의 죽도검술인 검술육십팔수와 오행지형(五行之形)이라는 쿠미타치를 교습하고 있다.[24] 현무관에서 교습하고 있는 오행지형은 치바 슈사쿠의 유고집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때문에 정체불명의 쿠미타치라고 하여 2ch 등지에서는 스기나미 현무관이 가짜라는 증거이며 5대 종가인 코니시 시게지로의 창작물이라며 논란이 있었으나, 계보를 추적한 결과 데라다 무네아리를 통해 치바 슈사쿠에게 전승되었다는 사실과, 북진일도류 오행지형의 전서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북진일도류의 또다른 계보인 호도관을 통해 확인되었다. [25]

일본 내에서는 북진일도류의 종가 관련 문제로 스기나미 현무관 계통과 미토 동무관 계통 간의 논란이 심했으며, 현재는 일본 고무도 협회가 미토 동무관의 손을 들어줌에 따라 스기나미 현무관은 입지가 다소 축소된 입장[26]이다. [27]

이 중 스기나미 현무관의 계보는 대한합기도회에서 강사를 청하여 국내에도 들어왔으며 지금은 대한합기도회의 본부 도장인 신촌 오승도장에서 6대 관장으로부터 북진일도류 현무관 한국지부의 관리를 부탁받아 행하고 있다. 신촌 오승도장에서는 6단의 한국인 사범이 북진일도류를 교습하고 있다. 수련은 주말에 이루어지며, 관원의 인원수는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6 북진일도류를 쓰는 가상 캐릭터

  1. 성명은 치바 슈사쿠, 자(字)는 나리마사(成政), 호는 도류(屠龍), 아명은 오토마츠(於寅松), 초명은 칸(観). 슈사쿠는 북진일도류를 개파하며 고친 이름.
  2. 오슈 치바씨(奥州千葉氏)의 시조인 치바 치바노스케 츠네타네(千葉千葉介常胤)의 가전 무술이라고 한다.
  3. 오노파 일도류 4대 종가 오노 지로우에몬 타다카즈(小野次郎右衛門忠一)의 제자 나카니시 츄타 타네사다(中西忠太子定)가 에도에 일도류 나카니시도장(一刀流 中西道場)을 연 것을 시초로 하는 일도류 계파. 단, 쇼와 시대까지도 해당 유파에서는 스스로 '오노파 일도류' 또는 '오노파 일도류 나카니시파'라고 불렀다. 나카니시파 일도류는 그 후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역시 정확하게는 해당 유파에서 '일도류 나카니시파'로 칭하고 있다. 후쿠로시나이(袋竹刀)가 아닌 현재 사용되는 죽도는 이 나카니시파 일도류 3대 종가 나카니시 츠구히로가 개발한 것이다.
  4. 본래 이와테현 리쿠젠타카다시 출생설과 미야기현 쿠리하라시 출생설의 2설이 있었으나, 쿠리하라시의 경우 관광 진흥 목적으로 기록을 날조한 것이 담당 공무원의 폭로로 밝혀졌으며, 이후 치바가 3형제의 자필 편지 중 게센누마를 고향으로 언급하는 편지가 발견되었다.
  5. 아사리 요시노부는 본래 마츠도의 빈농 출신이면서도 3대 종가인 나카니시 츄타 츠구히로(中西忠太子啓)의 눈에 띄어 문하생으로 입문했기 때문에, 신분이 낮은 자신을 발탁해준 나카니시파를 등질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6. 단 오노파일도류 계열이 아닌 이토파일도류(伊藤派一刀流) 계열
  7. 합리성은 일도류 계열의 유파가 다른 유파와 차이를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이다. 신토류는 말 그대로 신토에 기반을 두었고, 카게류는 불교의 요소가 섞여 있다.
  8. 초목록(初目録), 중목록면허(中目録免許), 대목록개전(大目録皆伝).
  9. 중단으로 칼을 들고 칼끝으로 상대의 눈을 겨누는 자세. 현대 검도의 기본 자세.
  10. 세키레이노오(鶺鴒の尾). 칼끝을 할미새 꼬리처럼 끊임없이 가볍게 떨어서 어느 순간에 칼이 나가는지 눈치챌 수 없게 하고, 어느 순간에라도 즉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기법. 현대의 검도 대회에서 칼끝을 서로 가볍게 맞대고 가늘게 흔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11. 경시청류나 검도본은 여러 유파의 검객들이 모여서 만들었지만 실질적인 검도의 훈련과정인 죽도격검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쳤다.
  12. 치바 슈사쿠의 가전 무술인 북진몽상류에서 갖고 왔다고 한다.
  13. 사카모토 료마는 목록 증서가 남아 있지만, 그 목록 증서는 나기나타(長刀) 목록이다. 검술 목록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증서를 찾을 수 없다.
  14. 한국에는 주로 오케초로 알려져 있는데 동일한 한자의 잘못된 음역이다. '료마가 간다' 한국어 번역판에서 오역한 것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15. 치바 사다키치는 에도 오케마치에 북진일도류의 도장을 세우고 제자들을 육성했는데, 세간에서는 치바 슈사쿠의 오타마가이케 현무관을 대치바(大千葉), 사다키치의 오케마치 현무관을 소치바(小千葉)라고 불렀다. 기술적으로는 소치바가 대치바를 능가한다는 평도 있을 정도였다.
  16. 현재 전일본검도연맹 소속의 도장으로, 일본 내에서 검도로 유명한 도장이다.
  17. 본래 타치 43본 중 26본까지 전하고 있었으나, 나카니시파 일도류의 협력을 얻어 43본의 복원을 완료했다. 그 외에 거합으로 유명한 타미야류(田宮流)의 계파인 신타미야류(新田宮流)를 함께 전하고 있다.
  18. 치바 슈사쿠의 3남. 장남 기소타로(奇蘇太郎)는 요절, 차남 에이지로(栄次郎)는 슈사쿠 생전에 분가하여 미치사부로가 북진일도류를 계승하였다.
  19. 1886년에 도쿄에서 달성관(至誠館)을 열었다.
  20. 나중에 지역 유지였던 노다 가문의 딸과 결혼하면서 동시에 양자로 들어가 성을 노다로 바꾸었다.
  21. 오타루 중학교 검도 교사를 거쳐 1971년(쇼와 46년)부터 북진관 치바 도장의 검도 사범으로 지내다 1988년(쇼와 63년)에 사망했다.
  22. 에도 막부 말기~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며 검선일여를 이룬 유명한 검객이다. 일도정전무도류(一刀正傳無刀流)의 개조이다.
  23. 치바 슈사쿠의 제자로 에도 막부 말기의 무사이자 검객이며 막부의 군인이다.
  24. 나카니시파 일도류의 4대 종가인 나카니시 츄베에 사네마사(中西忠兵衛子正)가 고안한 형(形)으로, 나카니시파 일도류 출신의 검호이자 천진일도류(天真一刀流)의 류조인 데라다 무네아리(寺田宗有)가 치바 슈사쿠에게 전함.
  25. 또한 쇼와 시대의 검호 다카노 사사부로(高野佐三郎)가 이 오행지형을 간략화하여 도쿄 고등사범학교에서 가르치는 동경고사오행지형(東京高師五行之形)을 만든 사실도 확인되었다. 그 외에는 발도술을 전하고 있으며 나기나타도 교습하는데, 북진일도류의 나기나타는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26. 사실 일본에는 고무도와 관련해서 협회나 진흥회 등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거기에 일본 고무도 협회는 국가공인이 아니라 사단법인이기에 입지나 정통성에 관해서는 애매하며, 협회에 등록된 유파의 종가 중에, 종가 계보로 논란이 되는 유파도 있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27. 엄밀히 말해서 위에 서술한대로 직계는 끊긴 상태이고 어느 쪽도 진짜 종가라고 보기는 힘들다. 양쪽 다 역사적으로 북진일도류가 계승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기술의 전승 부분에서 미토 동무관은 형(形), 오타루 현무관은 죽도 검술이 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