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서에서 "토문강"(기표, 표현)은 "송화강의 지류"(기의, 개념)를 지칭하는 말과 "두만강"(기의, 개념)을 지칭하는 말이 섞여 있습니다.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1 명나라 시절 인식한 송화강의 한 지류
명대의 사서인 요동지는 두만강과 별개로 토문강을 인식하고 있다.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도 두만강의 북쪽을 토문강이라 설명한다. 명대에선 송화강의 한 지류 = 토문강 이었다.
다만 세종때의 다른 기록에는 두만강의 하류를 토문이라고 부르고, 상류는 토문이라고는 불리지 않고 다른이름으로 불린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2 청나라 시절 두만강을 가리키는 단어
2.1 당시 조선의 인식
청 이후부턴 토문강은 두만강의 근원 혹은 두만강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40책 440면【분류】 *과학-지학(地學) / *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5월 23일(을사) 1번째기사
2.2 백두산 정계비 논쟁
조선 숙종 때, 몇몇 조선인들이 백두산 일대의 무인지역에 넘어가 살던 것이 청과 조선 양국간의 문제가 되었다. 이에 청과 조선은 관리를 파견해 두 나라의 국경을 확실하게 정하기로 했다.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6월 9일(신유) 3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백두산 정계의 일에 태만한 접반사 박권 등을 파직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장령 구만리(具萬里)이다.】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새로 아뢰기를,“저 사람들의 백두산 행차에 사명(使命)을 맡은 신하가 진실로 마땅히 함께 가야 하는데도,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는 대신 편비(偏裨)를 보내고 모두 물러나 앉아 몸이 쇠약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백두산의 길이 비록 험난하다고 하지만 차원(差員) 이하가 모두 통행(通行)했으니, 접반사와 함경 감사만 유독 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경계(境界)를 정하는 막중한 일에 다만 1장(張)의 수본(手本)으로 상문(上聞)하였을 뿐, 물의 근원을 다투어 논할 즈음에는 이미 목격(目擊)하지도 않고 단지 ‘예예’하고 답하기만 하였으니, 사명을 맡긴 뜻이 어찌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청컨대 박권과 이선부를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은 비국(備局)에서 강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서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는데도, 이미 직접 살피지 않고 다만 장교(將校)의 거짓 보고에 빙거(憑據)하여 흐리멍덩하게 치계(馳啓)하였으니, 높은 체하여 편안함을 도모하는 버릇이 이미 지극히 해괴합니다. 심지어는 장교배(將校輩)가 그릇 전한 말로 적당히 꾸며 상문(上聞)하였으니, 부지런하지 않고 직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이보다도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0책 442면【분류】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과학-지학(地學)
두 나라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두만강이 두 나라의 국경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측 대표로 목극등을 따라간 박권 등은, 실제로는 백두산에 오르지 않고 부하들만 딸려보냈다. 조선측 대표들은 농땡이 쳤다.그 때도 공무원들은 복지부동 그래서 결국 청나라 대표 목극등은, 어느 물길이 어느 물길이니 경계를 이렇게 정한다 운운했다. 그런데 목극등은 물의 지류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고 저게 두만강이겠거니 하고 대충 눈여김만 하고 비석을 세웠다.
접반사 박권이 치계하기를,“총관(목극등)이 백산(백두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로 삼았으며,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의 뜻이다. 도신과 빈신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 숙종실록 51권, 38년(1712) 5월 23일 1번째 기사
즉 목극등은 '토문강 = 두만강'으로 파악하고, 압록강 - 두만강 선을 국경선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조선 정부에서도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조선에서 국경선 푯말을 박던 중, 목극동이 본 토문강은 두만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점점 내륙 동북쪽으로 흘러가는 다른 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당황해 논의가 벌어졌다.
이때 함경 감사 이선부가 백두산에 푯말 세우는 역사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하였다. 겸문학 홍치중이 일찍이 북평사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 “신이 북관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 (중략) …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 숙종실록 52권, 38년(1712) 12월 7일(병진) 3번째 기사 |
즉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 =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과 달리,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어 두만강의 원류와 다른 물이었다. 근데 목극등이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로 해서 길을 갔기 때문에 마치 두 지류가 같은 지류인 양 취급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정계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조선은 경계를 알리는 푯말을 세웠는데, 재확인 차원에서 이번에는 하류까지 내려가는 답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신이 여러 차사원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 허양과 나난 만호 박도상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목극등)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 (중략) …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 의정부)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유가 연석에서 아뢰기를, “목차(목극등)가 정한 수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같은 기사 |
다시 말해 목극등이 잘못 잡은 물길이 멀리서 두만강으로 합해지는 것도 아니고 두만강과는 전혀 상관 없이 저 멀리 만주인들의 땅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송화강 상류 별개의 토문강이라고 한국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강이 이 강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서는 분명히 이 상황을 국경선이 잘못 정해진 상황으로 파악하고, 청과의 외교 마찰도 우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확인한 후 취조당하는 사람이건 조선 조정이건 일관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목극등이 정한 (두만강이 아닌) 수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의 수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지류 중 어느 것을 국경으로 정해야 하나' 정도만이 추가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이는 파견 이전 강희제가 국경에 대해 남긴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백산(백두산)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토문강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나와 동남 방향으로 바다로 들어가, 토문강의 서남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은 중국에 속하니, 역시 강으로 경계를 삼고 있다. 단지, 압록강과 토문강 등 두 강 사이 지방은 다 알 수 없다." - 청사고 526권 속국 1 |
사료에 따르면 이미 국경이 압록강 ~ 토문강을 경계로 하고 있음은 일찍이 알려져 있던 바이지만, 그 사이 구간이 명확하지 않아 재조사를 명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청나라는 훈춘 지역을 실효지배하고 있었고, 조선에서 출간된 지도에서는 토문강(또는 분계강)이 끝내 두만강에 합류하는 강으로 그린 지도가 많이 있다.
이후 조선에서는 이 강이 수십리 이상 가다보면 결국에 다시 동쪽으로 꺾여 두만강에 합류하는줄 알고 이렇게 정한 것 아니냐는 해석(실제로는 송화강 지류로 밝혀지게 될 강이 두만강 하류와 함께 국경으로 유효하다는 주장), 단순한 착오를 한 것 아니냐는 키배가 벌어진다. 당시 조선에서 국경에 대한 주장은 토문강(분계강)+ 두만강 하류가 국경이라는 설과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설로 나뉘었다. 대표적으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보고 있다.
청나라는 두만강 상류 북안의 지역은 실효지배를 하지 않았다.
당시 청나라가 불법 침입 한 조선인들을 강제 송환했다는 기록은 토문이라는데 이견이 없던 두만강 하류 지역에 한정된다.
신경준의 연구에서는 송화강 지류도 토문으로 불리고, 두만강 하류도 토문으로 불린다고 나온다.
2.3 고종대 이후 대한민국의 주장
고종대부터 우리나라에선 백두산정계비와 연결된 강으로 목극등이 정한 수계인 1번의 뜻을 국경으로 주장했다. 조선에서는 당시의 민족 분포선과 압록과 토문의 분수령에 세워졌다는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에 따라 토문강-해란강-두만강 선을 국경으로 주장했다. 청나라의 쇠퇴이후 토문강-송화강 선을 국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조중변계조약 의정서 사본에는 흑석구 옆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두산백과에서 이렇게 두만강은 토문으로 불리지 않는다고 설명하기도 하나 송화강의 지류가 백두산에서 나온것은 맞으나.분명히 두만강 하류는 토문으로 불린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