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키와 장

トキワ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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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내 청춘의 토키와 장'.

1 개요

일본 도쿄 토시마구 시나마치에 있었던 다가구 주택. 1952년 12월 6일 완공되었고, 1982년 11월 19일 노후화로 완공 30주년을 일주일 앞두고 철거되었다.
일본 만화의 양산박이라는 별명으로 불러진다.

2 상세

1953년 초, 만화 잡지사인 학동사의 주선하에 데즈카 오사무가 입주한 것을 시작으로 다수의 만화가들이 이곳에 입주했다. 여러 만화가들이 한 곳에 모여 지내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기량을 갈고 닦으며 거장으로 성장했다는 점, 무엇보다 일본 만화를 문화의 반열에 올린 현장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일본 문화사의 한 장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 지금도 일본 만화의 성지라 일컬어진다. 오치아이미나미나가사키역이나 시나마치역에서 가깝다.

토키와 장의 만화가들이 사실상 현대 일본 만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토키와 장을 모티브로 한 다가구 주택도 종종 여러 만화 등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 등장했던 토키노와 장 등. 물론 본격적으로 다가구 주택을 무대로 한 작품인 메종일각의 영향을 받은 사례 또한 적잖겠지만...

토키와 장은 해체되었으나, 신인 만화가를 대상으로 한 거주 및 창작 지원 프로젝트인 토키와장 프로젝트가 운영되고 있고, 토시마 구 또한 신인 개그 만화가를 대상으로 한 거주 지원을 목적으로 한 연립주택인 시운장을 토키와 장 인근에 운영중이다.

3 역사

1950년부터 학동사가 발간하는 월간 소년 잡지 <만화 소년>에 정글대제를 연재하기 시작한 데즈카 오사무는 이 작품으로 인기 만화가가 되어, 여러 편의 연재 의뢰를 받게 되고 1952년에 토쿄로 상경해서 요츠야 근처의 어느 야채가게에서 하숙하고 있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편집자들이 드나든 탓에 야채가게 주인에게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학동사의 직원인 카토 켄의 차남 히로야스가 살던 신축 아파트에 입주할 것을 제안받는다. 그것이 바로 토키와 장. 학동사 입장에서는 바쁜 데즈카 오사무를 관리하기 편하다는 속셈이 있었다.

이후 토키와 장은 많을 땐 7~8명의 만화가들이 숙식하고, 그들의 동료 만화가들 또한 이 곳을 자주 드나들어 토키와 장은 만화 장(マンガ荘)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여기에는 데즈카 다음으로 입주한 만화가인 테라다 히로오의 의도도 있었는데, 젊은 신인들이 서로 격려를 주고 받으며 성장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편집자 측에서도, 마감에 못 맞출 것 같으면 다른 방에서 바로 한가한 만화가를 끌고 와서 마감을 도울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이 곳의 만화가들은 테라다 히로오를 리더로 하여 신만화당(新漫画党)이라는 자체적인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정당은 아니다 1차는 54년~55년에 걸쳐서 존재했으며 만화에 대해 논하거나 합작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2차는 1차의 해체 직후 결성되었으며, 기관지를 만들거나 나카노에 사무소를 두는 등 좀 더 본격적이었던 모양. 공수도 바보 일대의 작화를 맡기도 했던 츠노다 지로가 만화 모임이라는 말을 듣고 가입했더니 회의랍시고 잡담 밖에 안 해서 격노하여 신만화당 앞으로 붓으로 쓴 항의 서한을 보냈고, 후지코 F. 후지오가 츠노다의 애독서였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인용한 편지를 보내 달랬다는 일화도 있다. 2차 신만화당은 적어도 3년 이상 존속했지만 나중에는 역시 흐지부지된 모양. 후지코 후지오 A에 의하면 해산한 기억은 없으니 아직 존속중이라나.

이후 많은 유명 만화가들이 이 곳에서 숙식하며 지냈다는 사실이 유명해져, 토키와 장은 일종의 성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후지코 후지오 Ⓐ의 자전적 만화인 '만화의 길'(まんが道)에서 토키와 장이 자세히 소개되었던 점, 토키와 장에서 지낸 만화가들이 모여 이 곳을 주제로 그린 만화가 이후 '토키와 장 이야기'(トキワ荘物語)라는 이름의 엔솔로지 만화로 출간된 점, 후지 TV에서 애니메이션 '우리 만화가 토키와 장 이야기'(ぼくらマンガ家 トキワ荘物語)[1]가, NHK에서 다큐멘터리 '내 청춘의 토키와 장'(わが青春のトキワ荘)[2]이 방영된 점 등등이 있다.

많은 만화가들이 이 곳을 거쳐갔지만, 유명해진 주민 중 상당수가 이 곳에서 그렇게 오래 지내진 않았다. 거의 완공 직후에 입주하다시피 한 데즈카 오사무의 경우 2년을 못 채우고 나갔고, 9개월 만에 나간 주민도 있었다. 뭐가 안 좋은 게 있었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금방 자신만의 거처를 가질 만큼 성공해서 나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다만 모두들 금방 나간 게 아니라, 후지코 후지오의 경우는 7년을 지내다 나갔고, 이시노모리 쇼타로도 5년을 살고 나갔다.

1981년에는 노후화로 인해 해체가 결정되었다. 해체 직전 진행된 NHK의 '내 청춘의 토키와 장' 촬영 중 토키와 장에서 그 곳을 거쳐간 멤버가 모이는 자리를 가졌지만, 그들을 토키와 장으로 처음 불러모았던 테라다 히로오는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1982년 노후화로 해체된 토키와 장은, 곧 개별 화장실과 욕실 등을 갖춘 좀 더 나은 시설의 아파트로 신축되었다. 이 아파트에는 마찬가지로 토키와 장 출신인 아카츠카 후지오가 그린 현판이 달렸다. 그러나 버블 경제의 땅 투기 열풍에 휘말려 해체, 모 출판사의 신관 사옥으로 용도 변경되었다. 2009년 기념비가, 2012년 토키와 장을 본딴 기념물이 설치되었다.

4 거주 경력이 있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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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미즈노 히데코, 요코타 토쿠오, 모리야스 나오야, 스즈키 신이치, 테라타 히로오, 데즈카 오사무, 후지코 후지오 A, 후지코 F 후지오, 아카츠카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데즈카 오사무가 있을때, 학동사의 소개로 맞은 편 방으로 입주. 입주시 만 22살로, 토키와 장 멤버들 가운데는 최연장자로 리더적 존재였다. 토키와 장 멤버들을 불러모아 사실상 토키와 장을 일본 만화의 성지로 만든 장본인. 그도 나름 만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긴 했지만, 1973년 아이들한테는 밝고 건전한 만화를 읽게 해야한다는 평소의 신념으로 당시 유행했던 저속하고 폭력적인 아동만화를 그려달라는 출판사의 요구에 절필을 선언하고 만화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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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타 히로오가 사용했던 방의 재현
데라다 히로오가 권해서 입주, 처음엔 데즈카 오사무가 사용했던 방을 둘이서 썼지만, 나중에 F가 옆방을 빌려서 옮겼다. 데즈카는 그가 사용했던 책상과 물품들을 물려줬고, 가난했던 이 두 사람을 위해 집주인에게 맡기는 보증금과 몇 달치 월세도 미리 치뤄주고 떠났다.
라면 좋아하는 고이케씨의 모델. 나중에는 애니메이터로 활동.
절친이었던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함께 입주. 일거리가 없어 집세를 못내서 1년 동안은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다. 먼저 두각을 드러낸 이시노모리의 작업을 도와주고 식사를 만드는 일을 주로 해서, 주변에서 이시노모리의 '여보'라고 불렸다고 한다. 목욕탕에 갈 돈이 없어서 주방으로 쓰고 있는 곳에서 몸을 씼다가 이시노모리에게 들킨 에피소드가 있다.
  1. 이 애니메이션의 캐릭터 디자인은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직접 맡았다.
  2. 후일 NHK 마츠야마 지국장이 되어 NHK 역사상 첫 여성 지국장이 되는 엔도 케이코가 제작에 참여했다. 왜 만화가도 아닌데 굳이 서술하냐면, 이 사람은 토키와 장 출생으로 어린 시절을 토키와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