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츠카 후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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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塚不二夫(赤塚 藤雄)

1 개요

1935년 9월 14일 ~ 2008년 8월 2일로 구 만주국 러허성 출신의 히키아게샤다.
일본만화가. 홈페이지는 이 곳.

일본 개그 코미디 만화의 전설.

당장 그가 발표한 만화들은 일본 아동 만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후지코 후지오 & 이시노모리 쇼타로 & 요코야마 미츠테루 & 데즈카 오사무, 일본 만화의 폭력성을 증진시킨 나가이 고, 요괴 만화에서 빠질 수 없는 미즈키 시게루 등과 함께 일본 만화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5년, 후지오 프로를 세우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아카츠카 후지오의 아버지는 관동군에 소속된 헌병으로 현지인의 선무 공작 지휘와 동북 항일연군, 팔로군의 항일 게릴라와 대치하는 특무 기관의 요원직을 담당했다. 그는 아카츠카에게 만화를 읽는 걸 금지하거나 젓가락 잡기를 가르치는 등 매우 권위주의적이기도 했지만, 현지 중국인에 대해 평등히 보급물자를 배급해주고 아이들에게도 그들을 차별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등 개념있는 가장이기도 해서, 항일 게릴라한테 아버지가 수천 엔의 현상금이 걸려있었음에도 주민들이 밀고하지 않았으며, 패전 직후 중국인들의 보복으로 옆의 일가가 린치당해 죽는 가운데도 아카츠카의 가족은 화를 피할수 있었다.[1]

종전 직전 아버지는 소련으로 연행되 군사재판을 받아 억류당했으며, 그 여파로 모국의 지원도 없이 남겨진 가족들은 자력으로 1946년 귀향해 어머니의 고향 나라 현으로 이사했다. 이때 여동생 아야코는 디프테리아에 의해 죽었고 동생은 다른 집에 입양되어 전체 형제 수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등 무척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죽은 둘째 딸의 이름을 이은 생후 6개월의 여동생 아야코 또한 모친의 집로 도착한 직후 영양실조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2]

당시 만주국 귀향 경력으로 인해 일가와 함께 많은 집단따돌림을 겪은 바 있었다. 초등학교엔 5학년으로 편입되 입학하였고, 대본소 가게에서 종종 만화를 빌려 읽기도 했는데 데즈카 오사무의 "로스트 월드"를 읽고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잠시동안 데즈카풍 만화를 그리는데 노력한 결과 1947년 "다이아몬드 섬"이란 SF 만화를 그려 오사카에서 출판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얼마 못 지난 1949년,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왔으나, 시베리아에서의 4년 억류 생활 및 패전의 충격으로 몸 동작이 더뎌지거나 부엌을 자주 망치는 후유증을 나타내며 이전관 무척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버지가 살던 고향인 니가타 현으로 이사하여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의 재정 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영화의 간판을 제작하는 한 간판 가게에 취직했다.[3]

이 무렵 「만화 소년」에 투고를 시작해 데즈카 오사무가 심사위원으로 있는 걸 목격하고 자신의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후에 아카츠카 자신이 (본적지가 니가타 현으로 기재되어서였는지) 종종 니가타 현 출신으로 불린 바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집단괴롭힘을 겪은건 다름없었는지 아카츠카 후지오는 '니가타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나의 고향은 만주였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53년 도쿄의 한 화학 제품 공장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만화를 계속 투고했으며, 그 만화가 이시노모리 쇼타로(당시는 이시모리 쇼타로.)의 눈에 띄어 이시노모리가 주재하는 동일본 만화 연구회의 육필 회람 잡지 먹물 한 방울의 동인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이 동인의 도쿄 지부에 하세 쿠니오와 요코타 토쿠오가 있었고, 프로 만화가인 츠게 요시하루[4]가 같이 아카츠카의 만화에 관심을 가져 자주 놀러오곤 했었다고 한다. 잠시 휴간할 때 아카츠카 후지오는 츠게 요시하루에게 프로로 전향할 것을 권유받았으며, 그의 중재로 한 출판사와 계약을 체결해 1956년 '푹풍를 넘어서'로 만화계에 데뷔한다.

2.2 만화계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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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여러 만화가들과 찍은 흑백 단체사진.[5]

공식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쿄로 상경한 절친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토키와 장으로 옮겨 그와 함께살면서 '제2차 신만화당' 결성에 참여한다. 나중엔 어머니도 상경해서 잠시 동거하였으며, 어머니는 그곳에 살던 미즈노 히데코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 결혼할 것을 추천하기도 했었다.[6] 초창기엔 순정만화의 단행본을 3~4달에 1권씩 그리던 대본소 만화가로 활동했으며, 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만화가로 성공하고 있는데도 자신만은 팔리지 않는 것을 비관해 만화가를 그만두고 신주쿠 구의 한 캬바레 점원이 되려 생각한 바 있었으나, 후지코 후지오 A는 일단 테라다 히로오에게 상담해보라고 권유해 문의하기로 했다. 테라다 히로오는 이 무렵 토키와장에 리더이자 큰 형님같은 존재였으며, 그는 아카츠카에게 "잠깐만. 이 돈이 있는 동안은 여기서 있어라. 이것이 떨어지고나서도 만화가로 팔리지 않는다면 카바레라든지 어디든지 가면 된다"고 월세가 밀려 토키와 장에서 쫓겨나야 하는 사정을 알고 현금 5만엔을 전달해주었고, 이는 당시 일본의 국가 공무원 초임인 1만 엔 미만보다 엄청난 수치의 현금에 해당했다.

1958년작가 인원이 부족했던 소녀 클럽 증간호에서 1작가 1작품의 원칙을 지키며 기존 작가진을 보완하기 위해 이시노모리 쇼타로와의 합작을 기획해 이즈미 아스카 명의로 작품을 발표했으며,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미즈노 히데코의 공동 필명 'U. 마이아'로 여러 작품들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치바 테츠야가 원고를 펑크내서, 토키와 장으로 마감이 이틀 후인 긴급 원고를 그려줄 만화가를 찾아 온 월간 잡지 '만화왕'의 편집자 카베무라 타이조의 부탁으로, 그 동안 쌓아둔 아이디어를 살려 건방진 꼬마가 주인공인 '나마쨩'이라는 개그 단편을 그려주었는데, 잡지를 펼쳐보니 '신 연재작'이라고 실려 그것으로 인생 처음으로 월간 잡지에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마쨩'은 호평을 얻고, 연이어 개그 만화 단편 의뢰를 받게되고, 개그 만화가로써의 재능을 각성한다.

월간지 3개의 연재로 바빠지게 되면서 편집자의 소개로 어시스턴트로 고용한 토모코와 1년 간의 연애, 그녀로부터의 청원을 받아들여 결혼하기 위해 1961년 토키와 장을 나왔다. 결혼한 이듬해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오소마츠 군, 리본에서 비밀의 앗코짱을 각각 연재하며 인기 만화가의 대열에 합류한다. 1963년토키와 장 소속 만화가들이 설립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제로에 참가해 후지코 후지오가 연재하던 요괴 Q타로에 배경을 그리고, 자신의 캐릭터들을 특별출연시키며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 1965년엔 하세 쿠니오, 후루야 미츠토시, 요코야마 타카오, 타카이 켄이치 등과 도쿄도 신주쿠 구에 후지오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1967년, 주간 소년 매거진(코단샤) 에서 천재 바카본, 주간 소년 선데이에서 맹렬 아타로를 발표하면서 천재 개그 작가로 '시대의 총아'가 된다.[7] 하지만 1970년 3월 아카츠카의 모친이 불의의 가스 폭발 사고로 입원해 퇴원하는 도중 지주막하 출혈로 재입원하였으며, 작가가 열심히 간호했음에도 끝내 뇌사 상태에 빠져 그해 8월 20일 세상을 떠났고 아내완 서로 별거를 하게 되었다.

1971년 5월 아카츠카 후지오는 미국에 거주하던 모리타 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세 쿠니오, 타키자와 솔루션 일행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2달 동안 머물면서 임시 마감이 다가올 도중 소년 선데이의 담당 편집자 다케이 토시키 앞으로 자유의 여신상에서 찍은 기념 사진을 보냈다. 1972년, 후지오 프로에 재정적 여유가 작용한 것을 계기로 아카츠카 후지오 책임 편집 제목의 잡지 '만화 No.1'을 창간하기도 했다(원래 이 이름은 후지오 프로 팬클럽 회보 제목이었다.). 하지만 많은 작업으로 바빴던 아카츠카는 편집 작업에 종사하는 것이 불가능해 실질적으론 하세 쿠니오가 편집장을 맡았고, 얼마 못가 1호당 '250만엔'이라는 적자를 내어 1973년 6호로 휴간한다.

같은해 11월엔 3년간의 별거 생활을 거친 아내와 이혼하였으며, 이듬해 '개그 게릴라' 연재의 일환으로 "야마다 이치로"로 필명을 바꾸고 연재중인 만화들을 모두 같은 이름으로 집필하기도 했으나 광고적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해 3개월 만에 본 필명으로 복원하였다. 한편 이해 세무서가 진행한 조사에서 장기간 세금을 체납했단 사실이 밝혀졌는데, 드러난 연체금만 6천만엔이나 되었다. 원인은 후지오 프로덕션 회계 담당자의 횡령으로 2억엔의 피해액이 집계되었다. 인감 도장까지 맡길 정도로 신뢰한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음이 드러났지만, 아카츠카는 그 회계 담당자가 체포되었음에도 그의 미래를 생각해 고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피해액 중 후루야 미츠토시와 芳谷 케이지 등 일부 어시스턴트들의 수영장 비용 관련 문제가 밝혀져 이들은 후지오 프로덕션을 퇴사하였다.

2.3 슬럼프와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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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기인 1975년엔 주간지 다섯 개와 월간지 일곱 개에 동시로 만화를 연재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으며, 한편으론 타모리 등의 연예 관계자들과 교류하면서 스테이지 그룹 활동을 필두로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해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 제작에도 참여해 포르노 영화 "赤塚不二夫のギャグ・ポルノ 気分を出してもう一度", 코미디 영화 '下落合焼とりムービー' 등 여러 편에서 원안, 각본 등으로 활동하였다. 1979년 5월 아카츠카의 아버지는 췌장암의 전이로 인해 세상을 떠났으며, 몇년 후 만화에 보냈던 에너지를 무대에서 발산했단 발언으로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음을 인터뷰에서 밝혔다.

1987년엔 아카츠카를 지원 중이던 사진 작가 国玉 아키오의 전 어시스턴트이자 스타일리스트인 스즈키 마치코와 결혼했으며, 결혼식 기자회견엔 전처와 장녀인 아카츠카 리에코도 참여했다. 같은해 TV 도쿄의 まんがのひろ 시간대에 원조 천재 바카본이 재방송되며 저연령층 시청자한테 호응을 얻자 이듬해부터 2년여간 오소마츠 군, 비밀의 아코짱, 천재 바카본[8], 맹렬 아타로가 속속 리메이크 애니메이션화되었고, 신판 코믹스를 연재함으로써 재활동하기도 했지만 연재를 중지하면서부터 더욱 음주량이 증가하였는데 이는 아카츠카 후지오가 몇년 전부터 알코올 중독에 걸렸단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치료를 위해 입원과 퇴원을 여러 번 반복했지만 회복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고, 1992년엔 오랜 세월 동안 아카츠카와 인연을 쌓은 하세 쿠니오가 후지오 프로덕션에서 퇴사하였다.

이후 말년엔 수많은 질병에 시달렸으며 1997년 12월엔 를 토하고 긴급 입원해 검사 결과 식도암 진단을 받아 소장의 일부를 식도 대용으로 이식하는 향후 수술 및 치료 내용을 알린 의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아카츠카 후지오는 퇴원을 강행했다. 그후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면서 종양은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11월 상태가 악화되어 재입원했으며, 한달 뒤 10시간의 수술을 거쳐 몇달간의 장기 입원을 진행하면서 체중이 13kg나 줄어들었고, 담배 또한 더 이상 즐기지 않게 되었다. 2000년 8월엔 집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몇시간 후 언어 발음이 부자연스럽게 변해 입원하였고, 급성 경막 하혈종 판정을 받았다. 얼마 뒤 오른손에 마비 증세가 일어나 응급 수술을 받았고, 같은해 점자 그림책 "赤塚不二夫のさわる絵本 よーいどん!"를 발표했다.[9] 이듬해 2월 8일, 쾌유를 기념한 신년회가 도쿄 내의 한 호텔에서 열렸는데, 당초 가족만이 진행할 예정이던 신년회에 동료 만화가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큰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2002년 4월엔 입원 도중 몸이 굳어 움직일수 없게 된데 이어 뇌출혈 진단을 받고 5시간의 수술을 받았으며, 이후 일체의 창작 활동을 중단하였다. 이해 점자 그림책 "赤塚不二夫のさわる絵本“ニャロメをさがせ!"이 출간됐으며, 소학관에선 DVD 전집 "아카츠카 후지오 만화 대전집 DVD-BOX"를 발매하였다. 2004년부턴 의식 불명에 빠져 식물 인간이 되어버렸고, 4년이 지난 2008년 8월 2일 오후 4시 55분 폐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10]. 사망 소식은 스포츠 신문의 1면에 대서 특필로 실렸고 기타 일반지에서도 1면에 게재하였으며, 각 지역민방과 NHK에서 톱 뉴스로 다루는 등 여러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장례식장에서 타모리는 직접 종이에 적은 조제문을 읽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감사의 말을 보냈다.[11] 딸 아카츠카 리에코에게 타모리는 성실하게 격려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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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는 생전 토키와 장에서 인연을 쌓은 후지코 후지오 A가 위원장을 맡아, 8월 7일 고별식이 도쿄도 나카노 구의 한 에서 진행되었다. 상주는 장녀인 아카츠카 리에코(赤塚りえ子)가 맡았고, 고별식에는 만화, 출판, 예능 관계자들과 생전의 그를 기억했던 등 약 1200명이 참석[12]했으며, 마츠모토 레이지, 나가이 고, 치바 테츠야 및 원로 작곡가 고바야시 아세이 등이 조문객으로 참여하였다.#

조서는 아비코 모토오[13], 타카이 켄이치로(高井研一郎), 후루야 미즈토시(古谷三敏), 키타미 겐이치(北見けんいち)[14] 등이 읽어내렸다. 출관식은 천재 바카본 애니메이션 제1작의 주제가가 장송곡으로 흐르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사체는 본인의 자택에 가까웠던 신쥬쿠 구의 오치아이 장례식장에서 화장되었다. 법명은 不二院釋漫雄[15].

3 트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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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 애묘인이었다. 그가 길렀던 애완 고양이 키쿠치요는 죽은 척이나 재주를 잘 부려 TV CM에 출연해 아카츠카의 인지도를 알리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이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출연한 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한 주인공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월간 코로코로 코믹에 키쿠치요를 주역으로 설정한 '하나 키쿠치요'를 그려낸 바 있었고 1997년 세상을 떠나자 무척 슬퍼하였다. 자신이 창작한 고양이 캐릭터 냐로메를 주역으로 설정한 학습만화들을 십여 편이나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학습만화들은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해적판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 영화에 무척 흥미를 가져, 하타보의 움직임을 버스터 키튼에서 따왔다든지 그에 대한 패러디 영화를 만든 적이 있었다고 밝혔으며, 홈 라이브러리에는 당시로서는 비싼 희귀한 대화면 모니터와 수천 개의 영화 비디오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린 시절의 꿈은 찰리 채플린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 바카본 파파는 그가 제일로 아끼는 캐릭터로, 그 이유는 "아무리 술에 취해 있어도 바카본 아빠의 얼굴만은 제대로 그릴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16] 그의 모티브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했으며, 작가 본인이 바카본 파파의 코스프레를 하는 사례가 있었다.
  • 비밀의 아코짱 주인공인 카가미 아츠코와 오소마츠 군의 토토코의 디자인이 비슷한 것에 대해 1989년에 발행된 만화책 후기에서 작가 자신이 그럴리 없다고 분노한 기색을 드러내며 반박한 바 있다.
  • 천재 바카본에 등장하는 이것으로 좋다!(これでいいのだ!)란 대사는 아카츠카 후지오 자신이 어렸을 때 머물렀던 만주의 중국인들이 자주 활용한 메이화즈(没法子)를 일본어로 바꾸어 유래한 표현이라고 한다.
  • 1974년을 기점으로, 주간 소년 점프는 개그 만화가로서 일본 만화에 기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카츠카상"의 수상을 시작하였다.
  •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TV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영화등의 음향 효과와 선곡을 담당한 동명이인인 '아카츠카 후지오'와는 '라이브 인 하토야'에서도 음향 효과를 맡게 해주는등 서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 야마시타 료스케 등과의 만났을 땐 그가 연주하던 재즈는 전혀 듣지 않았고 대중가요에 흥미를 보였으며, 배우 미소라 히바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의 딸과 그의 딸, 데즈카 오사무의 딸이 나눈 대화들을 정리한 대담집 '게게게의 딸, 레레레의 딸, 라라라의 딸'에서 그가 재즈를 듣지 않은 이유는 수수께끼라고 기록되었지만 이것은 오소마츠 군에서 재즈를 불쾌하게 사용한 개그를 말하는 장면을 봤다는 한 재즈 평론가( 그는 야마시타 료스케의 스승이었다고 한다.)가 후지오 프로에 방문한 것을 계기로 아카츠카 후지오와 야마시타 료스케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 1980년 4월호부터 이듬해 2월호까지 팝콘에서 연재된 캐스터의 수많은 고어 묘사들이 문제가 되어 잡지가 회수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하여 출간된 단행본에도 수록되지 못한 환상의 에피소드가 되어버린다.
  • 2010년에 그의 생일인 9월 14일에 일본 구글 로고에 작가가 그린 작품의 캐릭터들이 등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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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카츠카 후지오의 창작 캐릭터 중 하나인 경찰관의 눈을 잘 살펴보면 서로 이어진 구조임이 드러나는데, 이런 눈동자는 초창기의 미국 애니메이션루니 툰 단편에서 먼저 연출된 적이 있었다.

3.1 정치관

아카츠카 후지오는 2차 대전 패전 후 본국의 만주국 거주 일본인(히키아게샤)들에 대한 방치[17]로 인한 고난들과 이웃 주민들의 집단따돌림을 겪었던 영향으로 인하여 생전 반전주의 성향의 정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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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헌법이다!'의 몇몇 장면.

자기 대표작들에서 대놓고 정치관을 드러낸 만화는 없으나 1970년대 초 일본 공산당의 기관지인 아카하타에서 별도의 몇몇 만화들을 그린 바 있었고,[18] 1982년 와세다 대학 공인 서클인 인물연구회에서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일본이 교과서 문제에서 다른 나라들을 고려하지 않는 외교를 진행하는데 대해 자유민주당에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렇게 되었다고 답했다. 또한 자민당의 문부성 인사 배치로 인한 압력 행사와 방위비 예산 증액, 징병제 찬성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쳤으며, 미국은 무기를 팔아사는 국가이므로 일본에 자연스레 압력을 가할 수밖엔 없고, 따지고 보면 미국의 속국과 다름없으니까 일본은 미국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단 의견을 말한 바 있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전세계가 미국-소련 대립 체제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레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으려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부 관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냉전을 지속하던 미국을 비판하는 의사인 점에서 아카츠카 후지오는 내부적으로 좌파 성향의(확실히 우파 성향은 아니었단 의미) 만화가였던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위 블로그에서 아카츠카 후지오가 일본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당원으로 활동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고, 만화를 연재한다고 그 당의 지지자라는 보장은 없단 견해를 통해 1차적으로 쇼미더머니스럽다고 의심하긴 했으나, 돈을 준다 해도 전혀 의견을 같이하지 않는 정당의 기관지에 만화를 연재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건 사실이란 점을 언급하며 아카츠카 후지오가 아예 좌익이 아니었다고 부정할 순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위 사이트에 쓰여진 글의 작성자는 이런 주장을 보충하는 증거로 2003년 8월[19] 일본 공산당이 개최한 반전주의 전시회에서 야나세 타카시, 치바 테츠야, 모리타 켄지 등과 함께 참석했단[20] 사실과 1983년 출간된 자신의 만화인 '일본국 헌법이다!'[21]에서 일본 정부의 대처와 헌법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밝힌 사실을 블로그에서 덧붙이고 있다.

여담으로 아카츠카 후지오의 작품들 애니에서 종종 욱일기가 있어 우익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지만[22] 일본에선 독일하켄크로이츠처럼 욱일기를 금지시키지 못해[23] 단순히 전통문양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애니메이션과 달리 원작에서는 그런 장면이 없다.[24]

3.2 연예계와의 인연

1967년 TV 프로 '만화 해적 퀴즈'에서 만화가로선 일본에서 이례적인 사회 진행을 쿠로야나기 테츠코와 함께 맡은 것을 계기로 생전 수많은 연예인들과 인연을 쌓았다.[25] 이후 70년대 중기엔 하세 쿠니오, 야마시타 료스케 등을 통해 타모리를 만났으며, 타모리의 재주를 높이 평가해 그를 도쿄로 상경시켜 자신은 사무소에 임시로 거처하고, 타모리를 집에 머물게 해주어 그가 일본의 국민 오와라이로 인정받는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또한 타모리와 타카헤이 테츠로, 타츠우라 다이사쿠 등과 '면백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타카헤이 테츠로가 유리 토오루를 소개해준 걸 계기로 일생동안 그를 아꼈으며, 유리 토오루의 제자였던 타코 하치로가 그의 집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토코로 죠지, 네즈 진파치, 코마츠 마사오, 아사이 진페이, 야마모토 신야, 에모토 아키라, 아키노 요코, 타카미 쿄코, 코지마 미유키 , 나카지마 아오이, 아라시야마 코미츠로, 사카자키 코노스케, 아오시마 유키오, 이나가와 쥰지, 마츠오 타카시, 코니시 료헤이, 미소라 히바리 등등 수많은 연예인들과의 인연을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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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주간 요미우리에서 고 신타로, 하세 쿠니오 등 여러 명과 함께 자칭 '바보스런 일을 성실히 한다'는 이유로 전일본 문제 만족 연구회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1978년에 '아카츠카 후지오와 전일본 만족 문제 연구회'로 명칭을 바꾸고 음반 '라이브 인 하토야'를 발표했다. 1977년 3월 타모리의 첫 LP 완성 기념 캠페인으로 '타모리와 도쿄 보도빌 쇼' 공연에 상연한 쇼 프로그램 '타모리 · 보도빌 위크'를 기획 · 제작한 바 있었다. 같은해 10월 29일엔 타모리와 아카츠카 자신의 연이은 재주를 보여주는 이벤트를 진행하였으나 실적은 적자였으며, 한 출판사가 편집한 서적을 간행하면서 비로소 적자를 메꿨다고 한다.

1981년엔 시마모리 마스미와 미야무라 유코가 공동으로 당시 여대생들의 속마음을 고백해, 여대생 붐의 선구로 작용한 'ANO · ANO'의 패러디하여 여대생이 속마음을 고백한 것에 대해 아저씨가 답하는 도서 'SONO · SONO'를 면백 그룹 명의로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6년엔 '소노소노'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프로그램 'Oh! SONO · SONO'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위의 이벤트들을 제외하고 작가가 프로듀스하거나 출연한 이벤트는 여러 개가 있었다.

4 특징

데뷔 초창기인 1950년대엔 소녀만화를 주로 그렸으며, 그림체는 데즈카 오사무와 닮은 부분이 많았다. 지금의 장르에 해당한 만화들을 그리기 시작한 연도는 1960년대부터로, 대체적으론 넌센스 장르의 나사빠진 부분이 많은 캐릭터들이 나오는 개그 만화들이 상당했으나 비밀의 아코짱과 맹렬 아타로처럼 내적으로 진지하거나 여성 장르의 만화도 여러 편이나 만들었다.[26]


데뷔작 '폭풍을 넘어서'의 연재본(추정) 표지.

대표작인 오소마츠 군, 맹렬 아타로, 비밀의 아코짱, 천재 바카본의 캐릭터들이 각각 작품에서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며, 작품 내에서 설정붕괴가 일어난 사례들도 있다. 원작에선 캐릭터들이 살해를 당하거나 사고를 당해 죽는 장면들과 폭력적, 선정적인 장면들도 꽤 있으나[27] 애니메이션에선 심의 규제를 감안해 이 장면들을 대폭 삭제시키거나 설정을 완화시킨 사례가 많다.[28]

작중 세월이 지나 캐릭터가 언급하는 후일담이나 세부 설정 등을 보면 블랙 코미디적인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은 이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29]

동시대에 활동한 동료 만화가들과 달리 해외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개그 성향이 다소 내수용이기도 했다는게 큰 요인일듯.[30] 그리고 종종 오카마 캐릭터가 출연하면서 이와 관련된 섹드립이 연출되는 에피소드들도 있는데, 이 경우로 대표적 작품인 천재 바카본, 오소마츠 군에서 관련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5 수상경력

  • 1964년 오소마츠 군 제10회 소학관 만화상.
  • 1972년 천재 바카본 제18회 문예춘추 만화상.
  • 1997년 제26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대신상.
  • 1998년 자수포장.

6 작품 목록

  • 오소마츠 군[31]
  • 맹렬 아타로
  • 비밀의 앗코짱
  • 천재 바카본
  • 렛쯔라곤
  • 폭풍을 넘어서 - 데뷔작
  • 나마짱
  • 홈런 교실[32]
  • 미츠게짱
  • 나아가라! 켄타로
  • 오타스케 군
  • 메챠구챠 No.1
  • 스릴러 교수
  • 괴도 1/2 면상
  • 아카츠카 후지오의 히게히게 이야기
  • 바람의 카랏페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개그 게릴라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가요 개그 극장
  • 냐로메의 연구실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개그 랜드
  • 아카츠카 후지오의 개그 포토 랜드
  • 아카츠카 후지오의 애니멀 랜드
  • 이것으로 좋다 - 에세이 자서전, 1993년 NHK 출판에서 출간.

그외 작품들은 위키피디아 항목 참조. 이것들도 작가의 작품 중 연재작의 일부에 불과하다.

  1. 자서전 '이것으로 좋다!'에서의 내용.
  2. 이때 그의 어머니는 우는 기력도 없었고 작가는 "가슴이 저미는 듯했다"고.
  3. 이때 직업 관계상 모든 영화를 감상할수 있어서 버스터 키튼찰리 채플린의 희극을 보고 감동했고 한다.
  4. 일본의 1세대 청년만화 만화가로 1968년 발표한 '나사식'이 유명하다.
  5. 멤버는 나가이 고, 츠노다 지로, 미즈키 시게루, 후지코 후지오, 이시노모리 쇼타로, 데즈카 오사무 등등
  6. 이때 작가는 주위에서 토키와 장의 미청년으로 불렸었다고 한다.
  7. 다만 순정 만화인 비밀의 앗코짱은 개그가 아닌 소녀들이 즐겨보는 이야기로 그렸음에도 세차례 애니화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고, 맹렬 이타로는 개그 만화지만 진지할땐 진지하고 크게 재미를 반감시키지않는점을 생각하면 개그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들도 잘쓰는편이다.
  8. 애니메이션 제목은 '헤이세이 천재 바카본'
  9. 계기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본 시각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미소가 없었던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 아이들을 웃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제작했다고 말했고, 점자책으로는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일본 전역의 맹인 학교에 교재로 기증되었다. 아카츠카 후지오는 이 책을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제공하기 위해서 저작권료를 거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0. 그로부터 약 6달 전인 2월 24일엔 치바 테츠야가 문병한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후에 다른 이미지로 대체됨.)
  11. 그런데 거의 8분을 달하는 이 조문이 실은 백지였고, 개그만화의 신인 아카츠카를 위해 칸진쵸를 흉내낸 개그를 치려 했던 것이라고 기사가 났으며 본인도 인정했다.
  12. 일본 위키피디아 출처
  13. 安孫子 素雄, 후지코 후지오 A의 본래 이름.
  14. 뒤의 3명 모두 후지오 프로에서 일했던 어시스턴트였다.
  15. 한자음으론 불이원석만웅.
  16. 아이러니하게도 오소마츠 군의 마지막화 에피소드 들중 하나에서는 아카츠카가 알콜 중독때문에 만화를 못그리게 되어 은퇴 후 자살했다고 나온다(.....). 이때 배경에 삐뚤빼뚤해진 바카본 파파가 그려져있다.
  17. 실제로 종전 후 만주국 출신 일본인들은 자력으로 귀환하여 본토에 도착했음에도 이웃들에게 적잖은 차별을 겪었던 사례가 무척 많았다.
  18. 이 만화의 주인공에서 유래한 캐릭터가 오소마츠 군에 등장하는 하타보로, 아카하타에서의 깃발은 지금의 일장기가 아닌 적기였다.
  19. 작가가 식물인간이 되기 몇달 전이었다.
  20. 이중에서 치바 테츠야는 친한파이다.
  21. 나가이 켄이치와 공동 편저. 2013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22. 천재 바카본 2기와 3기 오프닝에서 욱일기를 연상하는 문양의 배경이 나온다.
  23. 2차대전 종전 후 연합군에 의해 금지된 깃발은 대정익찬회의 깃발인 대정익찬기였다.
  24. 사실 니시오 이신같이 작가의 성향이 우익이 아님에도 애니에서 욱일기가 나와 작가의 성향이 우익으로 오해되는 일이 존재한다.
  25. 교류한 명단으로만 봐도 무척 많다! 와카마츠 코지, 오노 야스시, 오시마 나기사, 이노우에 히사시, 요코오 타다노리, 우치다 유야, 사사키 마모루, 츠츠이 야스타카, 호시 신이치, 요시유키 쥰노스케, 아사바 카츠미, 아라키 노부요시, 사카타 아키라, 나카무라 세이치, 시노하라 카츠유키, 아사다 테츠야, 타무라 세츠코, 나카야마 치나츠, 미즈모리 아도, 히라오카 마사아키, 타이거 타테이시, 마츠모토 레이지, 치바 테츠야, 카지와라 잇키, 미즈시마 신지, 카미무라 카즈오, 쿠리 요지, 고 신타로, 쇼지 사다오, 쿠로테츠 히로시, 니카이 마사히로 , 요코야마 류이치, 스기우라 유키오, 미카미 히로시, 최배달(최영의), 안도 노보루, 고바야시 아키라 등등 충격과 공포가 아닐수 없다.(......)
  26. 실제로 비밀의 아코짱을 보면 그림체만 빼면 스토리가 오소마츠 군,천재 바카본이 그린 사람이 그린게 맞는지 의심될지경이다.
  27. 사실 나가이 고의 파렴치 학원같이 60~70년대 당시 일본에서 사람이 죽고 폭력이며 선정적인 수위가 쎈 소년만화들이 많이 있었다.
  28. 물론 설정변경은 대중매체가 애니메이션화될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천재 바카본이 처음 애니메이션화되었을 땐 원작의 노선에 반대되는 부분이 꽤 있었다. 이로 인해 아카츠카 후지오는 천재 바카본의 재애니메이션화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일본 위키피디아 출처)
  29. 렛쯔라곤에선 프롤로그 에피소드에서 오소마츠 군의 캐릭터들과 맹렬 아타로의 캐릭터들이 각각의 사건사고를 겪어 세상을 떠났단 언급이 나온다.
  30.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오소마츠 군(육가네 6쌍둥이)이 방영하기전까지만 해도 큰 인지도가 없어서 지금에 비해 오소마츠 군 항목 수정이 별로 없었다.
  31. 2015년에 오소마츠 상이라는 리메이크 작이 방송되었다.공식굿즈가 우익과 관련되서 문제가 되고있다 카더라(...)
  32. 타카 아오이 원작으로, 초창기엔 이시노모리 쇼타로와 공동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