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노모리 쇼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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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시절의 제작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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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풍모
전인권 + 최종훈

1 소개

石ノ森章太郎(1938년 1월 25일 ~ 1998년 1월 28일)

가면라이더와 슈퍼전대, 일본 특촬물의 아버지. 일본의 스탠 리

일본의 전설적인 만화가 중 한 사람. 본명은 오노데라 쇼타로(小野寺章太郎).[1] 초기 펜네임은 이시모리 쇼타로(石森章太郎)[2]였다가 데뷔 30주년을 맞아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로 펜네임인 石ノ森章太郎로 바꾸었다. [3]

만화의 신데즈카 오사무와 비교하여 그의 별명은 만화의 왕. 51살 때는 '망가 선언'을 하며, 본인을 만화가(萬畵家)라고 칭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만화(漫畵)의 만자가 만(漫)[4]자가 아니다. 만화는 상상뿐만이 아닌 현실을 포함해 삼라만상 모든 것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라며 일만 만(萬)자를 붙였는데, 그 자칭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현 개인 만화에 한정하여 최다 출판을 한 기네스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복간 닷컴에서 미공개 작품까지 다 모아서 총정리 출판을 하니 500권, 770작품이 나왔다. (...)

그런데 정작 어릴 적의 꿈은 영화 감독. 그 꿈은 이나즈맨에서 이루었다.[5]

가면라이더 시리즈를 비롯해 인조인간 키카이다, 변신닌자 아라시 등의 수많은 특촬물의 원작과 디자인을 맡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슈퍼전대 시리즈의 초기작 비밀전대 고레인저, 잭커 전격대의 원작과 디자인을 맡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고레인저와 잭커를 이후의 슈퍼전대 시리즈가 원작자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별개의 작품으로 구분하는 견해도 많았다.

그 외에도 사이보그 009, 가면라이더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컬맨과 같은 작품들을 그렸다.

참고로 괴기 막장 소설 가축인 야프의 만화판을 그리기도 했으며, 이 매니악한 소설의 팬들에게는 최고의 만화판(이라고 해도 만화판 자체가 두 명의 작가가 그린 것 밖에 없다)으로 평가받는다. (...)

2 생애


일본 방송에서 제작한 이시노모리 쇼타로 일대기. (知ってるつもり?! 石ノ森章太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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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월 25일 미야기 현에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데즈카 오사무의 '신 보물섬'을 읽고 만화에 흥미를 가져, 중학생일 때 친구들을 모아 만화 동인지 '먹물 한 방울'을 만들기도 했으나 2호로 폐간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이니치 중학 신문에 4컷 만화를 입선시켰으며, 고등학교 재학 중에 '만화 소년'의 독자 투고란에 투고를 하던 동료들을 모아 '동일본 만화 연구회'를 설립하여 육필 회람 잡지 '먹물 한 방울'을 만들었다. 이것을 계기로 고교 2학년 때 데즈카 오사무로부터 전보를 받고, 철완 아톰의 한 편을 어시스턴트를 한 적도 있었고, 당시 일본 만화계에선 미야기 현에 천재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무원이던 이시노모리의 아버지는 만화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으나 누나가 열렬하게 그를 응원했고, 이듬해인 1955년 봄 부모의 맹반대를 물리치고, 만화를 그려서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서 대학교에 가겠다고 큰소리 치고 무작정 도쿄로 상경한다.[6] 하지만 생각만큼 세상사는 쉽지 않아서 비좁은 자취방에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원고의뢰를 걱정하고, 가진 돈도 떨어져서 어머니와 누나가 보내 준 용돈을 받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다.

이윽고 소녀잡지에 몇 편의 단편을 게재하고, 테라다 히로오의 권유로 아카츠카 후지오와 함께 토키와 장의 방 한칸으로 입주하여 본격적인 만화 연재를 시작했다. 토키와 장 멤버들에서는 가장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어 아카츠카 후지오는 자기 만화를 그리는 시간보다 이시노모리의 작업을 돕는 시간이 많았었고, 작화 속도도 다른 만화가들을 압도한 수준이어서 훗날 후지코 후지오나가이 고 등이 자신의 만화에서 그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7]



일본 방송에서 만든 토키와 장 이야기

1959년 데즈카 오사무의 어시스턴트였던 츠키오카 사다오와 함께,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데즈카의 원안을 바탕으로 한 극장용 영화 「서유기」의 제작 현장에 - 바쁜 데즈카 오사무를 대신해서 -파견되어 애니메이션 제작 기획에 참여, 이때 애니메이션에 매력을 느껴 토에이 동화에 입사해서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당시 토에이 동화의 스태프 중 한 명인 시라카와 다이사쿠가 이시노모리의 그림체는 개성이 강해서 애니메이터로는 맞지 않는다며, 만화가로 성공하면 그 원작을 우리가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해서 수긍하고 포기했다. 이런 인연을 계기로 후에 인기만화가가 된 이시노모리의 작품은 차례차례 토에이에 의해 영상화 된다.
한편,집안이 극장을 운영하던 츠키오카 사다오는 어릴 때부터 디즈니의 영사기 필름을 직접 보면서 자라서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고, 애니메이터로써의 재능을 사서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스카웃했고,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첫번째 TV연속 만화영화 '늑대소년 켄'을 원화를 거의 혼자서 그리고 연출을 하고, 나중에는 독립해서 광고나 예술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가 된다.

1964년 7월엔 대표작인 사이보그 009의 연재를 진행했는데, 이미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이때 메이저 만화가가 되어있었기에 그가 그린 '만화가 입문', '속 · 만화가 입문' 등은 만화 지망생들에게 많이 읽혔으며, 그 책들은 만화 기술론에서 구체적인 스토리 구상 방법까지 작성된 (당시에) 획기적인 만화가 입문서로써 수년 동안 지망생들한테 바이블로 불러졌단 후문이 있다.

1971년엔 가면라이더의 원작과 만화화를 맡았으며, 토에이의 기획 과정에 다양한 설정들과 캐릭터 디자인을 제공해준다. 가면라이더의 성공을 계기로 토에이의 다양한 특촬물 · 변신 히어로 프로그램의 원작을 맡았다.[8] 1981년엔 일본 만화가 협회의 이사를 맡았으며, 4년 뒤 만화가 데뷔 30주년을 계기로 이름을 지금의 이시노모리 쇼타로로 개명했다. 1998년 1월 28일 세상을 떠났는데, 사인은 심장 마비로 그가 60번째 생일을 맞은지 정확히 3일 후였다.

3 특징

그의 작풍은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이들을 위한 만화(원시소년 류, 사루토비 사스케 등)와 어느 정도 성인 취향의 만화를 병행하였는데, 그의 후배이자 제자, 어시스턴트였던 나가이 고와는 달리 폭력이나 성적인 표현 등은 극도로 자제하고[9] 기본적인 분위기를 아예 낮게 가라앉히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는 데 더 뛰어났다. 특촬물에서 역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색감과 디자인보다는 개성과 이형을 중시했으며 이것이 현 일본 특촬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기점이 되기도 했다. 또한 현실적 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보였던 만큼 경제학이나 역사에 관한 만화도 많이 적었다.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처럼 현실에 직접적인 비판을 보인다던가 하지는 않고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에만 손댄 점 등을 미루어 볼 땐 그다지 정치적인 성향은 드러내지 않았다.

데즈카 오사무 사단 중에서 유일하게 데즈카에게 인정받은 사람이다.[10] 실제 데즈카 오사무의 다작 경향상 어시스턴트가 많이 필요했는데 이때 그의 아파트에 불러들인 인물이 이시노모리 쇼타로로서 자신의 작풍뿐 아니라 아이디어 등 많은 것을 흡수하는 그를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시노모리 쇼타로 본인은 데즈카를 외계인의 이미지로 많이 묘사했는데 정작 데즈카 본인도 이시노모리를 그러한 식으로 많이 묘사했다.

그런데 우라사와 나오키플루토의 뒷담화를 보면 데즈카가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작풍에 대해 엄격하게 비판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속사정이란, 1967년부터 데즈카 오사무가 창간한 만화잡지 'COM'에 이시노모리는 이제는 '만화로 쓴 시(詩)'라는 평을 듣고있는 <쥰>이라는 실험적인 연작 단편을 발표한다. 이 작품에 대해 데즈카 오사무는 스토리도 대사도 없는 그런 것은 만화가 아니다라고 어떤 독자와의 편지에서 속내를 털어냈고, 그 독자는 그 사실을 이시노모리에게도 알렸다.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작품 연재를 중단하겠다고 출판사에게 전했다. 그것을 알게 된 데즈카 오사무는 이시노모리 쇼타로를 찾아가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사과했다.

스컬맨 리메이크로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하러 온 사이인 시마모토 카즈히코 역시, 60에 가까운 나이로는 걸맞지 않는 아이디어와 위압감에 자신이 순식간에 쫄아버렸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참고로 원래 처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시노모리 쇼타로 본인이었다. 스컬맨에 미련이 많았던 그는 자신의 후속작을 자율적으로 시마모토에게 맡도록 했고 평소 그를 존경하던 그는 오마쥬의 형식으로 그의 작품 상당수, 특히 시마무라 죠의 등장으로 상당 부분 사이보그 009와 크로스시켰으며 이는 애니메이션 스컬맨에도 반영되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회고록에서는 꽤 털털한 성격이라고 한다. 한번은 데즈카 본인이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일정이 너무 바빠 결국 왔을 땐 결혼식이 끝나 있었다고 했다. 그 뒤 이시노모리 쇼타로 본인은 "원래 만화가라는 게 그래. 특히 선생님(데즈카) 정도면."이라며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고. 그리고 생각보다 근성이 강하여 이틀에서 사흘 정도 밤샘 작업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며 골초커피 광이었다고 한다. 그니까 일찍 돌아가셨지... 실제로 커피와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문구에 "그럼 팔지 말던가"라고 투덜댔다고.[11] 또한 그의 만화를 맨 처음 읽어주는 사람은 그의 가족들이었다고 하며 작중 그가 코멘트를 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데즈카 오사무처럼 딱히 작업실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실제 장남 오노데라 죠는 가면라이더의 헬멧 디자인을 고른 사람이기도 했으며 가면라이더 블랙 RX에서 조연으로 출연하기도 했고 가면라이더 SD에서는 RX의 성우를 맡았다.

나가이 고의 만화 '게키만'에선 보통 만화가의 5배 속도로 만화를 그렸다고 회고된다.

4 주요 작품

  • 그 외 만화 입문서 다수
  1. 가면라이더 디케이드오노데라 유스케, 가면라이더 W의 주인공 히다리 쇼타로가 바로 여기서 따온 것.
  2.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 이시노모리에서 따왔는데, 한자로는 石森로만 표기해서 일반적으로는 이시모리로 읽어서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이시모리로 정착된다. 데뷔작 '이급천사' 등에서 이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3. 나무위키에서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중간의 ノ자를 일반적인 ノ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생전의 고인은 이 ノ자를 일반적인 크기의 2/3정도의 작은 크기로 표기하는 것을 고집하였다. 사망 후 현재도 고인의 뜻을 존중하여 출판물 등에서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이름을 표기할 때 고인의 표기방식을 지켜줄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지켜지지 않을 경우 이시노모리 프로덕션 차원에서 정정요청을 보내고 있다고.
  4. 원래 일본에서 '망가'할때 '만' 자는 '마음 내키는대로'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스케치'와 일맥상통한다.
  5. 이전에 가면라이더 스트롱거 최종화에서 이루었다고 되어있었는데, 사실 이전에 이나즈맨의 어떤 화(기억안남, 추가바람)에서 감독을 맡은 적 있다. 그 화에서 본인과 아들인 오노데라 죠도 특별출연.(이나즈맨이 1973년작, 스트롱거는 1975년작)
  6. 나중에 자치생활을 하는 남동생을 돕기 위해 누나도 그가 살고 있던 토키와 장으로 온다. 미인이었던 누나는 토키와 장의 '마돈나'같은 존재였으나, 안타깝게도 몇 년 못가 병세가 악화되어 갑자기 사망하고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큰 충격을 받았다.
  7. 후지코 후지오 A의 만화의 길에서는 그들이 하루에 5, 6장씩 그렸을 때 이시노모리가 혼자서 15-20장을 그린 일화가 언급된다.
  8. 이때 실사 프로그램에서 출연한 게스트 캐릭터 디자인의 대부분은 이시노모리가 간단한 설정을 구상해 밑그림을 그려, 그 러프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진 측에서 시나리오와 인형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9. 하지만 진 가면라이더 등의 성인판 작품들 같은 예외도 있다.
  10. 데즈카는 자신의 동세대 만화가인 요코야마 미츠테루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모든 현역은 라이벌이라는 생각 때문에.
  11. 근데 커피는 적당히만 마신다면 건강에 좋다. 뭐 어떻게 생각하면 커피는 말이 음료지 사실상 약에 가깝다. 다만 담배는 건강에 하나도 좋을건 없다.
  12. 이시노모리 사후 라이더 시리즈 또한 오프닝에 원작자가 이시노모리로 표기되나 본 문서에서는 제외했다.
  13. 우리나라에서는 야구왕 펑키라는 제목의 비디오로 알려졌다.
  14. 한국에서는 '원시소년 돌치'라는 제목으로 로컬라이징 방영되었다.
  15. 한국에선 치쿤 타쿤이란 이름으로 91년경 렌탈 비디오로 출시된적이 있다.
  16. 히라이 카즈마사와 공동 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