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코 F. 후지오

fujikof.jpg

1 개요

도라에몽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로 일본 만화계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일본의 만화가

본명은 후지모토 히로시(藤本 弘)(1933년 12월 1일 ~ 1996년 9월 23일).

1951년 후지코 후지오 A(이하 A)와 같이 마이니치 소학 신문에 투고한 천사의 알이 채용되어 연재되면서 만화가로 데뷔하였다.

2 생애

얌전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어린 시절 몸이 아픈 적이 많아서 오랜 집단괴롭힘에 시달렸다. 이 경험이 영향을 미쳤는지 데뷔 후에도 텔레비전 출연, 논술, 골프 등을 하던 A와는 다르게 만화들을 집필하는데 전념하였다.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을 때 평생의 절친인 후지코 후지오 A를 만났으며, A와 매일같이 서점을 찾아 출간된지 얼마 안됐던 데즈카 오사무 작품들의 초판을 거의 모두 사서 모았다고 한다. 여기서 후지코 F. 후지오의 인생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데즈카 오사무로, 자신은 신 보물섬에 영향을 받아 생전 그를 스승처럼 존경하고 있었으며, 그 만화들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아무한테나 이 만화들을 보여주면서 상대가 그것을 읽을 때까지 곁에 있었는데, 예상외로 상대가 재미있어 하지 않으면 바로 불만을 터뜨린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1]

중학생 시절 데즈카 오사무한테 팬레터를 보낸 답신으로 친필 엽서를 받은 뒤론 아예 이 되었으며, 그 엽서를 평생 간직하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우선 취직을 하기로 마음먹어 제과 회사에 취직하기도 했으나,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로 만화를 그릴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3일만에 그곳을 나왔다. 하지만 만화가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봄방학을 이용해 데즈카 오사무를 만난 적도 있었다. 이 무렵 자신이 과연 만화가로서 잘 해나갈수 있을지 불안했었지만, 그한테 너희라면 해나갈 것이란 것을 듣고 만화가가 되길 결심하였다. 그 후론 에서 만화를 집필하는데 전념하며 휴일엔 신문사에서 일하던 A와 함께 만화를 그렸고, A를 꾸준히 권유한 끝에 1954년 도쿄로 도착해 후지코 후지오로 필명을 바꾸고 토키와 장에 입주해 다른 동료 만화가들의 작업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제로를 설립하면서부턴 만화를 잡지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때 A와 공동으로 그린 요괴 Q타로, 자신의 단독 만화인 퍼맨은 상당한 히트를 쳤으나 21에몬, 우메보시 덴카, 모자코는 오래가지 않아 연재가 종료되는데 그치면서 몇년간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었다. 당시 후지코 스튜디오에선 에비하라 타케시 등의 일부 지원들을 제외하곤 괴물군, 웃는 세일즈맨, 마타로가 온다! 등을 연재하던 A를 중심적으로 지원했었으며, 후지코 F. 후지오는 주간 소년 선데이의 편집장에게 자신을 선데이 작가진에서 분리해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빅 코믹에서부터 집필을 요청하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 이에 후지코 F. 후지오는 자신의 만화가 청년만화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처음엔 이 의뢰를 거절했으나 편집장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승낙한다. 이때 그린 단편이 바로 미노타우로스접시로, 빅 코믹의 편집부에서 호평을 얻었으며 자신도 이런 것이냐라는 새로운 장난감에 넣은듯한 기쁨이 있었다고 후에 밝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소학 잡지에 도라에몽을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인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4년 뒤인 1973년에 애니메이션이 종영하면서 편집부에서도 연재를 종료시키려 했을 정도. 그리고... 이에 반발한 후지코 F. 후지오는 미키오와 미키오를 새로 연재하면서 도라에몽의 연재를 속행했고 6년이 지난 1979년 TV 아사히에서 재애니메이션화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후지코 후지오 A의 작품들 또한 애니메이션화되어 일본인들한테 인지도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7년 A와 콤비를 해체한 뒤론 후지코 후지오 Ⓕ로 필명을 변경해 활동했지만 1년 후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권유로 F를 이름 가운데에 넣는 지금의 필명으로 바꾸었으며, 친구인 후지코 후지오 A와는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1996년 9월 20일, 가족이 저녁 준비를 이야기하면 평소 작업실에서 대답했던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록 식탁에 오지 않아서 이 이상하게 생각해 부르러 갔다가 책상에 앉아 의식을 잃은 상태인 아버지를 발견해 후지코 F. 후지오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도라에몽 노비타의 태엽도시 모험기 62페이지를 그리다가 연필을 잡은 채로 쓰러졌으며,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3일 후인 9월 23일 오전 2시 10분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간부전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후지코 F. 후지오 자신도 이전부터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는지, 그 상황을 도라에몽 노비타의 태엽도시 모험기의 ​​줄거리를 쓰기 전 감독인 시바야마 츠토무한테 미리 알려주거나 사후 자신의 만화들의 행방과 후지코 프로덕션의 활동 등에 대해 걱정을 보인 내용을 쓴 편지를 남기기도 했다.[2] 또한 1992년암으로 투병할 당시 코로코로 코믹에서 연재하고 있던 대장편 도라에몽 작품인 노비타와 구름의 왕국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어서 후지코 프로덕션에서 비주얼 스토리를 게재하는 사태가 일어난 바 있었다.

후지코 후지오 A는 빈소에서 마음이 혼란했던 상태로, 솔직히 오늘 아침부터 계속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는데 (이런 소식이 나와서) 몹시 유감이었으며, 그는 대단한 천재였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가 있었기 때문에 만화가가 되었을것 같다고, 정말 순수한 마음의 남자였다고 말하였다. 이후 만화의 길의 속편인 사랑... 저주 물들 해 무렵에...에서 그를 추모하는 작품인 '안녕 친구여'를 집필했다.

9월 29일 장례식이 진행됐을 땐 많은 조문객들이 참석하였고, 발인식에서는 "감사합니다 히로시 씨"로 많은 사람들이 외쳤다. 성우 오오야마 노부요는 장례식에서 "진짜 장례식의 날, 도라에몽, 노비타 군, 시즈카, 쟈이안(퉁퉁이), 스네오(비실이), 엄마, 아빠 모두 선생을 보내면서 동시에 감사드립니다."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같은 날, 그를 추모하는 특집으로 도라에몽 노비타의 일본탄생이 TV 아사히에서 방송되었다.

이후 2000년, 소학관에서 한정으로 생산한 F's complete works 후지코 F. 후지오 복제 원화집을 발매하였으며, 2006년엔 후지코 F. 후지오 뮤지엄의 설립이 정식 발표되었고, 2008년 12월 건설예정지가 카와사키시 다마구의 오다큐를 향한 공원홀 주변으로 확정되었으며, 2011년 9월 3일에 후지코 F. 후지오 뮤지엄이 개관하였다. 소학관은 2009년에 후지코 F. 후지오 대전집의 발매를 발표하였고, 1기, 2기, 3기 순서대로 출간되었다.

3 특징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는 오너캐에 그려진 모자와 파이프 담배. 하지만 빵모자를 쓰게 한 사람은 같은 모자가 트레이드 마크인 데즈카 오사무가 아니라 친구인 A였다고 한다.[3] 주로 소학관의 학습잡지나 코로코로 코믹에서 어린이 취향의 만화를 그리면서도, 빅 코믹 등지에서 성인용 SF 단편 만화를 연재하였다.

A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던 작가였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2차 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직간접적으로 무기, 군사, 쿠데타, 혁명 등에 대한 정보들을 접하게 되어, 이들을 모티브로 하거나 자세히 묘사한 만화들도 다수 발표하였다.[4] 물론 전쟁 자체에 대해선 일관되게 허무하고 무서운 것이나 어리석은 행위로 묘사해 표현하고 있으며, 초창기의 도라에몽 연재분에는 2차대전에 관한 에피소드가 몇개 존재해 군국주의로 미쳐가던 당시 일본의 상황을 표현해낸 장면들이 나온다.[5]

생전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가 무척 다양한 오덕후 기질의 만화가이도 했다. 야구,[6] 철도 모형은 생전에 즐기던 취미 중 하나였으며, SL 등을 소재로 한 작품도 다수 그려내기도 했다.[7]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촬영해보거나 디오라마를 만들어보기도 했었다.[8] 후지코 F. 후지오는 비밀 도구의 아이디어를 짜낸 팁 중 하나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모티브로 했다고 밝혔으며, 특수 촬영, 프라모델, 무선 조종 등에서도 많은 탐구를 했었다.

뿐만 아니라 공룡에 대한 관심도 깊었으며 책상에는 시조새의 복제 화석티라노사우루스의 프라모델과 진짜 디플로도쿠스꼬리뼈까지 장식되었었다고 한다. 어시스턴트였던 무기와라 신타로가 그린 익룡 일러스트를 보고 그 자리에서 관절이 이상하다고 지적한 일도 있었다.[9] 서부극이나 카우보이에도 무척 관심을 가져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이 그려낸 것과[10], 생전 A, 스즈키 신이치, 츠노다 지로랑 8mm 카메라로 서부극을 촬영한 경험도 있었다.

후지코 F. 후지오는 대표작인 도라에몽을 예로 들듯이 자연스레 SF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11] 그가 제창한 SF는 본래의 의미가 아닌 S - 스코시(少し 약간), F - 후시기(不思議 신기한)란 뜻으로 일상생활에서 비일상적으로 들어온 내용의 만화들이 많다. SF 단편집에 수록되어있는 작품들은 그런 공상 과학 소설의 흐름을 이어받은 작품들도 존재한다.

자신의 작품에서 설정된 세계관들이 연결되는 일도 많아서 한 작품의 캐릭터가 시공간을 넘어서 다른 작품에 등장하고, 심지어 후일담이나 전의 내용들이 거론되기도 한다. 콤비를 해체하기 전에는 A의 작품인 닌자 핫토리군과 퍼맨의 크로스오버도 존재했었다. 그의 만화들에서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동물 캐릭터가 평범한 소년 주인공과 함께 살고, 여자아이 캐릭터 1명, 골목대장 1명, 앞잡이 1명의 구도 설정이 많다.(이른바 도라에몽식 구성.)

생전 작품이 단행본화되었을 때는 수정작업과 삭제작업을 거쳐서 보다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을 활용했다고 한다. 실제로 도라에몽에서 보듯이 캐릭터의 대사나 연재본이 변경된 사례들이 존재한다. 히로인팬티에 집착이 있었는지 판치라가 연출되는 장면들이 자주 나왔다. 그래서 로리콘이 아니냐는 얘기도 존재할 정도. 그나마 애니메이션에서는 이런 장면들을 줄인 것이다.

4 작품 목록

4.1 대표작

등 다수

4.2 기타 단편

1968년부터 1995년까지 112개의 SF 단편들을 발표했다. 자세한 작품들은 일본 위키피디아의 후지코 F. 후지오 작품목록을 참조할 것.#

5 출연

5.1 영화

5.2 텔레비전

6 트리비아

  • 생전 애용하던 연필미쓰비시 유니의 B 사이즈였고, 펜촉은 지브라의 카브라 펜을 주로 활용하였다.
  • 3명의 이 존재하며, 그들에 의하면 평균 ​​수면 시간을 4시간으로 맞추었던 일상 속에서도 시간이 날 때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 좋아했던 여배우시라카와 유미. 토키와 장에 머무르던 시절 A에게 담배가게 앞에 시라카와 유미가 있어!라고 전해듣고는 황급히 방을 뛰쳐나가 담배 가게까지 달려나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어서 가게의 할머니에게 시라카와 유미 씨가 여기에 없었습니까?라고 묻자 할머니는 창문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가리켰다. 그 포스터 안에 시라카와 유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 초대 전속 비서는 '모이창베 마치코 선생'을 그린 에비하라 타케시가 맡았으며, 무기와라 신타로(하기와라 신이치로)도 어시스턴트로 그를 지원해주면서 함께 연극을 보거나 소바(메밀국수)를 같이 먹는 등 무척 친밀한 관계로 지냈다. 더욱이 후지코 F. 후지오는 무기와라가 그린 만화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지도해주면서 도라에몽 단행본의 표지를 맡기는 등 자신의 미래를 대비한 후진으로도 준비시키고 있었다.
  • 뒷골목 뒷골목 명화관에서 영화 '남극 이야기'(南極物語)를 은근히 비난하는 주장이 나와 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깊어 대장편 도라에몽에서도 환경 보호를 일찍이 주창했었다.
  • 어린이가 말한 현실과 작품 세계가 혼동하는 순진한 질문에 대해서는 최대한 동심파괴를 하지 않도록 답했다. 아래는 해당하는 사례들.
    • 타케다 테츠야가 어린 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갔을 때 딸이 '도라에몽은 어디 있어요?'라고 묻자 그는 바로 '도라에몽 은요, 지금 방송국에 있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 도라에몽의 인기가 높았던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현지의 아이들이 4차원 주머니 후지코 선생님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로 질문하자 도라에몽이 착용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예비 주머니가 있는데, 이 2개밖에 없기 때문에 나한테 없는 거야로 대답했다.
  • 스튜디오 제로의 사장을 지냈을 때는 80명의 직원들을 보유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무가 혼자서 사장 전용 차량으로 중고 링컨 컨티넨탈을 구입하였고 개인 운전사도 고용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오다큐 선의 열차를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하던 작가는 꺼려했었고 운전자는 즉시 해고되었다. 링컨 컨티넨탈은 일년에 몇번만 가동하는데 그쳤다고 한다.
  • 도쿄로 올라왔을 당시에 사망률 1위를 기록했던 결핵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가 기력을 회복한 사례가 있다.
  • 골프도 취미 중의 하나였지만, 자타가 공인한 상당히 서투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말년에 그린 작품인 「미래의 추억」에서는 골프가 서투른 자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후지키 F. 후지오 쪽이 서툴잖아!라고 이야기하는 자아비판적 장면이 있다.
  • 노비타의 공룡이 개봉하기 전날에 관객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에 영화관 건너편에 있는 한 호텔로 숙소를 잡았으나 영화를 보러 많은 아이들이 달려와서 감상한 것을 보고 안심했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인스턴트 컵라멘[12]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코이케의 모델이자 동료인 스즈키 신이치는 자신보다 매우 라멘을 좋아했다고 언급했다. 후지코 F. 후지오는 생전 컵라멘을 을 뿌리는 것만으로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마술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스튜디오 제로 회사 건물 옥상에서 인스턴트 라멘을 먹고있는 모습이 촬영되기도 했었다.
  • 그의 작품 대부분이 한국에 방영이 되어서인지 국내에서도 익숙한 인물이자 유명하다. 그의 작품중에서 첫번째로 한국에 방영이 된 것이 도라에몽이며 그 후에도 만화채널에서 퍼맨,만능 비리몽등 여러가지 방영을 했다. 만약 2010년대까지 살았다면 감사의 의미로 한국에 갔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매우 아쉽다.
  • 타케다 테츠야의 노래에 집착을 가졌는지 극장판의 엔딩 테마를 계속 담당하고 있던 그의 강판을 제작사 측에서 제의했을 때 강하게 거부한 것이 도라에몽 대전집에서의 증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지코 F. 후지오가 점찍어 오랜 기간 동안 도라에몽 극장판의 주제가의 작곡을 맡았던 타케다 테츠야는 1996년 개봉한 노비타와 은하초특급을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 2016년 4월 23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KBO리그 롯데와 KIA 경기에 시구자로 등장했다.영상 사실은 롯데 조지훈 응원단장 10주년을 맞은 몰래카메라. 도라에몽데이를 맞아 식전행사 사회를 본 조지훈 단장이 시구자로 도라에몽의 원작자 후지코 F 후지오를 소개했지만 전광판에 나온 시구자는 바로 자신이었다.

7 수상 경력

7.1 생전

  • 1982년 : 제27회 소학관 만화상 아동 부문 수상 (도라에몽) [13]
  • 1989년 : 영화 공로상, 골든 글로스 상 수상
  • 1994년 : 제23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 대신 수상

7.2 사후

  1. 실제로 극초기 그림체는 테즈카 오사무와 닮은 점이 많았으며, 자주 테즈카의 작품에 대해서 특별한 생각을 가지면서 언젠가 테즈카 선생같은 멋진 작풍에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그를 광팬급으로 신봉한 나머지, 코로코로 코믹의 초대 편집장이 테즈카에 대한 비판을 토로하자 맹렬히 분노해 1주일 가까이 사무소에 출입하지 않은 경험도 있었다.
  2. 2006년 2월 19일 TV 아사히에서 방송된 '도라에몽 탄생 이야기 ~ 후지코 F. 후지오의 편지 ~ '에 따르면, 1986년 이 발견되어서 이후부터 컨디션을 무너뜨리는 현상을 가지고 있던 것이 밝혀졌다.
  3. 어느 날 A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베레모를 받았지만 그다지 쓰려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대로 F에게 양보하였고, 이것이 후지코 F. 후지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후지코 F. 후지오는 이 모자가 A가 선호한 유행이라서 나보다 어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일본 위키피디아 출처)
  4. 만화의 길에서는 전함의 삼면도와 비행기의 모형이 장면마다 그려지기도 한다. 무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동경하는 멋진 물건으로 그린 묘사(스네오의 대사 등)도 적잖게 존재한다.
  5. 태평양 전쟁 당시 혹사당하는 아동의 모습을 표현한 흰 백합의 여자아이, 우에노 동물원에서 맹수 살처분에 대해 언급한 코끼리와 아저씨 에피소드 등이 존재한다.
  6. 소학 4학년 1971년 1월호에서 독자의 질문에 자신이 긴테츠 버팔로쓰를 좋아했다고 답했다.
  7. SF 단편 만화 다다미 4장 반 SL 여행, 도라에몽의 SL 굴뚝 편, 노비타의 모형철도 은하철도 승차권 편, 포코냥의 다이나믹도 경전철 편 등등.
  8. 그 증거로 도라에몽의 비밀 도구 중에서는 수많은 카메라가 등장하는 것 외에 디오라마 제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에피소드들이 나온다.
  9. 이런 흔적들은 노비타의 공룡, 노비타와 용의 기사나 T·P본 등에서 드러나온다.
  10. 특히 노비타에게 사격의 재능이 존재한단 설정의 에피소드를 많이 그려낸 바 있었고, T·P본과 SF 단편집 휴일의 총잡이 등에서 카우보이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경력도 있었다.
  11. 대표적으로 스타워즈가 일본에서 인기였을 때엔 도라에몽 만화판에 스타워즈에 관련된 패러디를 많이 등장시키기까지 했다. 이 에피소드 외에도 예비 기계를 이용해 찍은 영화의 제목이 '스타 죠스'라는 것과, SF 단편인 "어느 날...", "뒷골목 뒷골목 명화관"에 패러디 극중극이 존재하며, 노비타와 우주소전쟁의 줄거리는 전체적으로 스타워즈에서 패러디해온 것이다.
  12. 특히 치킨라멘을 가장 좋아했었다고 한다.
  13. 당시는 후지코 후지오란 필명으로 수상.
  14. 애니메이션의 문화와 산업 진흥에 기여함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