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네루다

<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1970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파블로 네루다1972 - 하인리히 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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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lo Neruda (1904년 7월 12일 ~ 1973년 9월 23일)

어떤 언어로 보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확신컨대, 나는 이 땅에서 그 나이에 그만한 높이에 다다른 시인을 따로 알지 못한다 - 페드로 프라도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이다.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Neftalí Ricardo Reyes Basoalto)이다. 연애 시를 많이 남겼으며 그 외에도 다양한 스타일로 시를 썼다. 사회주의자라서 평생동안 정치적 망명을 여러군데 다녔다. 1971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한국에는 그의 작품 중 '어느날 시가 내게로 왔어' 라는 구절로 유명한 '시' 가 널리 알려져 있다.

1 일생

1904년에 칠레 중부의 파랄에서 태어난 파블로 네루다는 자기가 태어난 2달 후 어머니를 여의었다. 네루다는 13살때 신문에 그의 첫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탄압을 피해 그는 필명을 쓰는 데 1920년, 10월 그는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과 바울에 영감을 얻은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어 필명으로 활동을 했지만 1946년도에는 법적인 이름이 되었다.

그는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해서 1921년 〈축제의 노래〉를 발표해서 시단의 인정을 받았고 2년 뒤에는 그의 첫 시집 <황혼 일기>를 출판했다. 그 이후 그의 문학적 행보는 거칠 것이 없어서 <무한한 인간의 시도>, <열렬한 투척병>, <지상의 거처>를 출판한다. 그 사이 그는 버마의 양곤의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고 특히 그가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 할때 스페인 내전을 겪은 것이 그가 공산당에 입당하고 반 파시즘 시를 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절에 스리랑카에 머무를 때 하층민 타밀 여인을 강간하고 그 사실을 아무렇지도않은 듯이 자기 자서전에 적은 것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귀국한 후에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한 곤살레스 비델라 대통령이 공산당과 체결한 협약을 파기하자 파블로 네루다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1948년 1월 6일의 의회 연설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네루다의 상원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2월 5일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영장을 발급했다. 그 후 공산당이 비합법 단체로 인정되자 그의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1952년 귀국한 이후에 창작에 몰두를 한다. 1969년도에 공산당의 지명으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 했지만 살바도르 아옌데를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한다. 그 이듬해에 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하지만 1973년도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지자, 병상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시를 쓰다가 1973년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네루다의 죽음에 관하여 그의 측근과 칠레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논객들은 오랫동안 피노체트 정권에 의한 독살설을 주장했는데, 2010년대에 들어 결국 칠레 내무부에서 장기적으로 내부 조사를 한 결과 2015년 11월에 스페인어권 최대 신문 중 하나인 엘 파이스 지를 통해 실재로 제 3자의 개입을 통해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시인하였다.

2 기타

네루다가 등장하는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가 있다.

네루다는 1973년 암으로 인한 심정지로 사망했는데, 최근 칠레정부가 군부에 의해 타살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인정했다.

네루다는 피노체트CIA의 협력으로 일으킨 쿠데타로 아옌데 대통령을 쫒아내고 집권하자 해외 망명을 계획했는데, 칠레를 떠나기 전날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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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 말 중에서 '모든 꽃을 꺾을 수는 있어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와 꽤나 비슷한 느낌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