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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노벨문학상(Nobel 文學賞)
스웨덴어: Nobelpriset i litteratur
영어: Nobel Prize in Literature
1 소개
노벨상의 한 분야.
역사학자인 2대 수상자 몸젠이나 철학자인 베르그송과 러셀이 받은 적도 있어 인문학상 요소도 가지고 있다. 1953년 윈스턴 처칠 이후 소설가, 시인들이 독점하다[1] 2015년 벨라루스의 에세이스트 알렉시예비치가 수상하면서 반세기만에 비문학계열 수상자가 나왔다. 2016년에는 미국의 포크가수 밥 딜런이 깜짝 수상하여 오랜만에 비 작가가 수상하게 되었다. 밥 딜런의 수상을 계기로 초창기처럼 스펙트럼이 넓어지지 않겠냐는 예상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노벨문학상은 작품성도 고려되지만 당시 시대 상황 등 작품 외적 요소도 많이 고려된다. 일례로 수상을 거부한 바 있는 사르트르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었고, 94년 수상자인 오에는 핵무기 반대 운동을 펼쳤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노벨문학상은 작가에게 주는 상이지 절대 특정 작품에 주는 상이 아니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심사평마다 수상 작가의 문학적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작품들이 있긴 하다. 예를 들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2 비판
그러나 작가의 사상 문제로 수상이 반려된 경우(1회의 최유력후보 톨스토이가 무정부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후보에 오르고도 받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파스테르나크의 수상에 관한 소련 정부와의 반목이나 2012년 수상자인 모옌의 친정부적 검열의혹등의 비판이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외에도 보르헤스의 경우에는 당시의 아르헨티나 독재정부에 찬성했다라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수상하지 못하였다.
또한 과학분야와는 달리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고도 자의적으로 수상을 받지 않은 사르트르와 정치적 문제로 받지 못한 파스테르나크 같은 케이스도 있다. 이는 과학과는 달리 인간의 감성적, 철학적인 부분에 기인한 인문학적 특성 때문이다.[2]
3 한국인 수상이 어려운 이유
대한민국에선 아직 수상자가 없다보니 문학 관련 기사만 나오면 으레 노벨문학상과 관련 짓곤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세계 도서 박람회가 열리면 '도서 박람회가 열린 나라에서 몇 년 안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경우가 많다'라든가. 시인 고은이 매년 후보에는 오르기 때문에[3] 해마다 시상식날만 되면 기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고은은 이로 인해 받는 엄청난 중압감 때문인지 떨어질 때마다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탈락한 것이 죄도 아닌데 이런 기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병크.
이 떡밥에 대해 제기되는 몇 가지 주장들과 반론들을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1. 아직 한국의 문학작품들이 해외에 많이 선보이지 않았다.
- 맞는 말이다. 한국은 지리적ㆍ역사적으로 서양 국가에 인지도가 낮았고, 따라서 한국의 텍스트가 서구권에 번역되는 일도 적었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며,[4] 여기에 기본적으로 한국어 사용자가 밀집되어있는 한국의 한국인은 인구수가 기껏해야 5천만 밖에 안 되어 서양 언어권 국가보다 인구가 적다는 한계점을 갖고 있다. 텍스트 번역 사례가 적으니 번역계의 노하우나 문학적 성숙도 기대하기 힘들고, 좋은 작품이 번역될 확률도 극히 낮아진다. 또 작품은 번역된다고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산 넘어 산책 역시 상품이기에 마케팅이 있어야 하는데 라이선스를 수입하는 해외 출판사의 입장으로서는 소비자들이 익숙한 국가의 서적을 들여오려하지 왠 생뚱맞은 국가의 책을 갖고오려 하지 않는다. 결국 소규모 해외 출판사들만이 틈새 시장을 노리고 라이선스를 가지고 오는데, 소규모 출판사는 대규모 출판사보다 마케팅에서 밀린다. 그리고 이런 소규모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노벨문학상 선정위원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해외 소개된 고은의 작품은 66종이지만 수준 높은 번역은 10%에 그친다는 평가다. 실제로 일본의 가와바타가 《설국》으로 문학상을 받았던 데는 미국인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든스티커의 공이 절대적이었으며, 일본 원전보다 영역본이 낫다는 평까지 받았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손꼽히는 알바니아 작가 카다레의 작품 역시 프랑스 번역가인 유수프 브리오니가 꾸준히 프랑스어권에 소개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 반론: 피터 현이 《월간조선》에 연재한 회고록에 의하면 80년대 전두환의 사업 중의 하나가
본인이 정권 잡는 동안한국인의 노벨상 최초 수상이었다.[5] 그래서 상대적으로 쉽다고 생각되는 문학상에 도전하였고 당시 유명작가들의 작품이 국가주도로 번역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질은 대단히 낮았고 대부분 재미교포 2세대 교육용이거나 한국대사관 창고에서 썩는 경우가 많았다. 어쨌거나 지난 수십년간 한국 문학계에서 질보단 양을 택하며 온갖 국가에 라이선스를 팔아넘긴 경우는 많다. 고은은 25작품이 영미판으로 번역되었고 이문열은 33작품이 번역되었다. 신경숙의 작품은 30개국 이상에서 출간되었다. 이외에도 다수의 문단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이 영미판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한국 문학이 외국에 많이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2. 한국어 -> 외국어 번역 문화가 성숙되지 않았다. 또한 한국어는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 맞는 말이다. 이는 먼저 위에서도 언급했듯 한국어 텍스트가 영어권에 충분히 소개(=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 둘째로는 한국인 출신의 한영 소설 번역자라 하더라도 보통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지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지는 않는다. 영어를 이해하여 국어로 옮겨 쓸 수는 있어도 국어의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영어의 소설로 옮기는 것은 거의 영어권의 작가 만큼이나 고도의 영문학 소양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환경(문법 및 독해 위주의 영어 수업, 국어는 한국어로 유일, 영어권 인구수 극소, 이웃 국가 중 영어권 국가 전무, 유사이래 원어민 수준의 영어권 인구수가 사회에서 큰 비율을 차지한 적 없음 등등)에서는 이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6] 셋째로는 한국어 원어민과 영어 원어민이 상대의 언어를 배울 때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의 문법의 차이, 언어가 형성되어온 정서의 차이 등으로 인해 영어 원어민은 한국어 학습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한국어는 학습 난이도가
그 무시무시한아랍어, 일본어와 함께 세손가락안에 꼽힌다.[7] 한국은 근 백년간 영어 관련 활동을 통해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영->한 번역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한->영 번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듯 한국어 원어민은 원작 수준의 영어 작문에 어려움을 겪고, 영어 원어민은 한국어 학습에 어려움을 겪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결국 번역 작업이 생기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은 되는 번역을 만들기 위해선 영->한 때처럼 평범한 번역자에게도 맡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극소수의 영어 및 한국어 모두를 섭렵한 재능있는 번역자에게 작업을 의뢰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이를 찾기란 힘들뿐더러 페이도 높고 소수가 대부분의 작업을 맡아서 할 수밖에 없으니 시간도 오래 걸리며 번역된 텍스트 수도 적어질 수 밖에 없다.총체적 난국이잖아답이 없다그냥 작가가 한큐에 영어로 쓰면 문제 해결
- 이를 비교적 쉬운 말로 적은 작품을 출판하면 되지 않냐는 반론이 있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 같은 작가가 문장이 화려해서 찬사받은 게 아니다. 언어적 기교로 수상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것은 문학과 번역에 대해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주장으로, 문학의 번역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문장이 화려하다거나 복잡한 부분 보다는 각 언어만의 고유한 정서를 담은 단어, 즉 타 언어에는 없는 단어나 타국에는 없는 관습을 옮겨오는 것이 주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쉬운말로 된 좋은 작품이 모두 잘 번역되었다면 세상 어느 언어의 문학인들 묻힐리가 없다. 또한 상술했듯 온갖 악조건들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기본적으로 한국 문단의 힘이 세계 주류 문단에서 소리를 못 내고, 창작되는 작품 수가 적고, 소개되는 작품 수도 적고, 번역자 수도 적고, 최소한의 수준이 되는 역자도 부족하고, 작품을 받아주는 출판사도 적고, 그나마 그 출판사도 영세한데 이런데에서 세계 정상권 문학 수준에 닿는 주제의식, 사유, 통찰이 담긴 작품이 질좋게 뽑힌뒤 입소문이 탈 확률이 몇이나 될까?
- 반론 : 언어 이전에 정서가 있다.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정서가 있다. 그런 보편적인 정서에 감동을 주지 않고서 어떻게 세계적인 대문호가 존재하겠는가? 물론 《홍루몽》 같이 자국 내에서만 극도로 찬양받는 작품이 있다. 하지만 한국문학은 한국 대중이 좋아하는가? 아니면 소수 교양인이 좋아하는가? 아니다. 오직 그걸로 생계 유지하는 밥그릇 종사자들만 좋아할 뿐이다. 그러므로 한국 문학은 고유하다기보단 폐쇄적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자폐적 자화자찬과 같다. 그리고 앞질러 말한 헤밍웨이도 영어권 외에 어떤 언어로 번역하든간에 보편적인 감동을 준다. 한국어 텍스트가 영어권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주장으로 살펴본다면 영어권 내에서만 인정받아야한다. 왜냐하면 정서와 관습이 고유하다면 번역으로 옮기기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표현력을 지닌 셰익스피어 희곡도 마찬가지로 세계적 인정을 받고 있다.[8] 500년 전 봉건적 관습을 이야기했는데도 말이다! 쉬운 말로 된 좋은 작품이 한국어라서 번역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저 애초에 노벨상을 탈 만큼 좋은 작품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언어는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일제 강점기만 거슬러올라가도 이해하지 못할 생소한 생소한 어휘가 굉장히 많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면 내용 자체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이다. 우리도 우리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자가당착적 상황이 벌어진다. 결론적으로는 문학이 시대와 문화권 내에서의 한낱 유행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3. 문학의 인문학성
- 사실 소개에서도 나오듯 노벨문학상은 인문학적인 상이기에 작가들이 화두로 던지는 사회문제와 인간문제가 얼마나 세계적 영향이 있는가와 밀접하게 관계된다.# 아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수상 이유와 이력을 보면 알 수 있다.
- 김성곤 한국문학번역원장은 "절대적인 진리를 회의하고 숨겨진 상대적 진리를 찾는 것, 전통적 역사를 회의하고 밀려난 또다른 역사나 찢겨나간 개인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 경계를 허물고 해체하는 것, 말하자면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부를 조명하는 것이 요즘 세계 문학의 화두"라며 "특히 추리소설적 기법을 쓴 작품이 각광받고 있다"고 설명했다.출처
- 노벨상 얘기가 나올 때마다 번역이 얼마나 되고, 또 번역의 질은 어떻고 하는 얘기들이 많이 오가지만, 사실 단순히 번역만이라면 우리가 직접 돈과 노력을 들여서라도 해낼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해외의 수준높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야 하며, 연구자와 논문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 노벨문학상이란 건 결국 해외에서의 인정이다. 근데 미국, 유럽의 유명 대학에서 연구자 한 명 없고, 논문, 평론이 거의 나오지 않는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건, 마치 네이처등 유명 저널에서 거론되지도 않고, 논문 인용횟수도 적은 물리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기적같은 얘기이다.[9] 또한, 학계에 권위를 인정받은 저명한 교수나 평론가중에서 "한국문학은 이런 것이다"라고 대변해줄 수 있는 친한파가 있다면 꽤 도움이 될 것이다.[10]
4. 한국인의 문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
- 결국 노벨문학상은 국가 전체의 문학과 독서 문화 수준과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OECD 국가 중 1인당 한 달 독서량이 미국은 6.6권, 일본 6.1권, 프랑스 5.9권, 중국 2.9권, 한국 0.8권이고 이는 유엔 191개국에서도 166위로 최하위 그룹이다. 그나마 읽는 한 권의 책도 자기계발서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시간에 공부나 일을 하나라도 더 해서 성공하라는 관점이 많아서 결국 학생들은 입시를 위한 문제집을 읽고, 성인이 되면 자기계발서를 읽게되는 것. 심지어 베스트셀러에도 문학이나 기타 분야보다는 자기계발서가 많고 그나마 인기있는 문학 작품은 외국 문학이다. 잘 쓰는 법은 많이 읽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서구국가들은 독서나 문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나 인프라가 잘 되어있고, 동북아에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중국이나 일본도 독서량이 한국보다 높다. ### 댓글참조 또한 인구수와 영토 크기를 고려해도 우리나라의 도서관 수는 여타 나라들보다 현저하게 적은 편이다. 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창구로써 기능을 하는 도서관과 접할 기회가 드물다는 것이다.
4 기타
다른 노벨상 분야와 마찬가지로 뽑을 만한 인물이 없으면 뽑지 않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수상자를 뽑을 수 없었던 해도 있었기 때문에 그 해 수상자가 없을 수도 있다.
흔히 아시아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일본의 가와바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미 55년 전에 '시성' 타고르가 시집 〈기탄잘리〉(봉헌하는 노래)를 통해 세계 문학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수상하였다. 그 이외에도 이미 이스라엘에서도 가와바타 이전에 수상한 적이 있다. 만약 '동아시아'에서라고 한다면 최초는 맞다.
할복하기 전의 미시마도 한 때 제법 거론되던 후보였는데,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서 복거일의 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그가 8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설정되어있다.Sorry, 소잉카 그 외에 음악가로는 밥 딜런이 몇 번 후보에 오른 적이 있고 2016년에 수상하였다.
노벨상 수상을 하지 못한 유명 작가들도 많다. 러시아 출신임에도 영어로 걸작을 집필한 나보코프를 비롯해 프루스트, 보르헤스, 조이스, 톨스토이, 졸라, 체호프, 쿤데라 등. 트웨인은 후보에 열 번 가량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고 프로스트나 로스도 못받아서 그런지 미국에서는 노벨위원회가 미국에 인색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수상자는 꽤 배출한 편이지만. 전설급의 작가들이 못 받은 경우가 하도 많다보니 카프카[11]나 보르헤스의 경우, 그들이 노벨문학상을 못 받은 것은 그들의 수치가 아니라 노벨문학상의 수치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물론 카프카나 보르헤스뿐만이 아니다!
20세기 후반부터의 수상자 트렌드를 잘 살펴보면, 자신의 나라나 정부의 정책등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양심파가 수상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노벨상을 받자 정작 본국의 정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제법 있다. 파무크[12]나 오에, 그라스, 가오싱젠,[13] 옐리네크,[14] 알렉시예비치[15] 등이 좋은 예이며, 노벨문학상 소문이 간간이 도는 무라카미 하루키도 일본의 과거사나 원전문제 등에 대해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친정부적이라고 평가되면서 상을 받은 사람이 중국의 모옌인데, 그 점 때문에 그의 수상에 대해서는 뒷말이 좀 있었다.
5 수상자 일람
역대 수상자 목록은 역대 수상자에서 참고바람.
- ↑ 사실 원어를 따져보면 '문학'이라는 범위보다는 더 넓게 전반적인 '글'의 범위에 가깝다. 초기의 문학상이 그래서 인문학적인 글에도 수상했다.
- ↑ 노벨평화상에서도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수상을 거부한 베트남의 정치지도자 레득토가 그 케이스.
- ↑ 노벨상 후보는 비공개가 원칙이다. 매년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영국의 도박사이트 래드브록스에서 순위권에 들었다는 것. 노벨상 항목 참조.
- ↑ 한국의 해외 이미지는 극히 소수의 분야에 편중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메이저 분야이고 이 분야들은 문학과는 별반 관련이 없다. K-POP, 삼성전자와 LG전자로 대표되는 하드웨어 전자 제품, 조선업 등.
- ↑ 그가 꿈꾸던 최초의 노벨상 수상 한국인이 바로 전두환의 정적이었고 전두환과 투쟁한 공로가 인정된 사람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 ↑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영어 과목에서 영어 교수들이 직접 텍스트를 만들거나 한국인이 만든 영어 텍스트를 가져오지 않고 미국의 영자 텍스트를 가져오는 것이 이때문이다.
- ↑ 한국어 문서 참조.
- ↑ 적어도 세익스피어의 희곡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 게다가 여전히 현대의 관객과 독자들은 햄릿의 고뇌에 공감할 수 있고 오델로의 몰락에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심각하면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로 보이기 까지 하는 한국의 몇몇 문학들과는 달리.
- ↑ 가수로서 상을 받은 밥 딜런도 이미 오래 전부터 강단에서 그를 시인으로서 인정하고 연구논문이 나오고 있었다.
- ↑ 이 부분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괜히 모 도박사이트에서 이상한 장난질하는 것보다 서구의 학자들을 한국 편으로 포섭할 수 있는 장기적인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 ↑ 사실 카프카의 경우엔 생전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가 후대 비평가들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지지하려는 목적으로 가치가 세상에 드러났다. 알려진 대로 1950년대 이후에는 죽은 사람에게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는다.
- ↑ 파무크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쿠르드 학살 문제를 계속 끄집어내기 때문에 터키 정부는 그를 굉장히 싫어한다. 국민들도 찬반이 나뉠 정도.
- ↑ 반체제 인사로 프랑스에 망명했다. 중국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
- ↑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자국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가이다.
- ↑ 벨라루스의 반체제 작가로 정권의 탄압을 받아 10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알렉시예비치가 수상했을 때, 루카셴카 벨라루스 대통령은 그녀의 수상에 대해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축하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