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 ||||
1969 - 사무엘 베케트 | →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 | 1971 - 파블로 네루다 |
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1918년 12월 11일 ~ 2008년 8월 3일)
1 생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작가이다. 1918년 캅카스의 키슬로봇스크(Кисловодск, Kislovodsk)에서 출생했다. 로스토프 대학을 졸업하였고, 그 이후에 통신대에서 문학 관련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후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포병 장교로 자원하여 여러 전투에 참여, 붉은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44년 동프로이센에서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스탈린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내용과 조롱하는 표현이 문제가 되자 체포되어 굴락으로 보내졌다.
굴락에서 일반 죄수들처럼 지내던 중 수학을 잘하는 것이 발견되어 연구원 전용 수용소[1]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수용소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다시 굴락으로 복귀해[2] 석방될 때까지 다시 수용소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생활을 바탕으로 그의 역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썼다.
수감 생활이 끝난 후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어 유형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나 다행히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 스탈린주의로 그는 1956년에 사면되었고 이어 노비 미르(Новый мир)지의 알렉산더 투바노스키를 만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에는 소련 관료제를 비판한 <유익한 사업을 위하여>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제1원에서> 같은 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소련문단의 파문을 일으켰다.[3] 당연히 소련작가연맹은 그의 작품을 반소 작품이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심지어 굴락에서의 노동을 통한 개화를 주장하는 어용 작품과 솔제니친은 사실 죄수가 아니었다는 흑색선전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호응을 얻은 이후, 솔제니친은 굴락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수용소 당국의 현실, 재소자들의 사연과 증언들을 정리해 소련 수용소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원고가 KGB에 의해 발각되자 남은 원고들을 서방으로 밀반출 시켰고, 이 원고가 1973년에 발표된 <수용소 군도> 제1부였다. 당연히 소련 정부와 소련작가연맹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포기와 공개 전향,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했다.[4]
하지만 솔제니친은 조국을 떠날 수 없다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는 다르게 스웨덴으로 출국,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에 소련에서는 재입국을 거부했고, 그는 미국의 버몬트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냉전을 겪으면서 서방의 눈치보았던 소련에서는 그를 해코지하는 대신 그가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눈감아 주었다.[5]
2 망명과 귀환, 그리고 별세
1974년 이후 무국적이었던 그는 1990년 소련 국적을 회복했다. 냉전기가 종결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인 1994년에 귀국하였는데, 미국 체류중에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일로 반공단체로부터 미움을 받았었다.
이후 그는 그동안 정리한 수용소 군도를 4부로 출간하였고[6] 필생의 꿈인 러시아 혁명사를 집필하게 되었다.[7]
솔제니친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격변기 당시 옐친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지만 1992년부터 1993년 즈음 러시아 정부에서 급속히 추진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이 실패해버리고, 이에 대항해 일어난 시위를 유혈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옐친에게 실망, 반 옐친파로 돌아섰다. 귀국 후에 러시아 채널1의 TV토크쇼를 진행하고 <아르구멘티 이 팍티(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라는 신문[8]에 글을 기고하면서 옐친을 비판했다. 결국에 정부 비판적인 성향으로 옐친에게 밉보이면서 아예 프로그램 자체가 날라갔으며 이로 인해 1998년에 아예 훈장수여를 거부해버렸다.[9] 그러다가 푸틴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의 물질주의 세태 비판과 전통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회귀를 주장했으며 푸틴을 강력하게 지지했다.[10]
2008년, 그가 사망하자 러시아 언론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심 중 1명이었으며, 조국 러시아를 향한 긴 발걸음이 이제 멈추게 됐다." 라고 애도했다. 2008년 모스크바의 "대공산주의자 거리(Больш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улица)"가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거리(Улица Александра Солженицына)"로 바뀌었다.[11]
솔제니친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대체로 "조국의 어두운 점을 서방에 폭로한 자"라고 미움받지만, 그의 정치적 노선과 행보를 떠나, 적어도 그의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소련 시절의 굴락과 이로 대표되는 죄수들의 현실에 관한 묘사에 대해서는 러시아에서도 인정하는 권위자이다. 무엇보다도 솔제니친 본인이 비록 서방에 망명했을 지라도, 본인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굴락에서 생활하고 목격한 기록을 남겼던 만큼 작가로써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2006년 러시아 1 채널에서 그의 작품 중 '제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를 드라마로 제작, 방영한 적이 있다. 솔제니친이 해설 역할로 직접 참여했으며, 예브게니 미로노프 등이 출연했다.
3 작품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Один день Ивана Денисовича, 1962년)
- 암 병동 (Раковый корпус, 서방에서는 1967년 출판, 소련에서는 1990년 출판)
- 제1원에서 (В круге первом, 서방에서는 1968년 출판, 소련에서는 1990년 출판)
- 수용소 군도 (Архипелаг ГУЛАГ, 서방에서는 1973-1975년 출판, 소련에서는 1989-1990년 출판)
- 붉은 수레바퀴 (Красное колесо, 1993년)
- 200년을 함께 (Двести лет вместе, 2001년 1부 출판, 2002년 2부 출판)
4 여담
- 소련시절에는 반소작가로써 명망이 높았지만, 소련이 망하자 러시아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특히 체첸전 당시 체첸 분리주의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할것을 주장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의 작품 수용소 군도에 따르면 그가 막 자유의 몸이 돼 사회생활을 재개했을때 체첸인 특유의 사소한 일로도 수틀리면 대뜸 흉기를 대동하고 다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습성을 직접 목격하는 장면이 나와 체첸인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기 충분한 장면이기도 했다.
사실 체첸인은 호전적인 성격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골치아픈 취급을 받고 있다.[12] 물론 근본적으로 보면 이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꾸준히 체첸인을 학대해 온 러시아인들에게 잘못이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같은 체제비판 작가이면서도 톨스토이 급으로 대우받기는 힘들듯 하다. 러시아 현지에서도 평이 매우 갈리기도 하고, 냉전이 끝나자 서방에서도 거의 찬밥신세가 되었으니...
-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성향때문에 그의 작품들이 그저 선전소설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문학성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한다. 러시아 대문호들의 계보를 이을만한 문학성을 지녔다고라는 평도 있고 박노자씨 같은 분에 따르면 초기의 신선하고 충격적인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후는 별로라는 평도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의 삶과 그 속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 병동", "제1원에서", "수용소 군도"같은 초기작들과 자신의 정치적 사상과 역사적 관점에 대해 서술한 "붉은 수레바퀴", "200년을 함께" 같은 후기작들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며 읽는게 좋다.
- 한국에도 반공작가로 초청받은적이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 욕은 하지 않고, 독재와 검열을 가열차게 까서...
- 이사람 초청 기획한 사람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한다.....지못미..
- 공산주의 유머항목에도 있듯이 이 사람의 인기작들은 90년대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금서여서, 소련 내에서 타자기로 쳐서 유포되었다고 한다.[13] 이후 고르바초프의 자유화 조치에 의해 금서가 대거 해제된 1990년 비로소 소련에서 정식 출간되었다.[14]
- 레프 톨스토이를 상당히 존경해서 여러 작품에 오마쥬가 나온다. 붉은 수레바퀴 연작은 아예 전쟁과 평화에 바친다고 할 정도였고,
그래봤자 미완1부인 1914년 8월에서는 아예 앞부분에 노년의 톨스토이가 나온다.
- 한국에서는 반공작가로 분류되어서 오래전부터 번역본이 나왔다. 그러나 갈수록 떨어지는 국민 평균 독서량을 자랑하듯, 솔제니친이 사망했다는 뉴스에는 빨갱이가 죽었다는 등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댓글들이 달리며 병림픽이 열렸다.
-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 교수는 솔제니친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한다. 하지만 수용소의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확고한 도덕적 명분이 있는 솔제니친을 직접 디스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가 제기하는 논점과 이야기들을 인용한다. 그는 솔제니친이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읽은 러시아 작가중 한명인지라 직접 비판하지는 못하겠지만, 평소 그의 정치적 신념에서 우파 민족주의 성향의 반소 작가를 호의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헨리 키신저는 이 사람을 매우 싫어했었다. 실리주의자였던 키신저를 생각해보면, 소련을 나와 서구에서 반소련운동을 펼친 이 사람이 썩 달갑진 않았을것이다. 기껏 소련과 화해무드를 만들어놨는데 소련을 자극했으니...
- 반체제 작품 때문에 추방의 형식으로 서독으로 망명한 후 피부에 염증이 나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 인위적인 독극물 중독 가능성이 큰데 이 때문인지 솔제니친 자신은 러시아에 귀환할 때까지 철저한 은둔 생활을 했다. 나중에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KGB는 실제로 솔제니친이 누구도 믿지 않도록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공작했다고 한다.
- 1993년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는 방데전쟁에서 학살을 저지른 프랑스 혁명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 당연하지만 당시 프랑스 집권 사회당 정부에서는 불쾌해하며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으나 조국 소련에 살던 시절에는 소련을 까고 추방되어 미국에 살던 시절엔 미국을 까던
모두까기 인형사람답게 별로 거리낌 없이 비판했다.
- ↑ 이런 수용소를 샤라슈카(Шарашка)라고 부른다. 당시 소련 과학, 기술 분야에서 한 가닥했던 코롤료프, 투폴레프 등이 바로 이런 곳에서 지냈다. 샤라슈카의 분위기는 훨씬 느슨한 편이어서, 다른 일반죄수들과 같이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았고, 가끔씩 면회가 허용되었다.
- ↑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제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이다.
- ↑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당시 수용소에서 철 지난 잡지를 통해 솔제니친의 작품을 접한 죄수들이 국가가 무슨 이유로 이런 작품이 나오도록 방조했나라고 했을 정도.
- ↑ 솔제니친은 노벨상 포기는 생각할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수상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당연히 거부당했다.
- ↑ 스탈린 이후 소련은 심각할 정도로 체제를 위협한 게 아니라면 자국 내 반체제인사의 이주 허가를 내주거나, 미국에서 잡힌 스파이와 맞바꾸는 식으로 내보냈다. 이 과정은 2015년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 ↑ 굴라그의 생활과 고문을 그린 1~2부 이후는 대부분 혁명 이후의 소련 사회와 소련 보수작가들의 고인드립이 많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데로 이 작품 자체가 거대한 연작의 일부로 구상되었기 때문
- ↑ 이 작품은 끝내 미완되었으나 붉은 수레바퀴라는 이름으로 3부작이 출간되었다.
- ↑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신문 중 하나로, 일반적인 뉴스보도 방식과는 달리 의견을 두고 의견을 개제하는 방식으로 발행된다.
- ↑ 훈장 수여 거부 사유를 밝힐 때 대놓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간 지도자가 주는 훈장은 받을 수 없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 ↑ 아닌게 아니라 그의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옐친 이후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던 푸틴의 입맛에 딱 맞았다. 실제로 솔제니친은 푸틴의 지원을 많이 받아, 장례식도 국가장으로 치룰 정도였다.
- ↑ 소공산주의자 거리는 2005년에 스타니슬랍스키 거리(Улица Станиславского)로 바뀌었다.
- ↑ 러시아에서 체첸인들은 안 그래도 체첸전부터 지속되어 온 테러로 이미지가 매우 나쁜 터라 러시아에서 이들이 받는 혐오는 상상을 초월한다.
- ↑ 이런 출판물을 사미즈다트(Самиздат, 자가(Сам) + 출판(Издать)에서 따온 말이다)라고 부른다.
- ↑ 이 때 조지 오웰의 1984년 등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