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칠레 대통령 | |||||||
31대 | → | 32대 | → | 33,34,35대 | |||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 → | 살바도르 아옌데 | →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
TENGO FE EN CHILE Y SU DESTINO.(나는 칠레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Salvador Allende Gossens M.D.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대통령 관저 모네다궁 앞에 세워진 아옌데의 동상 좌대에 새겨진 문구. 이 문구는 그의 최후 연설에 나온 것이다.
목차
1 젊은 시절
1908년 칠레 발파라이소에서 태어났다. 아옌데의 집안은 칠레의 정치 명문가[1]였고 아옌데 자신도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어린 시절 집 근처에 살던 구두 수선공으로부터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고 칠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학도의 길을 걷던 중 칠레 민중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뭔가 체 게바라와 인생 경로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2 정계 진출
칠레에는 합법적 활동을 인정받은 공산당이 이미 있었지만 아옌데는 공산당 보다는 사회주의 정당이 더 칠레의 현실에 맞다고 판단하고 1933년 칠레의 사회주의 정당인 칠레 사회당의 창당에 참여했다. 1937년 칠레 사회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치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의사출신인 탓에 1938년부터 42년까지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에 해당하는 후생장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5년부터 4번 내리 연속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세번이나 대선에 출마했지만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열, 그리고 보수진영의 격렬한 방해공작으로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3 대통령 당선
1970년 대선을 앞두고 칠레 사회당과 공산당은 더이상 진보진영이 분열해서는 대선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칠레 공산당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대선 후보로 선출하려 했으나 네루다는 대선출마를 포기하고 사회당과의 연합을 주장했다. 결국 사회당과 공산당은 연합하여 인민연합을 결성하고 인민연합의 대선후보로 아옌데를 내세우게 되었다. 재밌는 것은 아옌데가 정작 자기 당인 사회당 안에선 별로 인기가 없었고 공산당이 더 아옌데를 밀었다는 것이다. 공산당이 불법으로 지정되어 활동이 어려웠을 시절 아옌데가 사회당원으로서 공산당의 권리를 옹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칠레 사회당은 '소련의 조종을 받지 않는 사회주의 정당'이란 것을 내세워 공산당과 자주 대립했는데 아옌데가 여기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치열했던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인민연합의 아옌데가 보수진영측의 호르헤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을 2%차의 근소한 차로 누르고 1위로 당선했다. 그러나 아옌데나 알레산드리 전 대통령이나 과반득표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에 따라 의회가 상위 1, 2위 후보중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되어있었다. 의회가 아옌데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편 전세계적인 사회주의 확산을 걱정하던 미국은 반미 성격이 강한 아옌데의 당선에 당혹해 하면서 칠레 내정을 흔들려 했다. 그리하여 군부의 정치불간섭 주의를 고수하던 르네 슈나이더 칠레군 총사령관을 납치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르네 슈나이더는 납치는 면했지만 총에 맞아 부상을 입어 3일만에 사망했다.
- 르네 슈나이더 납치미수 사건에 과연 CIA가 개입했는지에 대해서 CIA는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정황적으로 개입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후에 헨리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자신이 CIA의 그런 계획을 막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키신저의 이런 해명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4 개혁과 실패
아옌데는 자신과 비슷한 정강을 내세운 기독교민주당과 공조하여 1970년 11월 3일 칠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칠레는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스런 별명을 들을 정도로 미국과 칠레 내부 기득권층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심한 실정이었다. 심지어는 다국적 기업들이 칠레의 탄광이나 구리 광산등을 독점할 정도였다. 아옌데는 취임 이후 이런 칠레의 왜곡된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민중들을 잘살게 하기 위한 사회주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다국적 기업들이 소유한 탄광, 구리광산들과 대형 은행들을 국유화했고, 영양부족으로 유아사망률이 심했던 칠레의 상황을 고려해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우유를 배급하는 정책도 추진했다.[2] 다른 한편으로 다국적 기업과 미국, 부유층의 과도한 대토지 소유[3]를 규제하고자 사유지의 4분의 1 내지 5분의 1을 국유화하는 토지개혁도 추진했다. 이러한 국유화 정책들은 민중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한 측면이 컸다. 컴퓨터를 계획경제에 활용한 사이버신 계획이라는 것도 수립되었다.
이런 사회주의 개혁의 성과로 칠레의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7%였고,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8%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이렇게 칠레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인민연합 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1971년 지방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좌파정부인 아옌데 정권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옌데 집권 초기에만 경제가 잘 굴러갔지 집권 2년차가 되자 칠레 에스쿠도화의 가치가 하락하고 각종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로 도리어 물가가 상승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이 정책들은 칠레 자본가 계층과 보수 야당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다국적 기업들 역시 반발하여 칠레에 대한 경제 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더욱이 미국은 아옌데 정권을 못마땅하게 여긴 판국에 아옌데의 반미정책과[4] 다국적 기업 국유화 정책에 빡쳐서[5] 칠레 경제를 고사시키는 작전을 썻다.
미국의 칠레 경제고사작전은 실로 치밀했다. 칠레의 주요수출품은 구리였는데 칠레의 구리수출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미국은 비축한 구리를 대량으로 방출해 세계 구리 가격을 폭락시켰다.[6] 또한 칠레에 대한 계좌동결로 대외차관을 막았으며 생필품, 의료품의 수출을 통제했다.
게다가 후에 밝혀진 바로는 미국 CIA가 쿠데타를 거의 조종했다. 피노체트도 주도적으로 쿠데타를 모의한 것이 아니라 CIA가 만들어준 각본에 의해 군부에 떠밀려 쿠데타의 주역을 맡은 것이다.[7]
다만 우익적인 입장에서는 아옌데 정권의 경제정책이 워낙 조급하게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이 격렬해졌으며, 국유화된 기업들의 경영권을 원래부터 그 기업의 관리사원이었던 사람이 아니라 낙하산 인사로 채워넣었기 때문에 국유기업들의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투자가 이루어 질 수가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사실, 칠레의 구리광산들은 이 시기에 국유화가 되었어도 경영진들의 관리가 워낙 엉망이어서 증산이 아니라 감산 일변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원조성 구리 주문조차 제대로 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8]
아옌데 정권은 진보진영의 내분과 미국의 은근한 압박 속에서도 야금야금 지지율을 올리고 있었고, 1973년 총선에서 대통령 불신임을 여유있게 막아낼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9]. 이로써 합법적 수단으로 아옌데를 실각시킬 힘을 잃은 보수파는 반공 성향이 강한 군부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달라 부탁했고, 군부가 이에 호응해 1973년 6월 22일 1차로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군부의 중립을 강조하는 카를로스 프라츠 육군참모총장 겸 내무부 장관에게 사전에 간파당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아옌데는 최후의 정치적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국민투표를 제의했다. 그러자 보수파는 국민투표를 받아들이는 대신 육군참모총장을 친미 극우파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로 교체할 것을 제의했고, 아옌데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를 승낙한다. 그리고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참모총장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산티아고는 피바다가 된다.
아옌데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고별을 고했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 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 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카스트로에게 선물로 받은 AK47[10]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했다.[11] 이후 그의 죽음은 영웅적인 항전 끝에 사살 당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 낭설이 처음으로 나돌게 된 원인은 카스트로가 했던 아옌데 추모 연설이다. 이후로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것이 사실처럼 떠돌게 되었는데, 결국 2011년 7월 재부검 결과 확실한 자살로 결론났다.관련 기사 피노체트 군은 사망한 아옌데의 시체를 휘발유를 부어 황금 AK 47과 함께 소각한뒤, 타고 남은 재와 뼈를 내다 버렸다.
아옌데의 안경의 일부. 유일하게 남은 아옌데의 흔적이다.
오늘 산티아고에 비가 내립니다에서 제목을 따온 1975년 프랑스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있다. 1973년에 피노체트가 독재자가 된걸 생각하면 프랑스라고는 해도 정말 빨리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진 편. 영화 내용도 아옌데가 죽고[12] 피노체트가 독재자가 되는 그 내용을 담고 있다.
관련된 다큐는 칠레 전투(Battle of Chile)[13]가 있으니 궁금하면 찾아보자.
6 비판과 평가
6.1 온건좌파의 견해
아옌데의 실패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급진적인 측에서는 그가 지나치게 온건했고 칠레를 온건하게 개혁하려고 한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있으며 또한 그가 기득권층과 미국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는 군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한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14] 더욱이 의회 내부는 연정을 이룬 기독교 민주당이 아옌데의 개혁에 반기를 들며 사사건건 충돌했기 때문에 개혁이 지지부진한것도 문제였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광산과 은행의 국유화는 남미에 퍼져있던 수탈 이론과 칠레에서 심해지고 있던 반 외국인 정서[15]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아옌데가 국유화 이후에 다국적 기업에게 정책 협조를 구했던 점, 그리고 아옌데가 권력의 기반으로 선택했던 민족주의와 온건 좌파의 트로츠키주의와의 충돌 등으로 인해, 이론적으로도 칠레의 온건좌파와 어긋나는 행보를 보였던 점도 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6.2 급진 좌파들의 견해
MIR(혁명 좌파 운동) 등의 극좌들과의 견해차도 큰 문제였다. 미르 출신의 역사가 가브리엘 살라사르는 아옌데가 미르에 전면동조하여 민중권력 정부를 새로 구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틈만 나면 아옌데를 비판하는데, 여기에는 쿠바의 지원을 받아 쿠바식 혁명을 원하던 미르와 큰 틀에서나마 소련의 권고를 따른 합법혁명 노선을 지키려던 아옌데 사이의 갈등이 있다. 오늘날 쿠바가 어떤 짝이 났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겠다.
MIR 등 더 좌파적인 시각의 견해는 그가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추구했지만, 실제로 사회주의 정치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충돌을 조율할 시점이 오면 언제나 일관되게 자유주의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 또한 아옌데는 사회주의 세력이 과격하게 움직이면(무토지 농민의 토지 점거 등) 법치를 주장하며 막고 적극적으로 분쇄한 데 반해, 자유주의 우익 세력이 과격하게 움직이면 강경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언제나 협상과 양보로 일관했다고 해석한다. 이 때문에 부르주아 우익 세력은 시간이 갈 수록 아옌데 정권에 도전할 용기를 얻었지만 사회주의-노동계열의 조직들은 갈 수록 연계가 분쇄되었다고 평가한다.
여하간, 아옌데 정권에 당시 칠레의 급진적인 노동세력은 큰 실망과 좌절을 느꼈다. 산티아고의 가장 전투적인 공장 가운데 하나인 엑스수마르의 한 노동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나는 사장들에 대한 양보 조처가 정부의 우경화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분명 정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구하고 애초의 프로그램을 시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사실상 그럴 뜻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대중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러 나서자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지금 우익은 축제 분위기일 것이 틀림없다. 그들의 라디오 방송만 들어 봐도 의기양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정권을 따돌리고 민중 조직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MIR등의 주장에 따르면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73년 8월에 아옌데 내각은 무기통제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군대가 치안유지를 빌미로 대중조직들에게 선제공격을 할 수 있도록 법적인 보증을 서준 꼴이었다. 물론 이 법이 만들어진 필요는 총을 들고 설쳐대는 극우 깡패와 극좌 혁명주의자들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가 이 무기통제법을 등에 업고 움직인다고 해도 합법적인 틀을 유지하려면 대통령의 계엄령이 필요한데, 아옌데는 이걸 승인해줬다는 것. 그리고 다음달인 9월이 되자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대통령궁을 향하여 우익과 군부는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는 해석이다. 그렇기에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은 아옌데를 배신자이자 실패하고 경계해야할 모델로 여긴다.
여하간 이런 사민주의자들에 대한 자칭 사회주의자들(혁명주의자)들의 불신적 논리는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라, 아옌데에 대한 이런 비판도 대단히 원색적이고 전형적인 비난에 가깝다.
6.3 우파들의 견해
보수우파적인 우파에서는 아옌데 정부는 무능 했으며 제대로 된 집권을 하지 못 했다고 비판한다. 아옌데 정권이 할 의지만 있었지 현실적으로는 다른 상황과 능력 부족으로 스스로 피노체트 군부 독재정권의 출연을 자초했다는 것. 아옌데 정권 자체의 경제정책도 너무 낙관적으로 짠 것이라 사회당보다 오히려 더 온건했던 공산당 쪽에서 자꾸 누그러뜨리려고 할 정도였던 것도 사실이다.
쿠데타 전까지 아옌데 정부의 지지율은 과반수를 넘긴 적이 없었다. 인플레이션도 잡지 못해 오일쇼크 전까지 190%라는 기록적인 상승률을 보였다. 일부 음모론적 좌파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개입설과는 달리, 미국은 베트남전으로 구리 보유분을 방출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무리한 국유화로 인플레이션 등 악화위기에 직면한 아옌데 정부는 더욱 큰 위기를 스스로 자초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의 개입과 보수의 우려 보다는 아옌데 정부의 무능에서 찾아야 된다는 논리다. 왜냐면 1971년은 오일쇼크 전이였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리가 없음에도 그는 무리한 국유화를 벌였다. 영국계나 미국계가 잘 관리하던 광산을 갑작스럽게 국유화를 하므로, 관리적인 면에서 극도로 생산성이 감소했다. 게다가 늘어난 인플레이션으로 외국계 자본이 전부 칠레를 빠져나갔다. 이런데, 누가 차관을 제공하겠는가? 마치 미국이 아옌데 정권이 기겁해서 차관투자를 거부한것이 아닌, 돌이킬 수 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등 총체적인 부정적 상황은 미국이 차관투자를 거부하게 했다는 논리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인플레이션이 정권에 대한 고의적인 방해를 했던 기업가들과 자본가들이 공급거부를 한 탓이 크며, 아옌데 정부만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부적절하다. 아옌데에 대한 미국의 방해는 아옌데 집권 이전부터 계속 있었으며, 아옌데가 집권한 이후 더욱 심해졌다. 즉 아옌데의 집권 이전부터 쿠데타까지 미국은 칠레 좌파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민당과의 연대도 아옌데 정부가 꼭 해야 했다고 한다. 그는 과반수를 다 잡지 못한 상황에서 정책을 이끌고 할려면 반드시 연립정권의 형태를 유지해야 했다. 기존 정권을 잡은 정당들은 아옌데의 급진적 개혁에 소극적이였고, 좌파 정당인 공산당-사회당 조차도 그의 개혁에 미심쩍은 반응이였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발생한 경제적 위기는 아옌데의 정치적 위치를 약화했다. 그의 무능한 정치력은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쿠데타를 방조하고 자초하기까지 했다. 다만 야당 중 가장 온건하다던 기민당은 정부와의 협력을 원하는 칠레 교회의 계속된 요청이 있었음에도 끝까지 정권에 대한 타협을 거부했다. 즉 아옌데의 정치력 문제보다는 이미 많이 벌어진 칠레의 양극화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봄이 타당하다.
한편, 정말 극단적인 부류들은 이른바 "플랜 Z"라는 걸 주장하는데, 이에 따르면 아옌데가 1972년 말에 이르러 친위 쿠데타 계획을 소극적 관여나 불간섭으로 일관했고, 보수세력들은 이 때문에 극좌파들의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 아옌데에 대한 옹호자들은 물론 비판자들조차 특별한 언급을 하지는 않는데, 이 플랜 Z라는 극좌파들의 계획자체가 너무나 엉성했고, 피노체트와 아옌데 양측 다 관련이 없다. 심지어 곤살로 비알 같은 극소수 칠레 극우 역사학자들 빼면 이 "예방 쿠데타"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예를 들어 켐브리지 대학의 조너선 해즐럼(Jonathan Haslam)은 <닉슨 행정부와 아옌데 - 칠레의 죽음>이란 책에서도 온갖 문서와 서류를 들이대며 아옌데를 비웃고 조롱하지만 이 Z 계획이란 것엔 아무 무게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아옌데 정권의 무능함이 그래도 국민 투표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 된 대통령을 군사 쿠데타로 몰아 내고 수십만의 희생자를 낸 불법 살인 정권의 등장과 이에 대한 동조나 지지를 정당화시켜 준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논리이다. 당장의 정책적 성과로 정권의 정당성을 평가한다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6.4 총론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
~극좌/극우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지만, 여하간 아옌데는 칠레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시대의 반발에 살해당했을지언정 칠레의 민중을 위했던 자신의 신념만은 역사의 정당한 판결을 받아 2008년 칠레 국영 방송국에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을 뽑는 프로그램인 Grandes Chilenos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문학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오촌 당숙(아버지의 사촌형제)이다. 이사벨 아옌데는 쿠데타 이후 감시 대상이 되었고 결국 해외로 망명해야 했었다. 이때 그녀 자신이나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겪은 끔찍한 경험들은 데뷔작 '영혼의 집'에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
아옌데는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장녀 베아트리츠(1943년생)는 1973년의 쿠데타 직후 쿠바로 망명했지만, 4년만에 타계했다. 차녀 마리아 이사벨(1945년생)은 1990년대 칠레가 민주화된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상원의장 등의 요직을 거쳐 현재 사회당 당수로 재직하고 있다. 베아트리츠의 딸이자 손녀인 마야 페르난데즈 아옌데는 2012년 칠레 지방선거에서 산티아고의 현직 보수 구청장을 꺾고 승리했으나 재검표 과정에서 석패했다. #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재임 : 2006년 ~ 2010년)의 20대 청년 시절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고문 휴유증으로 사망한 공군 소장 아버지를 두고 있었고,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피노체트 정권에게 고문을 당하는 등 아옌데와 관련이 깊었다. 퇴임 직전 지지도가 85%로 높았으나, 연임 제한 규정으로 한번 쉬고 2013년 말 다시 당선되었다.
쿠데타에서의 미국의 개입 여부는 CIA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 좀더 확실한 평가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16]
1970년대에 아옌데는 우익 쿠데타에 물러난 사회주의 겸 진보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사회주의 계열 소설로 유명한 강철군화의 표지는 "강철군화(폭력적 우익을 상징)"에 짓밟힌 아옌데 팜플렛으로 디자인되었다. 80년대 한국에 번역된 표지 뒷면도 이 표지를 사용하고 있다.
7 관련 항목
- ↑ 조상인 파딘 아옌데는 칠레 프리메이슨의 그랜드 마스터였다. 아옌데 자신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나.
- ↑ 이 정책은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이던 네슬레의 칠레 축산업 시설을 강제로 국유화한 후에 네슬레에게 인도적인 협조를 요청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서,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었다.
- ↑ 당시 칠레에서 중간 정도 밖에 안된다는 양조장이 직영 포도밭 면적만 1만 에이커를 넘겼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가 아닌 칠레를 갔어야 했다 - ↑ 미국이 싫어하는 반미국가 쿠바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 당시 칠레와 쿠바가 얼마나 친했냐면 쿠바 대통령 카스트로가 한달에 한번씩 칠레를 방문할 정도였다.
- ↑ 왜냐면 칠레에 대한 전체 외국투자 중 미국의 투자가 점하는 비율이 80%가 넘었다. 즉 칠레 다국적 기업의 대부분이 미국 기업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이 칠레 경제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니 다국적 기업 국유화는 미국에게 큰 손실을 주는 것이다.
- ↑ 사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지상전이 일단락되어가는 시기라 탄약용 구리의 수요가 대폭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미국의 재정상황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수요도 사라지고 그나마 돈이 좀 되는 구리의 비축분을 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꿩먹고 알먹고였던 것. 비슷하게 쿠바의 주요 수출품인 설탕에 대해 제재를 하고 사탕수수밭을 대규모 폭격하여 쿠바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 ↑ 이렇게 소극적으로 수장을 맡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철권통치를 휘둘러 수천명-수만명을 학살했을정도.
- ↑ 1973년 9월 11일 발생한 쿠데타로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자행된 군부의 만행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당시 라디오 방송의 멘트. 쿠데타와 관련된 언급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앵커는 저 멘트만 계속해서 내보내야 했다. 참고로 산티아고는 지중해성 기후에 속하며 맑은 날씨가 1년에 300일 가까이 되는 곳이다. 따라서 쿠데타를 비오는 날에 비유했다는 것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상원 50석 중 20석, 하원 150석 중 62석.
- ↑ 대통령 당선 당시에 선물로 받아 집무실에 장식한 소총인데, 순금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관련되었던 미국 정보기관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총 한자루가 아옌데에 대한 미국의 방침을 결정짓게 되었다던가 뭐라든가.
- ↑ 머리가 쪼개지고 뇌가 벽에 흩뿌려졌다고. 흠좀무.
- ↑ 영화에서는 아옌데가 항전중 사살되고 피노체트 정부가 이를 조작해서 아옌데가 자살한것처럼 꾸민것으로 나온다.
- ↑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한 덕분에 한글자막이 씌워진 작품을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화질은 기대하지 말 것.
- ↑ 사실 야당이 다수파였던 의회는 아옌데가 대통령에 오르는 것을 찬성하는 대신 군대와 관련된 대통령 권한을 확 줄여 버렸다. 따라서 군대 견제를 더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비슷하게 정권이 위험한 상황에서 집권했던 또 다른 칠레 대통령 아르투로 알레산드리는 아예 대놓고 엄청나게 잘 무장한 중산층 이상 시민 중심의 민병대를 만들어서 정권을 지킬 수 있었던 것과 참 비교된다.
- ↑ 국적과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
- ↑ 다만 미국 측은 2000년에 한번 미국이 칠레에서 한 첩보행위가 칠레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왜냐면 미국은 칠레를 중남미에서 (동맹국은 아니고) 중요 우호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