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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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헐리의 공식 초상 |
Patrick Jay Hurley (1883년 1월 8일 ~ 1963년 7월 30일)
1 소개
패트릭 헐리는 미국의 공화당 정치가이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밑에서 전쟁장관, 중일전쟁-국공내전 시기 주중 미국대사를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패트릭 헐리는 1883년 1월 8일 당시 촉토 인디언들의 영토인 오클라호마 자치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부터 가족들과 함께 탄광에서 일했으며 13살 때 어머니를 잃고 힘들게 자랐는데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어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동시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했다 한다. 그러다가 필립스 마을에 야간 학교가 생기자 그곳에서 공부했고 낮에는 광부 겸 노새 몰이꾼으로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는 촉토 자치령 출신이라서 어릴 때 촉토족 인디언들과 함께 말을 타고 놀면서 그들과 매우 친해졌고 몸에 인디언 습관이 배어 인디언들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이 되었다.
1898년 미서전쟁이 발생하자 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의용기병대 러프 라이더에 참여하려 했으나 15살 밖에 되지 않았단 이유로 거부되었다.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현재의 바콘 대학인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에 들어가서 1905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이후 오클라호마 원주민 관련 기관에서 일하다가 1908년 워싱턴 D.C로 이주하여 후에 조지 워싱턴 대학 법학대학원의 일부가 되는 내셔널유니버시티 로스쿨에 입학했다. 그러던 그는 갑자기 시어도어 로스벨트의 집무실에 예고도 안하고 들이닥쳤다. 그리고 루스벨트에게 당신의 기병대에 들어갈 뻔 했으니 정부에 일자리를 하나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루스벨트는 당신에게 자리를 주면 그냥 주정뱅이가 될 것 같으니 고향에 가서 일하라고 거부했다.
1년 만에 법학 학위를 얻은 헐리는 오클라호마 2의 도시인 헐사에서 영업을 시작, 1911년에 털사 변호사협회 회장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28세였다. 당시 그는 석유 회사들을 위해 주로 일했고 분쟁조정에 능해 많은 돈을 벌었다. 이후 그는 원주민 지역 행정관련 법 전문가로써 토지의 불법 양도에 관해서 상대를 성경에 나온 기본법(모세의 십계명의 도둑질 하지 말라)도 안지킨다고 공박하며 활약했다.
2.2 정계 입문
그러다가 그는 오클라호마 상원의원 자리에 공화당에 입당하여 도전했으나 떨어졌다. 그러던 중 그의 친구인 촉토 혼혈인 빅터 로크란 사람이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에게 촉토네이션 수장에 임명되는 일이 벌어졌다. 빅터 로크는 친구인 패트릭 헐리에게 2만 8천명에 달하는 촉토인들을 위한 공인 변호사에 임명했다. 헐리는 118건의 소송에 차며, 115건에서 승소했고 이런 활약으로 촉토족의 권익을 크게 보호하며 촉토족에 대해 행해진 각종 인권유린과 침략행위에 대해 고발하며 그들을 변호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그는 오클라호마 주방위군에 들어갔다가 다시 1917년 프랑스 원정 미군에 참여하여 대령까지 진급했고 DSM 메달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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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전임 장관 제임스 굿 앞에서 선서하는 신임 장관 헐리 |
1916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헐리를 책임있는 자리에서 사익을 위해 일하지 않은 얼마 안되는 사람 중 하나라고 칭찬하며 그를 재임용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당선되자 후버는 그를 1929년에 미국 전쟁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1933년까지 장관을 지냈고 후버가 재선에 실패하자 다시 변호사 영업을 재개했다. 1939년 그는 멕시코 정부가 싱클레어 석유회사의 재산을 몰수한 사건을 맡게 되었다. 멕시코 정부의 조치에 미국 전체가 분노하였고 멕시코 역시 강경하게 나가서 사람들은 평화적 해결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헐리는 양쪽의 강경파들을 모두 설득시켜 미국은 멕시코의 주권을 인정하고 멕시코가 싱클레어 회사의 재산권을 보상해준다는 합의를 이끌었고 100만 달러에 달하는 사례금을 받았다. 이러한 엄청난 일을 성사시킨 그가 열렬한 공화당원이고 뉴딜에 대한 반대자임에도 새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패트릭 헐리를 쓰기로 결심했다.
2.3 2차 세계대전
1941년 진주만 공습이 발생하자 루스벨트는 헐리를 백악관에 불러 "해적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헐리에게 바탄 반도에 고립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구출할 방도가 필요하다고 했고 헐리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맥아더에게 탄약과 보급품을 조달하는 임무를 했는데 그는 이 과정을 위해 일본 깃발을 게양하고 일본 선박인 것으로 위장하는 전술을 썼는데 즉 해적으로 간주되어 처형당해도 할말 없는 행위를 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두척의 배를 잃자 헐리는 어차피 배도 적고 계획도 모자라고 인원도 적고 총도 없었다는 한탄했다. 결국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했고 미군과 필리핀군은 포로가 되어 일본군의 악랄한 학대 속에서 죽어갔으니 이것이 바로 죽음의 행진이다.
2.3.1 스틸웰 해임
1943년 그는 장제스를 카이로 회담에 참석시키기 위한 루스벨트의 특사로써 미국에 왔고 1944년 9월 6일 다시 특사로써 중국에 파견되어 대륙타통작전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워진 중국 상황을 수습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주중 미국 대사 클레런스 가우스는 자신이 잘리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나 헐리는 서부에서 카우보이들이 총격전을 벌여도 상관없는 이발소의 손님을 맞추진 않는다는 농담으로 그를 안심시켰으나 사실은 가우스의 예상이 맞았다.(...) 9월 8일 장제스를 만난 헐리는 기존의 미국 동부 출신 엘리트들과는 다른 카우보이 기질로 장제스의 호감을 얻었다. 헐리는 장제스에게 모든 중국군의 지휘권을 스틸웰에게 주라는 루스벨트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 중국군에는 공산당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이성과 상식으론 수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크게 반발했으나 이에 타협하여 여러 가지 조건을 제시했지만 미국 정부의 입장은 강경했다. 장제스는 9월 7일 스틸웰을 불러 스틸웰을 전선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 신경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헐리는 험악해진 중미관계를 조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9월 19일 즈음에는 헐리가 스틸웰을 중국 육군과 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막강한 권한을 준다는 조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틸웰의 폭주가 회담을 망쳤다. 스틸웰은 장제스가 자신의 버마 작전을 망치고 있다고 성을 내며 미국과 중국 정부 모두에 자신에게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마셜과 함께 퀘벡에서 동맹국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루스벨트는 장제스에 대해 이젠 상당히 경멸과 회의를 품고 있었고[1] 스틸웰의 주장을 수용, 마셜이 작성한, 장제스에게 Y부대를 즉각적으로 증강하고 모든 병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지휘관을 스틸웰에게 보장할 것이며 따르지 않으면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란 위협을 담은 전문에 서명했다.[2]
"최근 몇달 이래 저는 되풀이해 당신과 중국을 향해 바싹 접근하고 있는 재난에 저항하여 강력한 행동을 취하라고 재촉했습니다. 당신이 아직 스틸웰 장군에게 모든 중국군의 지휘권을 넘기지 않고 있는 지금, 우리는 관건적인 지역을 잃을 위험성에 직면해 있고 (...) 이로 인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쪽지를 받은 스틸웰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즉각 황산의 장제스 관저에서 장제스와 협상하고 있던 패트릭 헐리를 만났다. 장제스로부터 중국군 지휘권을 받아 스틸웰에게 주려던 헐리는 스틸웰이 자신을 따로 만나고 싶단 요청에 그와 만났다. 스틸웰은 의기양양하게 쪽지를 보여주었고 스틸웰은 이를 읽고 이것이 너무 모욕적인 내용이라 여기고 스틸웰에게 이 쪽지를 굳이 보여주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게임은 당신이 이겼소. 당신이 중국 군대를 지휘하고 싶다면 대원수가 이미 동의한 내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장제스에 대한 앙금이 쌓여 있던 스틸웰은 '잡놈의 새끼'의 머리가 '흙먼지에 떨어지는 꼴'을 봐야겠다고 강변하며 장제스에게 달려갔다. 스틸웰도 처음엔 잠시 차만 마시며 말을 시작하지 못하다가 잠시 후에 루스벨트의 쪽지를 전달하겠다고 외쳤다. 중국어로 번역된 쪽지를 읽은 장제스는 말 없이 찻잔을 뒤집어 회의가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스틸웰과 헐리가 나가자마자 장제스는 평생 이러한 모욕을 당해본 일이 없다고 한참을 통곡했다. 스틸웰이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땅콩의 얼굴을 결판냈다"며 자신의 승리를 자랑할 동안 장제스는 미중동맹을 끊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9월 24일 장제스는 헐리에게 스틸웰을 해임하겠다고 태도를 전환했다. 그는 루스벨트에 대한 개인적 배신감으로 괴로워하면서 일본군에 의해 서남부 4개성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점령당해도 그곳에서 재기하겠다고 했다. 그는 스틸웰 때문에 동아시아를 다 잃었다고 싸늘하게 말했다. 그는 미국인이 중국 총사령관이 되는 것은 수용할 수 있지만 스틸웰이 중국 총사령관이 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의 강경해진 태도에 스틸웰 해임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스틸웰은 루스벨트가 내 목을 자르려 한다고 날뛰었다. 장제스는 1944년 10월에 장제스는 헐리에게 스틸웰 소환을 다시금 요구했다. 그는 탁자를 후려치며 스틸웰이 총사령관이 되는 순간 충칭 정부는 왕징웨이의 난징 정부와 동류로 굴러떨어질 것이라고 소리쳤다. 10월 12일 잠을 이루지 못하던 헐리는 결국 결단을 내리고 2시에 스틸웰을 소환해야 한다는 전보를 작성했다.
"스틸웰의 모든 행동은 장제스를 완전히 복종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스틸웰과 장제스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고 장제스를 택하셔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중국인들 가운데 장제스만큼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인물은 없습니다. (...) 그는 대통령께서 하신 모든 요청과 모든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스틸웰 임명 하나만 뺴고 말입니다."
헐리는 이 전보를 스틸웰에게 보여주었고 스틸웰은 이를 무딘 칼로 목을 베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중국군 인수 작업과 감기로 고생하던 스틸웰은 마셜이 루스벨트를 설득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다시 한번 장제스를 모욕주며 압박하길 거부했다. 그는 스틸웰을 대신할 장군들을 보내주겠다고 제안했다. 10월 19일 스틸웰은 도끼가 떨어졌다고 했고 그는 소환되었으며 후임으로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이 도착했다. 이후 헐리는 웨드마이어와 함께 일본군에 위협받는 충칭 철수까지 고려했다. 충칭이 함락되지 않자 헐리는 새로운 과업을 맡았는데 다름아닌 국공화해였다. 헐리는 자신이 석유회사들을 화해시킨 경험을 활용해서 국민당과 공산당도 화해시킬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11월에 가우스 대사가 사임하면서 그는 정식으로 중국 대사가 되었다.
2.3.2 마오쩌둥과의 회담
1944년 11월 7일 패트릭 헐리를 태운 C-47 비행기가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고 옌안에 도착했다. 그간 중국 공산당은 헐리에게 미국이 장제스를 버리고 자신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수없이 구슬리고 있었으나 패트릭 헐리는 이를 모두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이는 장제스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헐리는 공산당과도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한 우리에 있어야 한다는 루스벨트의 방침을 따르고 있었다. 딕시 사절단 단장 데이비드 베럿 대령과 저우언라이가 패트릭 헐리를 마중했는데 저우언아리는 최고급 제복과 푸른 솜 외투를 입은 거구의 멋쟁이가 내리는 것을 보고 놀라 베럿 대령에게 저 사람이 누군지 물었다. 베럿 대령이 그가 바로 루스벨트의 특사 헐리라고 하자 경악한 저우언라이는 차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지더니 마오쩌둥과 의장대를 데리고 다시 나타나 성대하게 헐리를 환영했다. 헐리는 의장대에 마주 경례한 다음에 촉토식 함성을 질러대어 공산당원들을 다시 경악하게 했는데 그게 그의 버릇이었다.(...)
11월 8일 마오쩌둥과 헐리의 회담이 이뤄졌다. '정중한 농담'으로 회담을 시작한 마오쩌둥은 장제스와 국민당을 마구 욕하였다. 헐리는 마오쩌둥에게 공산당을 합법정당화한 다음에 공산군에게 국민당군과 동등한 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그들이 일본에 공동 투쟁할 것을 제의했지만 마오쩌둥은 헐리에게 직설적으로 국민당은 싸울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민당군 200만 중에 80만이 공산당과 싸우는데 쓰이고 있으며 그들은 일본군만 나타나면 달아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명백한 과장이다. 헐리는 중국군이 버마와 살윈강에서 승리한 사례를 들며 반박하며 그가 중국의 내전이 계속되길 바라는 것처럼 말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자신의 견해는 처칠, 루스벨트, 쑨커, 쑹칭링도 동의하는 것이라 반박했다. 이에 헐리는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합작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국민정부의 군사위원회 자리를 공산당에게도 배정하겠다 했으나 공산당은 손이 묶인 의미없는 자리라 거부했다. 이에 헐리는 역제안을 요구했고 마오쩌둥은 하루종일 회의한 다음에 반일 정당과 무당파 정체치의 대표들을 포괄하는 연립정부와 정의, 양심의 자유,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체제를 요구했다. 여기에 인신보호영장 청구권은 헐리가 집어넣었다.(고 추정된다.)
양자는 만족스러운 합의를 이끌어낸 듯 했고 둘은 우정의 잔치를 벌였다. 헐리는 이 문서에 서명할 것을 제안했고 마오쩌둥은 도장을, 헐리는 서명을 남겼다. 헐리는 이 조항들이 장제스가 받아들이리란 보장이 없음을 알리고 저우언라이와 함께 다시 충칭으로 돌아왔다. 쑹쯔원은 그가 공산당과 한 합의를 보자 국민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며 당신이 공산당에게 속았다고 했다. 헐리는 이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문서를 왜 국민당이 납득할 수 없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국민당 입장에선 마오쩌둥이 합작에 참여하는 것은 곧 대권을 위한 세력 확장 방책이었다. 미국은 마오쩌둥을 마가린 공산주의자로 여기고 그가 얼마든지 민주화를 달성한 것으로 보았으나 장제스는 이 모든 것이 진심을 가장한 우롱의 말이란 걸 알았다. 결과적으론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전혀 모르고 국공관계를 공화당-민주당 관계 정도로 여긴 미국의 패착이었다.
2.3.3 중국 대사 시절
2.4 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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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장제스, 장징궈, 마오쩌둥과 함께 사진을 찍은 패트릭 헐리 |
3 여담
4 참고문헌
- 1945 중국, 미국의 치명적 선택, 리처드 번스타인, 책과 함께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황런위), 푸른역사
5 관련문서
- ↑ 하지만 정보를 분석하면 이러한 경멸감보다도 루스벨트는 장제스에 대해 호의가 더 많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최소한 1944년 6월 말까지도 루스벨트는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 장제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후술할 극단적 문서에 대해 그가 서명한 계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밑에 적은 바바라 터크먼의 설도 있으며 중국 현지 미국인들의 과장된 보고가 원인이란 설이 요즘 떠오른다.
- ↑ 이에 대해 스틸웰 전기를 쓴 바바라 터크먼은 루스벨트가 너무 몸이 아팠기 때문에 장제스에 대한 배려를 잊었거나 아님 마셜이 그를 너무도 밀어붙혔기 때문에 뭐라고 쓴건지 처음부터 신경쓰지 않고 그냥 서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게 다 마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