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도어 루스벨트

역대 미국 대통령
25대26대27대
윌리엄 매킨리시어도어 루스벨트[1]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역대 뉴욕 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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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36대37대
프랭크 S. 블랙시어도어 루스벨트벤자민 바커 오델 주니어
< 19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05 - 베르타 폰 주트너시어도어 루스벨트1907 - 에르네스토 T. 모네타, 루이 르노
공식 초상화
풀네임Theodore Roosevelt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858년 10월 27일 ~ 1919년 1월 6일
재임기간[[ 1901년]] 9월 14일 ~ 1909년 3월 4일
서명
1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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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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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장으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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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대통령할 때.

"Speak softly and carry a big stick, and you will go far."(말은 부드럽게 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다녀라.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2]
"good to the last drop!!"(마지막 한 방울까지!!) - 미국 맥스웰 커피의 광고 문구

1 개요

자국의 국익을 위해 다른 나라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주의를 가졌던 대통령

미국 제26대 대통령. 20세기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자, 최연소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임자 승계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한 대통령이다.

시어도어의 애칭이 'Teddy'라서 테디 루스벨트라고도 알려져 있고 미국에서도 테디 루스벨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본인은 테디라고 불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디'라는 애칭은 'Teddy', 'Teddie'라는 표기가 있는데 가족들이나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부를 때 Teddie라는 표기를 사용했다고 하며, 루스벨트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줄여서 Thee라고 쓴 적이 있다. 당시 국민들이 부른 애칭은 Teddy이고 오늘날에도 Teddy Roosevelt라고 쓰는데 Teddie와는 달리 Teddy란 표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풀네임 머릿글자를 따서 TR이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언론에서 대통령을 이니셜로만 부른 최초의 사례이다. 현재 한국 언론에서 정치인YS, DJ, JP, MB, SD 등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바로 그 원조격 인물이다.

대개 Theodore라는 인명의 표기법을 헷갈리는 사람이 많아서 테오도어, 테오도르, 디어도어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표준 외래어 표기법 의하면 시어도어가 맞다. Theodore의 발음은 [θí:ədɔ́:r] 와 비슷한데, 대강 표시하자면 'θㅣ-어도어-' 정도가 될 것이다. 노홍철 돋네

여담으로 뉴딜 정책으로 유명한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 사람의 12촌(...) 동생이다(한국으로 치면 사실상 본관만 같은 남남). 헌데 재밌는 건 친척임에도 당적이 서로 다르며, 같은 루스벨트임에도 시어도어는 한반도가 일본에게 점령당하는데 기여했고, 프랭클린은 그 일본제국을 개박살냄으로써 한반도를 일본의 지배에서 독립시켰다는 게 아이러니한 사실.

2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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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양한 경력을 보여주는 그림. 왼쪽 위부터 카우보이, 역사가, 경찰청장, 해군장관, 러프라이더(군인), 뉴욕주지사, 부통령, 대통령, 중재자, 그리고 역대급 위대한 헌터(사냥꾼).

2.1 성장과정

뉴욕의 상류가정에서 태어나서 대단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린 시절에는 심한 천식으로 고생했고 시력도 지독한 근시였으며 성인이 된 후의 모습과는 달리 말라깽이였다고 한다. 또한 요양을 갔다가 요양간 동네의 힘센 아이들에게 몰매를 맞은 적도 있다. 12세가 되자 아버지가 "너는 정신력은 강한데 몸이 약하다. 근데 몸이 약하면 정신도 제 능력을 다 발휘 못하니까 앞으로 체력 단련에 힘써라."하고 말한 이후로 매일매일 몸을 단련하여 건강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이분이 가장 좋아한 스포츠는 사냥이었다. 은퇴 후 아프리카 여행을 할 때는 사자, 코뿔소 등을 원없이 잡고 다녔다. 잡은 동물들을 앞에 놓고 당당하게 찍은 사진도 많이 있다.

어쨌든 허약한 몸을 극복하고 하버드에 들어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부를 졸업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1년뒤 중퇴하고 공화당에 입당해서 24세에 뉴욕 주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884년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2월 14일에 같은 집에서 한꺼번에 잃는 불행을 겪었는데 이에 충격을 받고 아내가 낳은 딸을 여동생에게 맡기고 서부의 다코타로 가서 3년 남짓 카우보이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이때의 경력으로 후에 정적들에게 종종 "빌어먹을 카우보이!"라고 불리기도.

그리고 재혼한 후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잡지 기사와 을 저술하는 데에 전념했다. 그는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제일 많은 책을 저술한 인물로, 그가 저술한 책은 무려 38권에 이른다. 이후 1888년 벤저민 해리슨 대통령에 의해서 미국시민봉사위원회에 임명되었고 7년 뒤에 뉴욕 경찰국장이 되어 다시 뉴욕에 돌아왔으며 1897년 해군 차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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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시절 러프 라이더 기병대장 시절의 루스벨트.

이 무렵인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스페인과의 전쟁이 터지자 의용군 '러프 라이더(Rough Riders - 거친 마부들)'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전, 공적을 세우고 전쟁영웅이 되었다. 먼 훗날이자 그가 취임한지 100년이 되는 2001년 1월 16일,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 때의 공으로 루스벨트에게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는데, 이로써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명예훈장을 가진 대통령이 되었다.[3]

2.1.1 루스벨트 추론

19세기 말의 시대는 제국주의적 경쟁이 극대화된 시기였다. 증기선과 전신으로 대표되는 통신상의 혁명은 제국주의로 하여금 그 활동 무대를 지구 전역으로 확장할 수 있게 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는 무연화약, 기관총, 강철 대포가 출현함으로써 산업국가와 그렇지 못한 나라 사이의 격차를 극도로 크게 벌렸다. 여기서 대표적인 무기체게가 바로 전함이었다. 에릭 홉스봄은 이 시대를 가리켜 전함 외교의 시대라고 했는데, 19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시대를 비교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 1798년 나폴레옹 군대의 이집트 침략 당시 양국 군대는 장비상으로는 막상막하였다. 따라서 승패는 무기가 아니라, 침략성과 잔혹함, 특히 조직력에 의해 결판났던 것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군사적 측면으로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균형은 깨졌다. 고성능 폭발물과 증기운송과 같은 수단들이 열강의 식민지 침탈을 손쉽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1880년부터 1930년에 이르는 반세기가 전함외교의 황금시대로 불릴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략)"[4]

전함의 출현은 미국의 외교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는데, 종전까지 미국의 방어벽 역할을 하던 바다는 더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대서양은 미국으로 유럽의 전쟁을 운송하는 고속 침투로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신흥 산업국가인 일본이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동아시아의 전통적 강국인 청나라를 청일전쟁(1894~1895)으로 거꾸러뜨려, 태평양마저도 미국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18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어진 1차 베네수엘라 위기가 루스벨트의 위기감을 더욱 부채질했다. 베네수엘라에서 금광이 발견됐고, 이를 영국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세계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미 해군이지만 당시 미 해군은 세계 해군 순위권은커녕 다 저물어 버린 스페인 해군 정도나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약체 해군이었고, 18세기부터 세계 1위 해군력을 놓지 않은 영국 해군은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 약체화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아메리카의 스페인령 식민지를 다른 외국에 매도할 가능성까지 있었다. 이는 미국에게 있어 큰 문제였다. 스페인이라면 상대가 가능했지만, 새로 스페인으로부터 아메리카 대륙에 속한 식민지를 양도받을 나라는 상대하기 버거울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새로 카리브해에 진입할 유럽 강대국이 독일일 것으로 보았다. 루스벨트는 해군력이 아닌 외교 정책을 통해 미국의 안전을 담보해야만 했다. 먼로 독트린의 내용은 다음의 세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1. 아메리카 대륙은 어떠한 유럽 열강에 의해서도 미래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다.
1. 미국은 유럽 국가들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 먼로 독트린은 유럽 열강과의 외교전을 뒷받침해줄 무기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의 아메리카 대륙 내의 신규 식민지의 확보는 1. 항목으로 방어할 수 있지만,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매각함으로써 독일 해군이 미국을 위협하게 되는 상황은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다른 나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은(아직은 발생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유럽 열강의 기존 식민지나 종속국의 문제에 해당하고, 스페인이 독일에 식민지를 양도하는 것도 유럽 국가간의 내부문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1896년 '루스벨트 추론'이라고 알려진 저작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기존의 먼로 독트린이 아메리카 대륙의 비식민화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원칙을 고수하자면, 식민지의 양도를 통해 새로운 강한 거대한 식민지의 출현을 방기할 수 있는 2, 3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고, 2, 3 원칙을 고수하자면 유럽 국가간의 식민지 거래를 통해 1원칙을 포기되어야 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의 진정한 목표는 1원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먼로 독트린은 "어떤 非아메리카세력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의 누구를 희생의 대가로 삼아 영토 팽창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선언"이라는 것이다.[5] 따라서 2 원칙은 포기되어야 했다. 2원칙의 포기는 논리적 귀결로써 3원칙의 포기 또한 요구했다. 식민지의 문제와 외따로 떨어진 식민모국의 문제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먼로 독트린에 그것을 미국의 방위 정책으로 만들 수 있는 4원칙을 추가했다. 4원칙의 내용은 바로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포기하거나 양도할 경우 그것을 접수하는 나라는 미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6]

이는 먼로 독트린의 제국주의 이론으로의 변화를 뜻했다. 먼로 독트린은 애초에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이끌려 전쟁으로 딸려들어가는 사태를 방어하기 위한 고립주의 정책의 표명이었지만, 2, 3 원칙이 폐기된 이상은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자국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유럽 문제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 획득을 시도하는 유럽 국가의 행동을 적대행위로 간주함으로써였다. 그리고 이런 천명들은 유럽 국가들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분쟁의 성격을 판단할 권리를 미국에만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1902년 독일은 채무변제를 빌미로 함대를 이끌고 베네수엘라를 위협했는데(2차 베네수엘라 위기), 빌헬름 2세는 채무변제를 빌미로 영토를 차지할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항변했지만, 루스벨트는 빌헬름 2세의 항변을 무시하고 전 함대를 집결해 일전울 불사한 각오를 보였다.

새로운 먼로 독트린 추론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을 위협하는)전쟁의 괴물을 좇아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안 된다던 미국의 대외정책은, 전쟁의 괴물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는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어디로도 출동해야 된다는 일방주의로 변화했다. 전함과 전신을 통해 적이 언제든 미국을 침략할 수 있게 된 이상, 미국은 적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적을 찾아서 해외로 진출해야 하게 된 것이다.

이상 루스벨트 추론 항목의 내용은 최정수, <T.루즈벨트의 '世界政策'>, 2001, 한양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주로 참조해 작성했다.

2.2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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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의회 도서관 앞에서 연설하는 루스벨트. 그는 연설할 때 팔을 강하게 휘두르며 쉴새없이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명성을 얻어 뉴욕 주지사를 거쳐 1900년 선거에서 윌리엄 매킨리의 두번째 러닝메이트로[7]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당선되었는데, 그 직후 1901년 매킨리도 암살되자 대통령이 되었다. 20세기 최초의 대통령.

이 때 나이가 42세였다. 미국 역사의 대통령 중 최연소 대통령 취임(젊은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존 F. 케네디도 대통령에 취임한 나이는 43세로 두 번째다. 케네디는 '선거로 뽑힌' 최연소 대통령).

2.2.1 대기업 규제-셔먼 독점금지법

루스벨트는 보수당이자 만년 여당인 공화당 소속이었으면서도 우드로 윌슨 등이 참여했던 혁신주의 사회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아무 실권 없는 자리인 부통령직에 지명된 것은 이런 그를 제거하기 위한 당내 보수파들의 정략이었는데, 유독 공화당의 원로인 마크 한나는 "그 카우보이 놈이 호시탐탐 노리는 게 대통령 자리라는 걸 몰라서 이런 짓을 하느냐"며 반대하였고 결국 그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마크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 것을 보고 "봐라! 저 무지막지한 카우보이가 대통령이라니!"라고 탄식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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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만화에서 보이듯이 그 시절의 미국은 강도귀족(robber baron)이라고 불리던 재벌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따라서 거대화된 대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이른바 셔먼 독점금지법[8]을 내세워 대기업의 합병을 막아 대기업을 통제했는데 이 때 록펠러나 모건 그룹 등의 후덜덜한 대기업까지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당시 기업들의 독점 합병을 '트러스트(Trust)'라고 불렀는데 이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대기업에 타격을 입힌 사실 때문에 '트러스트 파괴자(Trust Buster)'라는 별명도 얻었다. 당시 미국의 경제정책은 시장 불간섭 정책이 모토였는데 그의 이러한 정책은 자유방임시장에 정부가 통제, 감독을 했다는 것이 큰 의의를 가진다.

2.2.2 팽창적, 개입적 대외정책

"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 "
" 우리나라의 미래는 유럽에 면한 대서양보다는 중국에 면한 태평양에서 우리가 어떤 입지를 차지하느냐에 더 크게 좌우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소리였다. 먼로 독트린 이후 유럽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주창하면서, 동시에 하와이 점령, 필리핀 점령, 쿠로후네 사건이나 제네럴 셔먼호 사건 등 태평양쪽에 관심을 더 두고 있는 것이 오래인 상황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를 이어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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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미지 자체가 왜곡이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만 회복불가능한 피해를 보고 일본은 멀쩡한 승자라서 루즈벨트가 인정한 것처럼 그려놨기 때문.

또한 외교적으로는 파나마 운하를 인수하고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국제적으로는 러일전쟁이 끝난 후 회담인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종전 회담의 결과가 어떤 반도국가의 식민지화였다... 그리고 일본의 조선 침략을 미국이 묵인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루즈벨트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였다.[9]한국인에게 욕먹는 가장 큰 이유 한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미국인? 그리고 먼로 독트린에 더 사항을 추가하여 서반구에서는 미국이 국제경찰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정책을 펼쳐 산토 도밍고 등 카리브 해나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이 지금도 주장하는 '세계경찰'론의 기틀을 잡은 것. 그리고 국방 쪽에서는 해군 강화에 열을 올려 '대백색 함대(Great White Fleet)'를 창설했다.

2.2.3 기타

또한 자연보호에도 힘써서 많은 국립공원을 만들었고 2억 에이커 이상의 지역에서 산림개발을 금지했다. 여러 모로 국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서 20세기 초기 미국의 국력을 신장시킨 대통령. 그 업적이 인정받았고 인기도 많아서 대통령도 두 번 역임했다. 1907년에는 경기침체를 겪었지만 과감한 정책을 밀어붙여 1909년 즈음에 이를 극복했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것도 루스벨트의 재임기였는데, 그래서인지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비행기를 탄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자동차를 최초로 탄 대통령이고 해군 잠수함에 최초로 탑승하여 직접 잠수함을 조타하기도 했다.

2.3 퇴임

나는 늘 당신이 워싱턴과 링컨을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최측근이었다가 정적으로 돌변한 윌리엄 태프트에게 쓴 편지

재선에 도전하였을 때부터 '이번에 루스벨트가 재선을 하면 삼선도 노릴 게 분명하다'며 반대파가 주장한 것이 재임중에 그가 얻었던 인기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설수에 오르는 데 부담을 느꼈던 그는 재선에 성공하자마자 '삼선은 없다'라는 돌출 발언을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 삼선 불출마 선언이 퇴임 이후의 그의 경력에 먹칠을 하였다(하지만 결국 삼선을 위해 출마 했다).

퇴임하면서 후계자로 보좌관인 태프트를 밀었다. 루스벨트의 후광 효과로 태프트도 대통령이 되었지만 태프트는 몇몇 상원의원에게 끌려다니거나 인사 문제로 루스벨트와 대립한 끝에 결국 루스벨트의 측근을 해고해 버렸다. 이에 화가 난 루스벨트는 1912년의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에 출마하려 했지만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태프트가 후보 지명을 받게 되고 이에 진보당이라는 당을 신설하여 공화당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의 시궁창 배틀(...).

이 때문에 분열된 공화당은 표가 나뉘어 버렸고 1912년 대선은 어부지리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루스벨트의 재선 때보다도 더 적은 득표수로 민주당이 승리해 버렸다. 루스벨트 본인이 얻은 표는 공화당의 태프트(23.2%)를 능가하며, 제3당 후보가 얻은 표로서는 최다 득표(27.4%, 412만표)).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 중에 매킨리의 암살을 루스벨트가 사주했다는 음모론 신봉자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고, 이 때문에 선거 유세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했다는 속사정도 있었다.

국부인 조지 워싱턴처럼 떠날 때 떠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좀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많이 아쉬운 부분.

이 선거에 출마한 것 외에는 해외를 돌아다니며 탐험과 사냥을 하며 지냈는데 다우트 강을 탐사하다가는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 후로도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막내아들 쿠엔틴이 프랑스에서의 공중전에서 전사하자 이 무렵부터 쇠약해졌고 공화당에도 1917년 복당했다. 이때 다시 1920년 선거에 재 출마를 생각하고 러닝 메이트를 워렌 하딩으로 정해놨었지만... 1919년 1월, 뉴욕 오이스터 만의 자택에서 수면 중에 사망했다. 죽은 루스벨트의 베개 밑에도 책이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사인은 관상동맥폐색. 루스벨트의 아들 커밋은 외지에 나가 있던 형제들에게 전하는 부고에 "The old lion is dead(노사자가 돌아가시다)"라고 썼으며, 그의 죽음에 부쳐 당시 부통령 토머스 마셜은 이렇게 말했다.

"Death had to take Roosevelt sleeping, for if he had been awake, there would have been a fight."(죽음은 루스벨트가 잠든 사이 그를 데려갔습니다. 만약 그가 깨어 있었다면 그와 싸워야 했을 겁니다.)

3 가족

그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10]는 아버지를 닮았는지 성격이 꽤 괴팍하고 독설가로 유명했는데, 가장 유명한 독설이 29대 대통령 하딩을 평가한 말이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다만 멍청이였을 뿐이지." 그리고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가족을 두고 "3분의 2는 물러터진 옥수수죽(프랭클린을 말한다)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엘리너"라고 말했다. 그녀는 1905년에 조선을 방문한 적도 있이 있는데 무례한 행동을 일삼고 돌아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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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능에서 승마바지와 말채찍을 들고 조형물인 석마(石馬)를 탄 것이다[11]. 이런 망나니 행동만 일삼으며 뭔가 속시원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고종순종을 제대로 엿먹이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당시 앨리스 일행은 이미 일본에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한국에 들린 길이었다관련 내용.

저런 모습처럼 어린 시절에는 워낙 왈가닥이라서 백악관에 손님이 찾아오면 "미합중국 대통령은 맨날 자식을 때려요!"라고 소리지르는 장난을 즐겼으며, 을 목에 걸고 나타나는 바람에 백악관 방문객들을 깜짝 놀래키곤 했다고. 루스벨트 본인도 "저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제 딸 앨리스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꽤 악동이었던 그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정도니 말다한 셈이다. 말년에 누군가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묻자, "실리보다는 허세만 가득찬 양반이었죠."라고 꼬집었다.

그런데 앨리스가 아니라도 루스벨트의 자식들은 백악관에 있을 때 모두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형제들이 아버지를 닮았는지 하나같이 말썽꾸러기라 숱한 장난으로 백악관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영부인과 백악관 직원들의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고 한다. 특히 막내아들 퀜틴이 심한 장난꾸러기였는데 그는 5, 6명 정도의 친구들을 데리고 백악관에서 말썽을 부렸고 심지어는 찢어 뭉친 종이조각을 백악관에 걸린 대통령 초상화에 붙여 놓았다가 루스벨트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다. 이렇듯 그는 미국의 대통령뿐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백악관에서 함께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개구쟁이 아들들은 장성해서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다. 막내아들 퀜틴은 1차대전 중에 전사했고 다른 아들들도 커밋은 2차대전 중에 전쟁에 대한 우울증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가 알래스카에 파견 나가있던 중 그곳에서 자살했으며, 시어도어 주니어는 2차대전 중 프랑스 전선에서 병사했다.

  • 장남 시어도어 주니어(1887-1944)도 아버지 못지않은 풍운아였다. 1, 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베테랑이자 하딩-쿨리지 정권에서 해군성 차관, 필리핀 총독, 푸에르토리코 총독을 역임한 공화당의 거물급 정치가였는데, 2차 세계대전에 대령으로 참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전투를 거치며 준장까지 진급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제4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이던 시어도어 주니어는 자청해서 제1파로 상륙했는데, 제1파의 최고령, 최선임 미군이었다고 한다. 당시 오마하 해변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즉석에서 정보를 모으고 작전계획을 수정하여 예하 지휘관들에게 전파하는 한편으로, 최선임 장교로서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시키는 등 큰 활약을 했다고. 그러나 상륙 33일만에 심장마비로 사망, 결국 사후에 명예 훈장을 수훈받았다. 먼 친척뻘 되는 FDR을 싫어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고.(...)

3.1 프랭클린 루스벨트와의 차이점

미국 제32대 대통령이고 뉴딜 정책으로 유명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재임 1933-1945)와 간혹 혼동되기도 하는 인물.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대공황 시대에 재임했던 프랭클린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모자로 오인되기도 한다(...). 불쌍하네 고로 관련사항을 인용하거나 행적을 밝힐 때는 반드시 이름을 함께 써 주거나 구분해서 써 주면 좋을 것이다. 안된다면 Teddy(테디), TR이나 FDR 같은 이니셜도 괜찮다. 하도 미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라...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테디가 프랭클린의 먼 친척 형 뻘이다. 나이 차이 때문인지 흔히 조카와 당숙 사이로 알려져 있지만, 루스벨트 가문의 족보를 보면 둘은 12촌 형제에 해당한다. 뭐 12촌이면 거의 남남이니 같은 가문 사람이라는 것 정도로 알아두면 된다.[12]

하지만 둘의 관계는 대단히 친했다. 우선 테디의 조카인 엘리너가 프랭클린과 결혼하여 프랭클린은 테디의 조카사위도 된다. 둘이 막 결혼한 시절 테디가 프랭클린에게 결혼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 준 편지도 남아 있으며 1905년 두 사람의 결혼식 때 신부인 엘리너를 테디가 직접 프랭클린에게 인계해 주며 장인 역할을 했다. 테디 본인은 프랭클린을 두고 "그 녀석을 위해서라면 그 녀석이 맞을 총알도 내가 대신 맞을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로 대단히 프랭클린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의 정치 노선은 다소 달랐던 편. 일단 테디는 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이었고 프랭클린은 테디의 정적이었던 윌슨을 지지했다. 야심만만했던 젊은이 프랭클린은 테디를 존경했고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지만[13] 한편으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라이벌로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 입장에서 특이한 점은, 전술했다시피 시어도어는 한국이 일본에 넘어가도록 하는데 기여했고, 프랭클린은 일빠 시어도어가 그토록 좋아한 일본을 아작내 한국이 해방되는데 기여했다는 점이다.[14]

4 평가

영국의 역사가 휴 브로건은 그를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백악관에서 제일 유능한 사람, 앤드루 잭슨 이후 가장 정열적인 사람, 존 퀸시 애덤스 이후 최고의 독서가"라고 평가했으며,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아버지는 장례식에 가면 시체가 되고, 결혼식에 가면 신부가 되고, 세례식에 가면 아기가 되고 싶어하셨지요."[15]라고 회상했다. 중2병주인공 기질이 강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노엄 촘스키는 그를 "악랄한 제국주의자이자 최악의 정신병자"라고 혹평했으며 미국 진보계열 사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인 하워드 진 역시 "혁신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라고 혹평했다. 실제로 그는 분명한 제국주의자였다. 유럽아메리카의 상호 불간섭을 표방한 먼로 독트린에 수정조항을 달아 라틴아메리카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는데, 파나마 운하 건설중에 콜롬비아와 마찰이 생기자 파나마의 반란과 분리독립을 배후조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말은 부드럽게 하되 몽둥이는 큰 걸 들고 다녀라"라는 루스벨트의 말은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진보 계열 지식인들은 전임자인 매킨리와 함께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로 혹평하고 있다. 네오콘 계열에게는 전략적 측면, 경제적 측면에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데, 전략적 측면에서는 루스벨트 추론과 대백색함대 세계순방 등으로 미국의 세계전략을 수립한 위인으로 평가받는 반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위에 나온 독점금지법 때문에 자유시장경제를 억압한 사회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조금 부연하자면 이 시기는 누가 대통령에 재직해도 제국주의 시기였을 것이라는게 정평. 어차피 미국 내부는 오랜 산업화를 거쳐 자본이 남아도는 시기였기에 이 시기 침략전쟁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더하고 덜한 차이는 있었겠지만(마치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거나 혹은 다른 인물이 식민지화를 진행했다면 향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가정과 그다지 진배 없다. 물론, 조지 W. 부시와 같은 예외적 케이스는 전쟁이 반드시 필연은 아니라는 좋은 증거). 예컨대 학자로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였던 민주당의 윌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도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그에 비해 사회주의자 기믹은 어느 정도 루스벨트 개인의 성향과 관계가 크다.

누가 제국주의자 아니랄까봐 아주 당연하게도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게다가 한발 더 나아가 우생학의 신봉자이자 열광적인 선전자였다.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성공은 앵글로 색슨족의 우월한 피 때문이다." 라고 발언하며 인종주의를 선전했다. "새로운 이민자들과 미국 앵글로 색슨족의 혼혈은 생물학적 퇴화를 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인종주의적 이론을 퍼뜨리는 것에 일조한 우생학자 메디슨 그랜트[16][17]와도 절친이었다. 또한 유색인종의 높은 출생률에 주목하면서 산아제한을 옹호하는 중산층이 ‘인종적 자살’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3년에는 “언젠가 우리는, 좋은 형질을 가진 시민은 자신의 좋은 혈통을 후대 세상에 남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피할 수 없는 의무이며, 나쁜 형질을 가진 시민이 후손을 통하여 나쁜 혈통을 이어가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와패니즈 항목을 참조하면 써 있겠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반한 와패니즈 성향[18]에다가 한일합방을 강력하게 지지한 까닭에 좋게 보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단순히 대통령으로써의 업적과 능력만 놓고 보면 미국의 국력 신장을 이끈 우수한 대통령으로 뽑히며 매번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나 인기 랭킹을 조사하면 항상 5위권 내로 들었는데 2010년 시에나 대학교에서 시행한 대통령 업적 평가에서 결국 2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2010년에 시에나 대학[19]에서 한 이 조사에서 1위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3위는 에이브러햄 링컨. 참고로 이 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15위를 차지했다. 이것으로 두 루스벨트가 부동의 1위 링컨을 누른 셈. 다만 이 두 루스벨트는 성향이 정반대에 가까웠다. 친척관계도 12촌이니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다. 같은 가문의 두 대통령으로선 의외인 셈.

정치학자들에게는 '현대적 대통령의 모델'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본인 역시 가문빨도 빵빵한 데다가 본인의 능력이 대단하여 학자, 농장주, 카우보이, 군인, 경찰, 탐험가, 사냥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대통령 시절 남긴 많은 업적과 일화, 개인적 매력 등과 맞몰려 지금까지도 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러시모어 산에 있는 큰 바위 얼굴에도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은 그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말해준다 할 수 있다. 심지어 미국 역사학자들이 생각한 대체역사 시나리오를 모은 만약에라는 책에서는 루스벨트가 3선(+4선)에 성공했으면 독일 제국을 강하게 압박하여 제 1차 세계대전은 조기 종결되고 러시아 혁명도, 나치스도 없는 평화로운 20세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시나리오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남북갈등[20]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근본적인 모순을 모두 제거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보며 마무리한다.

5 일화

사냥복 차림의 루스벨트
"당신 나라에는 특이한 것이 두 개 있는데,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와 당신네 나라 대통령이오." - 루스벨트 재임기에 미국을 방문한 한 영국 외교관

그 숱한 미국 대통령들 중 이 사람만큼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긴 사람은 흔치 않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음에도 어딘가 특이한 면이 있어서 아래의 일화에서 보듯 기행도 많이 일삼았다. 오죽하면 영국 외교관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을까.

  • 프랑스 대사인 주세랑이라는 사람과 함께 산책을 했는데 산책하다가 너무 깊어서 걸어서 건너가기 힘든 개울을 만나자 대통령은 갑자기 옷을 훌훌 벗고 주세랑 대사에게 옷을 벗을 것을 권했다. 결국 그 프랑스 외교관도 웃통을 벗고(...) 미국 대통령과 함께 헤엄쳐서 개울을 건넜다. 또한 그와 함께 산책한 영국 대사는 그 날 일기에 죽는 줄 알았다. 산책이라더니 어떻게 두시간 반 동안 등산하냐. 이런 식의 일기를 남겼을 정도였고, 그 영국 대사가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자 앞서가다 말고 내려와서 영국 대사를 잡아끌고 끝까지 올라갔다. 또한 한 친구와 산책하다가 산 속에서 폭발음이 들렸는데, 이것은 채석장에서 굴을 터뜨린 소리였다. 당연히 바위조각들이 튀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데 되려 친구에게 '바위조각 많이 떨어지는 곳으로 가 보자'고 억지로 끌고 갔다고 한다. 이게 뭐 산책인지 유격 훈련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이런 일화를 보면 마이페이스 기질이 있었던 듯.
  • 운동을 너무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 복싱선수 존 설리번을 백악관에 불러 복싱연습을 했을 정도. 연습 중 부상당한 적도 많지만 눈이 찢어져도 끝까지 연습을 했다. 정통으로 한쪽 눈을 얻어맞은 적도 있었는데 결국은 그 눈의 시력을 잃었다. 국회의원들을 데리고 장애물 경주를 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하버드 동기였던 일본 외교관 가네코 겐타로[21]는 루스벨트가 운동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일본 유도선수들과 스모선수들을 백악관으로 초빙해 일주일에 세 번씩 대련할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도 하였다. 백악관에 요코즈나(橫綱)를 초청한 적도 있다.
  • 유도와 스모뿐 아니라 일본 문화 자체에 상당히 관심이 많아서 오륜서추신구라, 무사도를 애독했다. 특히 추신구라에 대해서는 최고의 이야기라는 극찬을 했다. 루스벨트 시절 미일관계는 단순히 태평양 방면에서 미국의 외교적 이익을 얻기 위한 차원을 넘어 루스벨트 개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이 작용한 게 아닌가 하는 말까지 나올 정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BANZAI"라고 글을 메모하기도 했다.[22]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는 도고 헤이하치로의 훈시를 영어로 번역한 후 미군에 배포했다. 일본 외교관들에게서 일본 요리를 대접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일반적인 서양인들은 생선을 사용하는 일본 요리에 기겁을 했지만 루스벨트 본인은 맛있다고 칭찬하며 잘 먹었다고 한다.
  • 1912년 대선에 출마하여 밀워키에서 연설을 준비 중에 괴한[23]에게 피격당해서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갈비뼈가 부러지고 가슴에 총탄이 박힌 채로 한 시간 동안 연설을 한 후에 병원으로 갔다. 그나마 연설도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해냈으며 연설 후 의사에게도 '들것에 누워 가기 싫다. 내 발로 걸어가겠다'며 끝내 병원까지 걸어갔다. 총탄이 루스벨트의 상의 가슴 주머니에 있던 안경 케이스와 연설문을 뚫고 가슴 근육에 박혔는데, 워낙 운동과 탐험으로 다져진 강건한 체구였던 덕택에 폐를 뚫고 들어오는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이 행동에 대해서 그의 반대자인 우드로 윌슨 등도 '나는 루스벨트의 정치 노선에는 반대하지만, 그 기개는 존경한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또한 루스벨트가 총상을 치료하는 중에는 같이 대선에 출마한 윌슨과 태프트 모두 선거운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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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moose)를 타고 있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 모험심이 강해서 당대 최고의 모험가이자 사냥꾼으로 유명했다. 사격 실력도 꽤 우수한 편이었다고. 사냥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바로 테디 베어 이야기로 관련 일화는 해당 항목 참고. 그리고 자연환경보호정책을 편 것 치고는 상당히 사냥한 동물들이 많았는데, 이 당시에는 자연보호활동과 사냥을 하는 것의 괴리가 문제되지 않았던 모양으로 이를 가지고 루스벨트를 비판하는 이는 없었다. 사실 자연보호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 자체가 프로 사냥꾼인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이는 그들 사냥꾼이야말로 동물 숫자의 감소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초원에 우글거리던 코끼리떼가 지금은 손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면 경각심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럽다. 코끼리가 다시 많아져야 내가 사냥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 탐험에 대해서는 1909년 대통령에서 퇴임하자마자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지원을 받는 과학탐험대를 인솔하여 바로 아프리카 탐험을 떠났다. 1913년에는 브라질에 위치한 지도에 나와 있지 않는 미탐사 지역인 다우트 강 탐험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탐험을 마치고 루스벨트는 "소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 위의 아들이 한 말처럼 진짜로 장례식장에서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려서 실패했지만아쉽다 그는 에 들어가 보고 싶다며 징징댔다고.
  • 골치를 앓고 있던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부의 고위관리와 회의하던 도중에 조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아저씨, 4시가 넘었어요!"라고 말하자 관리에게 "저 아이들하고 4시에 사냥을 가기로 했는데, 미안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논합시다. 원래 애들에게 있어서 기다린다는 것은 아주 견디기 힘든 일 아니오?"라며 회의도 대충 끝내고 냅다 사냥을 나가버렸다(...).
  • 뉴욕 경찰청장 때와 주지사 시절에는 검은 망토로 변장하거나 경찰관으로 변장하고 공무원들이 있는 곳을 돌며 졸거나 근무를 똑바로 안 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즉석에서 질책했다고 한다. 일종의 암행어사를 직접 했던 셈.
  • 아이들을 무척 좋아해서 대통령 시절에도 자식이나 조카들을 데리고 어울려 놀곤 했다. 함께 사냥을 가거나 승마를 하기도 했으며 베개싸움까지도 했다. 심지어는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 만찬장의 쥐잡기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영부인 이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제 아이가 7명인데(원래 루스벨트 부부의 아이는 6명인데, 남편까지 합쳐서 한 말) 시어도어가 제일 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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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편지에 그린 그림. 두 번째 그림은 백악관 정원의 풍경이다.

  • 그림 실력이 "출중"했다. 자식들이나 어린이들에게 직접 편지를 썼는데 어린이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아이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항상 그림을 그려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의욕과는 달리 실력은 그다지... 그래도 일본의 모 성우보다는 나은 수준이다
  • 이승만도 루스벨트를 만나본 적이 있다. 이승만은 1905년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태프트와 접촉했고, 태프트의 소개장을 통해 루스벨트와 만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용무로 만난 건 아니고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만난 건데,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맺어진 때였고(밀약을 TR이 조인한지 5일된 시점이었다) 상기된 앨리스 루스벨트의 방문에 고종이 신경쓴 것처럼 미국에 대해 걸고 있는 고종의 희망과 관련있다. 루스벨트는 이승만을 만나러 와서 이승만이 내미는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문서를 쓱 훑어보고는 "이렇게 하지 말고, 정식 외교 창구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시오"라고 하고 바로 가버렸다고 한다. 거절 의사를 완곡하게 표현한 외교적 수사였으나 당시 서양 외교를 잘 몰랐던 이승만은 이제 다 된 줄 알고 주미 한국 공사관의 공사 김윤정에게 미국 외무성에 문서를 보내달라고 했으나 김윤정이 '본국 훈령이 없인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며칠을 거듭한 요구에도 김윤정이 거절하자 이승만은 격분하여 김윤정과 그 가족들에게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김윤정에게 욕하던 중 김윤정 공사의 가족이 오자 애들에게 '너희들 아버지로 인해 너희는 노예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공사 김윤정이 일본과 내통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한 것은 불명. 그러나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이 '한국 병합에 지대한 공헌을 함'이라는 평가와 함께 중추원 참의직을 수여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다고 한다. 김윤정의 자손 측에서는 분명히 그걸 미 국무성에 전달했으나 '12시에 오라'며 사실상 거절당했다고 주장한다. 여담으로 이승만은 일기에 김윤정 가족에게 온갖 욕을 퍼붓고는 기운이 설사하듯 빠져나갔다고 기록했다.
  • 유명한 맥스웰 커피의 광고 문구인 "마지막 한 방울까지(good to the last drop)"[24]가 바로 이 양반 작품. 1907년 그는 맥스웰하우스 커피점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는데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저 말을 하며 격찬했다고 한다. 루스벨트의 이 말은 오늘날에도 맥스웰의 광고 문구로 쓰이고 있다. 덧붙여 그는 엄청난 커피광이었다고.[25]
  • 미국의 상징동물을 흰머리수리에서 회색곰으로 바꾸려고 했다.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흰머리수리가 강한 미국의 상징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고... 하긴 미국도 대륙국가지... 러시아와 매치!? 곰도 물고기나 잡아먹고 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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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텍사스라는 애마가 있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도 꽤 된다.
  • 사진기억력을 가져 매일 아침 커피타임에 책 한 씩을 읽었다고 한다. 한 번은 친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책을 빌려줬는데 책의 분량이 좀 많았다. 그러나 저녁 식사 때 초대되어 다시 찾아가보니 대통령은 이미 그 책을 독파하여 '그 책 읽어보니까 어떤 부분은 어떻고...'라며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 친구에게 열심히 설명했을 정도. 속독 능력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다독으로도 유명했다. 덧붙여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속독 능력자였다고 한다. 이거슨 우월한 가문과 학벌[26]의 힘?

이 외에도 루스벨트는 대단히 많은 화제를 뿌린 인물로 그의 다혈질이지만 능동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는 꽤 많다.

  • 그에게 38구경 권총이 있었는데, 인생을 함께 한 총이었다. 이 총은 박물관에서 두번이나 도난당했다. 첫번째 도난은 박물관 뒤 숲에서 찾았고 두번째 도난은 어처구니없게[27] 잃어버린 후 20년만에 되찾게 되었다.

6 픽션에서 등장하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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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살아있다' 영화에서 故 로빈 윌리엄스가 이 역으로 등장했다. 영화 리뷰어들 중에서 역사에 별 관심이 없는 리뷰어들이 이 영화의 루스벨트를 프랭클린 루스벨트로 착각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이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 래리 델리(벤 스틸러 분)의 좋은 조력자. '행복의 열쇠'에 대한 이야기가 포인트. "난 루스벨트가 아니라 공장에서 나온 밀랍 인형이야. 그런데 자네는 뭔가?"라며 래리에게 용기를 주는 장면은 나름 멋지다. 본인은 테디라고 불리는 걸 싫어했는데 여기서는 테디라고 불러도 별 반응이 없다. 배우 보정인가? 인기 캐릭터라 3편까지 연속 출연했으며, 안타깝게도 이 3편에 출연한 루스벨트가 로빈 윌리엄스의 마지막 연기가 되었다.


위 영화의 주요 촬영장소가 된 뉴욕의 미국 자연사박물관 입구의 동상 주인공이 바로 루스벨트다. 이 동상 옆의 아메리카 원주민 때문에 인종차별 상징 등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 듯.

2011년 개봉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두(The Rise of Theodore Roosevelt)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루스벨트 역으로 출연한다. 이 영화는 동명의 루스벨트 전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 전기는 버락 오바마가 애독하는 책 중 하나라고. 루스벨트의 삶을 다룬 3부작 전기중 1부에 해당된다. 루스벨트의 탄생부터 전임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는 곳까지 1부, 2부인 시어도어 렉스는 대통령 퇴임까지를 다루고 있다. 참고로 이 논픽션의 작가는 80년대 레이건 친화적인 전기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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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작품인 '러프 라이더즈'에도 주인공격. 루스벨트가 러프라이더로 참전한 미국-스페인 전쟁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루스벨트 역으로 톰 베린저가 출연. 미국의 입장에서만 전쟁을 해석하고 있지만, 시대적 고증은 괜찮은 편이니 19세기 말엽의 무기나 전쟁에 관심이 있다면 볼 만한 영화.

레드얼럿3에서는 러시모어 산에 있는 그의 머리 위에 ICBM 발사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름하여 '루스벨트 지구 멸망'이라는 병기로 개조되었다. 오오 테디 오오.

타임라인-191 시리즈[28]에서는 1편에서는 농장주를 하다가 의용병을 이끌고 캐나다의 영국군을 무찌르는 영웅으로 나오고 이후 민주당 대통령이 돼서 북부를 부흥시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나온다. 최전선에 시찰가는 장면이 버젓히 나온다. 다만 여기서는 퇴임후 골프를 치다가 사망하는 걸로 처리된다.

영국에서 나온 대체역사 소설 시리즈에서는 루스벨트가 1912년에 진짜로 암살된 후 혼란의 와중에서 트로츠키주의에 감화된 사회주의자들이 공산혁명을 일으켜 대통령 일가를 참살하고 유럽 자유주의의 강대국인 러시아와 냉전구도를 이끄는 이야기도 있다.


문명 6에서 미국 지도자로 전작인 문명 5의 워싱턴을 제치고 확정되었다. 적당히 데포르메가 가해져서 호시카게 소라노스케 느낌의 귀여운 아저씨가 되었다. [29]

  1. 별 의미는 없지만 전임과 후임 대통령이 모두 윌리엄이다.
  2. 루스벨트가 즐겨 사용한 말. 루스벨트는 이 말을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아프리카 속담'이라고 소개했다. 아프리카인은 때래야 말을 잘 듣는다 루스벨트의 외교 정책은 물론 개인적 인품도 잘 보여주는 말로 특히나 'Big stick'은 거의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되었다. 이 말은 Dawn of War 1편에서 가브리엘 엔젤로스의 "Walk softly and carry a big gun"으로 패러디된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제라툴도 이 말을 패러디했는데(Speak slowly, and carry a large warpblade) 블리자드의 로컬라이징 센스가... 심지어 대사가 이렇게 바뀐 날도 12월 12일로 12.12 군사반란일과 같다! 블코의 노림수. 물론 성우드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정치적 목적은 전혀 없다.
  3. 솔직히 말해서 그의 공적은 과장된 면이 많았다. 그가 빛을 발휘한 산후안 고지 전투 때는 러프 라이더보다 흑인 보병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피해를 제일 많이 보았다. 오히려 미군의 10분의 1밖에 안됐던 스페인군들이 가망도 없는 상황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흑인 부대에서 용맹히 전사한 이들은 비록 루스벨트가 있었던 곳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싸웠지만 훈장도 못받은 경우가 많았다. 루스벨트가 미디어 때문에 크게 부각되어서 이득을 본 셈이라는 의견도 많다.
  4. 에릭 홉스봄, <<제국의 시대>>, 김택동 옮김, 한길사, 1998, pp. 91-92
  5. <<루스벨트 서한집>> 1., 최정수, <T.루즈벨트의 '世界政策'>, 2001에서 재인용.
  6. 사실 먼로 대통령이 먼로 독트린을 발표하기 직전 구상 단계에도 존재했던 조항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실효를 거둘 수 없으리라고 판단했기에 최종적으로는 제외됐던 부분.
  7. 인기있던 가렛 호바트Garret Hobart가 1899년 병사해버렸다.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이라 남은 1기 임기의 후임자는 없음.
  8. 이것은 원래 23대 대통령이었던 벤저민 해리슨 시절에 제정된 것이지만 그 시대에는 큰 효용을 보지 못했다. 이 법안을 제대로 사용한 인물이 바로 루스벨트.
  9. 이 시기 아무것도 모른채 중립화 논의를 위해 찾아온 이승만을 만나기도 했다. 겉으론 좋은 말로 돌려보냈지만 이미 거래는 끝난 다음이었다. 젊어서 미국을 일종의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이승만은 속은걸 깨닫자 큰 충격을 받았다.
  10. 결혼 후의 성은 '롱워드'.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자녀 6명 중 유일하게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로, 그녀의 어머니는 난산으로 이틀 뒤 죽었다.
  11. 이 사건은 당시 대한제국 황실 의전담당차 있던 독일인 에마 크뢰벨(Emma Kroebel)이 본국에서 <나는 어떻게 조선의 황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라는 책을 펴내면서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1909년 11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에서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기사가 실리자마자 다음날, 그녀의 남편인 니컬러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 공화당 의원이 내용이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심지어 그녀는 이 기사를 보고 비웃었다고 한다. 결국 코넬 대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던 한국인 사서가 관련 사진을 발견함으로서 에마의 말이 맞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12. 단적으로, 같은 시대 인물인 고종과 명성황후가 12촌간이다(!). 근친혼을 극도로 배척한 조선에서도 결혼도 가능한 촌수, 즉 레알 남남이라는 소리다. 12촌이면 할아버지와 손자만큼 나이차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23살 차이.
  13. 그가 본 책,그가 쓴 책은 모두 읽어봤을 정도.
  14. 사실 이 경우 일본이 미국에 피할 수도 있었던 불필요한 싸움을 걸었다가 못 미치던 국력으로 결국 밀려 패망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미국일본에 별 감정도 없었고(1937년에 양자강에서 미군함이 일본군에 의해 침몰했는데 25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는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을 정도였다), 주요 관심은 유럽 전선에 있었던 데다가(물론 이게 진주만 공습의 주 원인이 되었지만) 미국 내에는 전반적으로 반전여론이 퍼져있었다. 프랭클린도 히틀러는 위험 분자로 봤지만 일본군 지도부에는 별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프랭클린이 일본을 아작낸 계기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가 자초했다고 봐도 무방하다.그래도 한국에겐 은인
  15. “My father always wanted to be the corpse at every funeral, the bride at every wedding and the baby at every christening.”출처
  16. The Passing of the Great Race(위대한 인종의 쇠망)을 집필했는데, 북유럽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내용이 가득하다. 이민제한법도 적극적으로 주창.
  17. 아이러니한 점은 인종주의자에 극렬 보수주의자였지만, 정작 그랜트 본인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은 거의 확정적 의심이다.
  18. 자신의 친구인 '아웃룩 매거진(Outlook Magazine)'의 편집장 조지 케넌(George Kennan)이 1905년에 출간했던 '나태한 나라, 한국'에서 조선인은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몸과 옷차림이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고 악평을 적었는데 루스벨트는 케넌에게 “한국에 관하여 쓴 당신의 첫 번째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며 극찬하였다.
  19. 이 대학은 1982년 이후 자주 미국의 정치학자들이나 역사가, 정치인 등을 모아서 대통령 업적평가를 한다.
  20.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간의 갈등. 제국주의 국가가 주로 북반구에 있던 것에서 유래.
  21.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농무상과 법무상을 지냄
  22. 러시아를 원래 싫어하기도 해서 이러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흑인, 황인, 백인을 통틀어서 제일 진실하지 못하고, 불성실하고 거만한-줄여서 말하면 절대 믿으면 안되는-사람들이 러시아 사람이다"No human beings, black, yellow or white, could be quite as untruthful, as insincere, as arrogant — in short, as untrustworthy in every way — as the Russians
  23.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매킨리 암살을 사주했다는 음모론을 믿는 자였다.
  24. 정확하게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좋구만!"이지만 한국에서는 저 표현으로 쓰인다.
  25. 하지만 이것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한창 반미운동이 일어났을 때 맥스웰의 홍보대사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혐한이었다는 이유로 한 동안 불매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26. 두 대통령 모두 하버드 졸업생이다.
  27. 앤더슨이라는 사람의 여자친구의 남편이 훔친걸 앤더슨에게 알려줬고 앤더슨은 그걸 FBI에 연락하였다.
  28. 남부연합이 승리해서 미국이 분단되는 대체역사물
  29. 본작에서 지도자들 이미지는 실사풍과 캐리커처풍 이미지를 적절히 조합한 형태가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