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에서 넘어옴)
미국 대통령
31대32대33대
허버트 후버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해리 S. 트루먼
역대 뉴욕 주지사
250px
45대46대47대
앨 스미스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허버트 H. 레만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
미국영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해리 S. 트루먼조지 6세네빌 체임벌린윈스턴 처칠클레멘트 애틀리
중화민국소련(자유) 프랑스
린썬장제스미하일 칼리닌이오시프 스탈린샤를 드 골
공식 초상화
풀네임Franklin Delano Roosevelt
출신 정당민주당
생몰년1882년 1월 30일 ~ 1945년 4월 12일 (만 63세 2개월)
재임기간1933년 3월 4일 ~ 1945년 4월 12일 (12년 1개월)
서명
188cm
1932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32
300px
피에르 라발[1]
1931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1932
휴 새뮤얼 존슨
1933
1934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34
300px
휴 새뮤얼 존슨
1933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1934
하일레 셀라시에[2]
1935
1941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41
300px
윈스턴 처칠
1941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1941
이오시프 스탈린
1942
1933년 취임 첫 해.1945년.

1 개요

20세기를 이끈 거물급 정치인 중에서 단연 손꼽히는 인물.[3]
세계 대공황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장식한 인물.
미국의 존경받는 대통령 순위에서 항상 상위권에 들어가는 민주당의 대표적인 리더.
-티무르 이후 세계 최강의 절름발이-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줄여서 'FDR'이라고 한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이며 민주당 소속이었다. 그리고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번 대통령을 지낸 사람. 200년 넘는 미국 헌정 사상 세번 이상 대통령을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유일하다.[4] 원래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이 없었으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이래로 중임까지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글로벌 위기 속에서 어쩌다 보니 관례를 깨고 4선이나 하면서 비로소 헌법에 중임 제한이 추가되었다.

2 일생

2.1 성장과 젊은 시절

파일:RvKf4Sp.gif

1882년 1월 30일, 뉴욕 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 시어도어와의 관계에 대해 숙부와 조카뻘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지만 상당히 촌수가 먼 편으로 이정도면 사실상 남남. 그의 조카딸 앨리너와 1905년에 결혼을 했다. 공교로운 건 시어도어가 공화당원이었던 반면 프랭클린은 민주당원이었다. 18세기에 루스벨트 집안이 갈라지면서 정치적 성향 또한 차이를 보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화당엔 시어도어의 아들들이 이미 진출해 있어서 블루 오션을 노린 것이다. 다만 사적으로는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시어도어에 대해 존경하면서도 언젠가는 넘고 갈 라이벌로 여겼다고.[5]

아버지는 유복한 지주이자 델러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었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FDR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과 여행으로 견문을 쌓다가 19세기판 홈스쿨링? 14살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역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학창 시절은 큰 재미없이 보낸 듯 하다. 어려서부터 귀공자처럼 혼자 자라서 그런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다만 본인은 공부만 파는 체질은 아니었고 운동과 밖에 돌아다니는 옥외활동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220px-Franklin_Roosevelt_Secretary_of_the_Navy_1913.jpg210px
1913년 해군 차관 시절. 길다그의 젊은 시절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을 역임한다. 이때부터 대니얼스 전 장관을 '보스'로 모셨다고. 이때 대니얼스는 루스벨트가 자기를 깐 적도 있지만(출처가 없다) 대인배스럽게 계속 그를 후원해주었다고. 이래선지 혹자는 대니얼스를 둔 루스벨트는 천운의 소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대니얼스를 멕시코 대사로 보낸다. 또 이때 '루이 하우'라는 비서 겸 동료를 얻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루즈벨트 곁에서 킹메이커로 많은 정치적 조언을 해주게 된다. 해군차관 시절 해군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루스벨트가 친분을 맺게 해 이들을 루스벨트의 지지그룹으로 만든 것도 루이 하우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출처.

파일:9lJZ61K.jpg

그의 부인인 엘리너[6]의 젊은 시절 사진.

1905년 3월 17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이자 자기에게 먼 친척뻘(13촌이라고 한다)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근데 이후 부인 엘리너의 비서인 루시 머서와 추문을 일으켜 엘리너와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실제 루스벨트는 엘리너와 이혼하고 루시와 재혼할 생각이었으나, 극구반대하는 어머니와 정치인생에 결코 도움될게 없다는 하우의 설득으로 루시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 엘리너와 겨우 화해했고, 이후 루시도 다른 사업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자주 밀회를 즐겼다는 말이 있으며훨체어 탄 양반이? 훗날 루스벨트의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고.

2.2 장애와 시련 그리고 재기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콕스와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 당시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이를 강력히 지지하는 정강을 채택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어 워런 하딩의 공화당에 참패하여 낙선한다.

더구나 1921년 8월, 캐나다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에 걸리고, 반신불수가 되어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7]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그의 D 의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뉴욕 주지사 앨프리드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여기서 얻은 별명이 '뉴욕 주지사의 행복한 전사'였다.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하여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이 때부터 혁신 정책을 실행했는데,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州)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화로에 앉아 라디오로 연설을 한 이른바 노변담화(Fireside chat)를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세는 훨씬 심각했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감이 많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했으며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fdr-chair.jpg
뉴욕 하이드파크 자택에서 애견 팔라, 저택 관리자의 손녀와 함께. 참고로 이 사진에서는 다리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반신이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 사진은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타고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동차나 열차에서 내리거나 걸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보도지침 역시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켜주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처음 발령받은 신참 기자가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으려하자 동료기자들이 밀쳐서 카메라를 떨어뜨린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의 장애는 잘(?) 숨겨졌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었다고 기억한 방문객이나 지인이 많았고[8], 그가 죽고 나서야 대통령이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도 많았을 정도였다.

2.3 대통령이 된 후

tel0-056.jpg
1932년 1월에 대통령직에 도전했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1933년 2월 즈음 취임을 앞두고 마이애미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범인은 시카고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주세페 잔가라(Giuseppe Zangara). 잔가라의 총알은 빗나가 그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앤턴 서맥의 가슴에 맞았고 결국 시장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사건에 대한 여러 이론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이 사건의 목표가 애초에 루스벨트가 아닌 서맥이라는 것이다. 서맥 시장의 전횡(?)에 화가 난 시카고 마피아들이 잔가라를 미끼로 하여 루스벨트를 암살할 것처럼 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맥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시 잔가라의 총과 서맥이 맞은 총탄 구경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내세워지기도 한다. 어느 설을 믿을지는 알아서 하자.

여하간, 한 달 뒤 그가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 했던 말은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FDR_labor2.jpg
촬영 끝나면 손 떼 임마
노동자의 선택, 루스벨트. 1936년 대선 포스터. #

대통령이 된 후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미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우선 취임하자마자 바로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은행을 휴업시켰고, 공공사업 확대와 실업자 구제, 복지 확충과 금융 개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뉴딜(New Deal)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유명한 것이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사 사업으로 일자리를 실업자들에게 제공한 것. 또한 당시 방임적인 기업정책을 수정하여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법인 와그너법의 제정과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를 만들어낸 사회복지법의 제정 등을 들 수 있다. 당시로써는 과감했던 이런 정책들의 시행으로 1936년 무렵에는 실업률이 줄고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등 경제가 개선되었다. 이런 공적에 힘입어 1936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어 재선되었다.

이때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이 폭풍 간지다.

For twelve years this Nation was afflicted with hear-nothing, see-nothing, do-nothing Government. The Nation looked to Government but the Government looked away.
지난 12년 동안 이 나라의 국민들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일을 못하는 정부로부터 고통을 받았습니다. 국민은 정부를 바라보았지만 그 정부는 국민을 외면하였습니다.

Nine mocking years with the golden calf and three long years of the scourge! Nine crazy years at the ticker and three long years in the breadlines! Nine mad years of mirage and three long years of despair!
물신(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눈이 멀었던 9년 그리고 재앙의 기나긴 3년! 주식시세에 미쳤던 9년 그리고 식량배급줄에서의 기나긴 3년! 신기루에 미친 9년 그리고 절망의 기나긴 3년!

Powerful influences strive today to restore that kind of government with its doctrine that 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is most indifferent.
오늘날 강력한 세력가들은 무관심한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자신들의 교리를 앞세워 그러한 정부를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For nearly four years you have had an Administration which instead of twirling its thumbs has rolled up its sleeves. We will keep our sleeves rolled up.
지난 4년 남짓동안 여러분은 손가락만 빠는 대신 소매를 걷어붙이는 정부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는 계속 소매를 걷어붙일 작정입니다.

We had to struggle with the old enemies of peace—business and financial monopoly, speculation, reckless banking, class antagonism, sectionalism, war profiteering.
우리는 평화의 오래된 적과 투쟁해야 했습니다 - 산업과 금융 분야의 독점, 투기, 무절제한 은행업, 계급간의 대립, 파벌주의, 전쟁으로 부당이득을 챙기는 이들 말입니다.

They had begun to consider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s a mere appendage to their own affairs. We know now that Government by organized money is just as dangerous as Government by organized mob.
그들은 미국 정부를 그저 자기 사업을 돕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직적 자금으로 만들어진 정부는 조직폭력집단이 만든 정부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Never before in all our history have these forces been so united against one candidate as they stand today. They are unanimous in their hate for me—and I welcome their hatred.
미국 역사상 이제껏 한번도 이 세력들이 한명의 후보에게 이토록 대항해 힘을 모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저를 증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합니다.
ㅡ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 # 편집 영상.

2기 임기에서도 뉴딜정책을 계속 추진해 1939년 주당 44시간 노동을 확립한 공정노동표준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시급 25센트 이상의 최저임금을 보장했다. 그러나 2기 임기에서 뉴딜정책의 효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불경기가 몰아쳤고 특히 파시즘의 도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의 문제에 적극 개입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론 당시의 불경기에 대해 현대에 와선 고전학파들의 분석과 달리, 3년간의 호황이 지속되자 재정지출을 잠시 줄였더니 오히려 일어난 참사였다는 분석도 나온다.[9]

그 와중 1940년 루즈벨트는 조지 워싱턴 이래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지켜져오던 3선 금지의 룰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 3번째로 출마한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3선을 반대하는 포스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나 전쟁의 여파가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워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지지했고 3선에 성공한다. 실제로 미국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1941년 공식 참전 선언을 할 때까지 개전 후 약 2년 정도 중립을 유지했는데 1940년이 딱 그 사이였던 것.

그리고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던 무렵인 1940년경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이 '잘못'이었다는 여론이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미국인들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지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한 루스벨트 본인도 세 번째 취임 때 4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부분적으로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밝힌 4가지 자유란 '표현과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다름아닌 전쟁을 의미. 물론 방법적으론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나치라서 안돼 여튼 서서히 미국도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41년 일본삽질 진주만 공습 이후 루즈벨트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대일 선전포고 연설 영상. 앞 부분을 따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불린다.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공군으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미국은 일본 제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으로, 그들의 정부와 황제를 상대로 함께 태평양에서의 평화유지를 목표로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 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 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사실, 일본 비행 편대들이 미국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 후, 주미 일본 대사와 그의 동료는 우리의 국무 장관에게 미국 정부의 최근 서한에 대한 공식답변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서는 외교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지만, 군사적 공격 혹은 전쟁과 관련된 협박이나 암시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습니다.[10]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한다면 공격은 수일 혹은 심지어 수주 전부터 고의적으로 계획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유지를 희망하는 표현과 진술로 고의적으로 미국정부를 기만하였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하와이 제도에 대한 어제의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매우 많은 미국 국민들이 희생되었음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들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어제 일본 정부는 또한 말레이반도(말라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홍콩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어제 밤 일본 군대는 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어제 밤 일본 군대는 필리핀 군도를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어제 밤 일본 군대는 웨이크 섬을 공격하였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 군대는 미드웨이 군도(群島)를 공격하였습니다. [11][12]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그러므로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이 이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미 뜻을 굳혔고 우리 나라의 생명과 안전에 초래된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13] 미국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서 본인은 국가 방위를 위한 모든 조치를 지시하였으며, 이조치는 모든 국민이 우리에게 가해진 침략의 성격을 기억하도록 할것입니다. (박수갈채)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우리가 이 계획적 침공을 격퇴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힘을 모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박수갈채)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최선을 다해 우리 자신의 방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식의 배신 행위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의회와 국민 모두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박수갈채)

Hostilities exist.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이제 침략의 위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 사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So help us God.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결연한 의지로써, 우리는 기필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박수갈채)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의 일방적이고 신의 없는 공격이 개시된 시점에서,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14](박수갈채)

그 직후 나치 독일 제3제국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미국은 한 번에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루스벨트는 태평양 방면으로 더글러스 맥아더체스터 니미츠 제독, 유럽 전선으로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등을 파견하여 2차대전에서 미군이 큰 역할을 하게 했다.

이렇게 전쟁을 지도하던 와중에 1944년에 공화당에서는 토머스 듀이[15]가 대권에 도전하나 여기서도 또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4번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듀이는 루스벨트에게 있어서 제일 위협적인 상대였던 것도 사실. 훗날 해리 S 트루먼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FDR 4선 저지를 위해 반대진영에서 내놓았던 논리 중 하나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른 척 했다."라는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그런 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4선 저지는 실패.

다만 당시에도 3선과 달리 4선은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3선은 미국 내에 루스벨트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인데다 외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대통령으로 뽑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인식이 강했으며 이는 얼마 후 터진 태평양 전쟁으로 증명되었지만, 4선 당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서 이미 일본도, 독일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차피 전쟁은 공화당이 재집권해도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루스벨트가 4번이나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루스벨트는 이미 건강 상태가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었는데[16] 자칫 사망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면 미국 전체가 난리가 날 수도 있었다. 트루먼이라는 유능한 후계자의 등장으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루스벨트 사후에도 논란이 되면서 1951년 수정헌법 개정에 따라 3선 이상을 무조건 금지하게 된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윈스턴 처칠, 소련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2.4 승리를 눈앞에 두고…

550px
550px
얄타에 모인 20세기를 풍미한 세 정객들.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삼대장

1945년 3월 말, 대통령은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4월 12일 여기서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면서 테이블의 여러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한 화가가 그리고 있었는데, 오후 1시 15분 루즈벨트는 갑자기 "뒷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란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 뇌출혈이었다. [17]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숨이 멈춘 시각은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이 일은 갑자기 일어난 거지만, 사실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걸 알 수 있다. 얼굴은 수척한데다 악수도 몹시 힘들어하던 상태였다.

이 때문에 부통령 위임을 예상치 못했던 아돌프 히틀러는 잠시동안 멸망 직전에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으로 기사회생한 프리드리히 2세의 전례의 재현을 꿈꾸지만…현실은 시궁창.[18] 후임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맡았다. 이 때 트루먼은 영부인 앨리너의 전화를 통해 대통령의 부고를 접했는데 앨리너가 "트루먼 씨, 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하자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오.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 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미국의 라디오 특파원으로 있던 에드워드 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3 평가

FDR은 수렁에 빠진 미국 경제를 살려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위대했던 미국 대통령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반면 미국 보수파들에게는 의외로 뉴딜정책의 성과가 알려진만큼 크진 않으며 실질적인 불황탈출도 전쟁이 주원인이었다는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논리와 함께 자유시장경제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로 개입하지않아 유럽이 초토화되고,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를 당하는 동안 수수방관했다는 비판도 있다.[19]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스탈린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해줘, 이후 냉전 체제의 빌미를 줬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점을 들어 조지프 매카시 같은 미국내 극우파는 루스벨트와 후임 트루먼을 싸잡아 '반역의 20년 정권'(...)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이외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수용한 것도 그의 큰 오점으로 꼽힌다.[20] 다만 루스벨트 시절은 영부인인 엘레너 루스벨트 등의 활약으로 반일감정은 몰라도 인종주의는 오히려 어느정도 해소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4선을 하며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장기집권의 씨앗을 낳을 뻔한 점도 비판을 받는다. 이전까진 명문화되어있지 않아도 알아서들 2선까지만 하고 말았는데, 루스벨트가 관례를 깨고 4선을 해서 그의 사후 3선 이상을 금지하는 헌법조항이 명문화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결국 4기 도중 루스벨트는 사망하는데 이렇게 건강이 안좋은 상태에서까지 집권한 것이 어떤 책임감 때문인지 권력욕 때문인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 물론 루스벨트 본인은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신념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리버럴 진영에서는 일부 보수층의 주장처럼 뉴딜정책이 효율적인 정책이 아니었다손 치더라도,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고 미국내 파시즘의 등장을 막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나쁘면 객관적 수치랑 무관하게 사회는 극우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역사적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당시 미국에도 파시즘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니. 또, 루스벨트 행정부 2-3기 때의 경기침체의 경우, 뉴딜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설과 오히려 재정지출 감소 때문에 즉 뉴딜정책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정반대의 견해(크루그먼)가 대립한다.

어쨌든 제법 논란의 여지를 남긴 대통령이지만 사실 이런 다양한 평가가 개방된 사회라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대공황의 극복과 2차대전을 승전으로 이끌어 오늘날의 초강대국 미국을 만든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공감하며, 오늘날에도 조지 워싱턴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 업적 평가나 인기 순위를 조사하면 항상 세 손가락 내로 드는데, 2010년 시에나대학의 업적 평가에선 마침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편, 루즈벨트의 집권은 공화당민주당의 정치 성향 및 지지 기반이 서로 바뀌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루즈벨트가 일명 '뉴딜 동맹'이라 하여 소수인종-유태인-이민자-노동자-농민 지지층을 확보하게 되었고, 21세기 현재까지도 비백인 이민자 계열(특히 흑인 및 히스패닉)은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층으로 자리잡아있다. 반면 공화당은 링컨 이후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흑인 집단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적 성향 또한 뉴딜 정책을 계기로 민주당은 시장 개입 및 복지 정책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리버럴 성향이 강해진 반면, 공화당은 보다 자유방임주의에 근거한 시장친화적 성향으로 바뀌게 된다.

4 트리비아

4.1 애완견 팔라(Fala)

Fala-sm.jpg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백악관에서 개를 길렀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대단한 애견가로 알려져있다. 평생 동안 많은 개를 길렀는데 대통령 재직 중에도 8마리의 개를 백악관에서 길렀다. 가장 유명한 개가 스코티시 테리어 종인 팔라. 친척인 마가렛 서클레이로부터 받은 개였는데 백악관에서 길렀던 개들 중 루스벨트가 제일 아낀 개로 알려져 있다. 이 개의 밥도 손수 챙겼으며, 사적 외출은 물론 공식 행사나 외국으로 출국할 때에도 이 개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한 번은 알류산 열도의 한 섬을 방문했다가 팔라가 없어져서 그 섬으로 사람들을 동원해 개를 찾아냈다. 이를 가지고 공화당에서 "개 하나 찾으려고 군함을 보냈다",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난했는데, 이에 대응하여 1944년 9월 워싱턴 D.C.의 팀스텀스 노동조합 앞에서 이른바 '팔라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의 일부만 인용하면,

…(전략)…"아시다시피 팔라는 스코틀랜드산이죠. 스코틀랜드산으로써, 의회 안팎에서 소설을 쓰는 공화당 사람들이 제가 자기(팔라)를 알류산열도에 남겨놓았고 다시 자기를 찾기 위해 납세자들로부터 2백만 달러에서 3백만 달러, 혹은 8백만 달러에서 1,200만 달러의 부담을 지우면서 구축함을 보냈다고 하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걸 알고 (팔라가) 분노했습니다...(중략)...전 저 자신에 대해서는 제가 오래되고 벌레가 갉아먹은 같은 온전치 못한 사람인데도 꼭 필요한 사람으로 행세했다는 거짓말과 같은 악의적 거짓말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저는 화를 낼 권리가 있고 제 개에 대한 모략에 반대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약하면 난 욕해도 좋지만 팔라를 욕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라고나 할까.(...) 애견 동호인들에겐 훌륭한 우상

Fala-FDR_1633.jpg
루스벨트 기념관에 있는 루스벨트와 팔라 상

그러나 이 연설을 한 이듬해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원래 주인인 마가렛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장례식 도중 장송곡에 맞추어 낑낑대다가 루스벨트의 관이 땅 속으로 내려지자 잔디밭 위를 구르며 재롱을 부렸다고 한다. 이후 루스벨트의 영부인 앨리너와 살다가 7년 뒤인 1952년 4월 5일 죽었다. 이 날은 팔라의 12번째 생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루스벨트 내외의 무덤 바로 옆에 묻혀 있으며 워싱턴에 있는 루스벨트 기념관 앞의 루스벨트 동상 옆에 함께 조각되어 있다. 지금도 루스벨트를 캐리커처하면 팔라가 함께 그려질 정도로 루스벨트와 뗄 수 없는 동물로 남아 있다. 그야말로 충견.

519738884_a424169f4b.jpg
루스벨트 내외와 팔라의 무덤. 루스벨트 부부 묘 뒷편에 보이는 조그만 기둥이 팔라가 묻힌 곳이다.

4.2 기타 일화들

  • 1940년 어느 날, 쿠바의 어떤 14세짜리 꼬마에게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를 쓴 꼬마가 영어가 하도 서툴러서 내용 이해도 힘들었던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편지 내용이 가관이었다. 그 편지에는 "10달러짜리 지폐를 본 적 없는데, 제가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나요?"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꼬마는 훗날 쿠바를 뒤집어 엎어 버렸다.편지는 현재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전시되어 있다.
  • 한 번은 감기에 걸려서 자리보전을 했는데 워싱턴 포스트가 이를 보도했다. 그런데 기사 제목을 'Roosevelt in Bed with Cold(감기로 자리보전하는 루스벨트)'라고 적었어야 했던 것을 그만 'Roosevelt in Bed with Coed(여대생과 동침한 루스벨트)'라고 인쇄해 버렸다. 당연히 백악관도 난리가 났고 워싱턴포스트도 이 오류를 알고 즉각 수정에 나섰다. 이를 안 루스벨트는 워싱턴 포스트에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인데요. 초판 100부를 주실 수 없습니까? 제 친구 모두에게 한 부씩 보내고 싶어서요."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오보를 정정하고 초판은 이미 처분한 뒤였다고. 이 외 자신을 비판적으로 그린 풍자만화들을 수집해서 아예 휴양지나 백악관의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대인배스런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어떤 노골적인 풍자만화를 읽고는 그 만화에 '참 잘했어요' 정도의 의미인 grand라는 표시를 적어 놓았다고. 인증샷 광
  • 엄청난 우표 수집광이었다. 우표덕후 재임 중에는 친구이자 우취가인 제임스 A. 팔리를 우정장관에 임명하여 친구와 함께 전국적인 단위로 우표덕질을 했다. 어머니의 날 기념우표 도안을 직접 해서 우정장관에게 전달한다든가, 시쇄에 반드시 친필 서명을 남긴다든가. 하지만 이 우취 오덕질은 단순한 오덕질 수준이 아니라, 대공황기와 2차대전 중에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또 다른 수단으로도 쓰였다. 당시 주영 미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21]의 아들인 로버트 케네디[22]에게 자신이 모은 우표를 보내주기도 했으며 로버트가 루스벨트에게 감사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때 루스벨트는 로버트에게 우표들을 보내면서 적은 편지에 "짬 나면 백악관에 한 번 놀러와라. 내가 모은 우표들을 보여주마."라고 염장을 질렀다 쓰기도 했다. 우표 수집광인 능덕 대통령답게 그가 수집한 우표를 보고 있는 도안으로 우표가 여러 번 발매되기도 했는데, 그 중엔 루스벨트가 육손인 도안도 있다.(...)
바로 이거, 1947년 모나코에서 발행한 기념 우표. 이 도안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다른 루스벨트 관련 우표보다 가치가 높다고 한다.
  • 뉴딜이 영국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영향으로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의외로 뉴딜 정책은 케인스주의로 인해 수립된 정책은 아니다. 당선 직후 루스벨트는 백악관에서 케인스를 직접 만나서 대화도 해봤지만, 당시엔 균형재정을 지지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유효수요 위주 경제학에 대해서 "그 양반(케인스)은 정치경제학자라기보다는 수학자 같더구만!(“He must be a mathematician rather than a political economist”)"이라면서 그의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뉴딜 정책은 이후 균형재정 목표가 후퇴하면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정책을 집행하는 도중 케인즈가 루즈벨트에게 몇차례 서한을 보내는 등 자문을 해주기도 했고, 미국 정책을 집행하는 재무부의 관료들 중에서도 케인지언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뉴딜 정책은 간접적으로나마 케인즈주의와도 접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뉴딜정책은 수요촉진, 사회보장제도, 인프라투자 등 케인즈주의와 상당히 궁합이 잘 맞는 정책이었고, 뉴딜정책 이후 케인지언은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서게 된다.
  • russian-army-repels-hitlers-forces-31.jpg
article-1158699-004704A100000258-792_468x366.jpg
윈스턴 처칠과 죽이 잘 맞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일화가 처칠이 목욕한 후 알몸으로 있는데 루스벨트가 이를 보고 피하려고 하자 처칠이 "대영제국 총리는 미합중국 대통령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 실제로 둘이 개인적인 '우정' 같은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서로 긴밀한 관계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20세기를 풍미한 두 거목이 배포가 잘 맞았던 셈. 허나 루스벨트와 처칠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처칠은 스스로 둘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말하며 친근함을 자주 표현했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처칠에 대해서 "하루에 수백가지 생각은 하지만 그 중 쓸만한 생각은 열댓개도 되지 못한다"(...)라고 노골적인 디스를 날린 적도 있다. 그리고 둘은 몇몇 안건에 대해 의견충돌도 잦았는데, 대표적으로 드골에 대한 인식이다. 처칠은 드골을 프랑스의 유일한 지도자이자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루스벨트는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며 4선이나 하신 양반이 사후 프랑스의 지도자 문제에 대해서는 처칠과 다른 의견을 냈다.
  • 위의 드골에 대한 그의 인식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드골이 루즈벨트와 동석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내게 프랑스 부흥이란 사명을 주셨다."라고 말하자 루즈벨트는 혼잣말로 "거 참 이상하군. 난 그런 사명을 내린 적이 없는데.."라고 했다는 개그가 있다.
  • 먼 친척간이지만 친일 성향이 강했던 일빠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달리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그 일본을 개박살냄으로서 한반도 독립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으니 이것도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점. 어쩌다보니 친한파 얄타회담에서 조선독립시 미군정을 비롯한 상당기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도 있는데, 이후 전쟁과 남북독재를 생각해보면 차라리 미군정이 나았을지도.(...)
  • 해군 모의 훈련에 참가하였다가 (난전에서나 나온다는) 아군오사(...)를 당할 뻔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테헤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아이오와급 전함 1번함 아이오와호에 탑승 중 호위 함대의 훈련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플레처급 구축함 USS 윌리엄 D. 포터 함 측에서 모의 사격 훈련을 하다가 실수로 어뢰를 비우지 않고 대항군 역할을 하던 아이오와함을 향해 실탄 어뢰를 발사해버린 것. 다행히 전함은 어뢰를 피했고 배가 대서양에 가라앉을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구축함 함장을 포함한 전 승무원은 대통령 암살미수라는 엄청난 혐의로 항구에서 전원 체포되었지만, 다행히 루즈벨트가 이 일은 단순한 실수라며 사면해줘서 처벌없이 끝났다. 하지만 포터 함의 승조원들은 이후 다른 선박들로부터 '쏘지 마라! 우린 공화당원이야!'(루즈벨트는 민주당 출신)라며 놀림을 당해야 했다.(...)
  • 하반신 장애 때문에 티가 많이 나진 않지만, 저래뵈도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공동 4번째 장신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더 큰 사람도 나오겠지만 에이브러햄 링컨(193cm), 린든 B. 존슨(192cm), 토머스 제퍼슨(190cm)에 이은 188cm. 다만 키가 같은 대통령은 꽤 있는데 체스터 앨런 아서, 조지 부시(아버지), 빌 클린턴이 그와 같은 장신이다. 이때문에 한때 유행했던 2차대전 추축국 지도자와 연합국 지도자의 키 비교 짤방을 보고 장신인 드골을 빼면 승패는 미궁(?)으로 빠진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사실 그 짤방엔 루스벨트가 빠져있었다.(...)추축국 안습 여담으로 그의 먼 친척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키가 178cm였다. 당시 미국인 평균을 상회하는 키였지만, 미국 대통령 중에서는 작은 축에 들어간다고 한다.
  • 1936년 미국 미시간주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 플린트에서 3천여명의 노조원들이 GM공장을 점거하고 1달 넘게 연좌파업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경찰과 용역깡패(구사대)들이 이들을 진압하려하자 루스벨트는 미시건 주지사와 연계해 주방위군을 파견해 노조원들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루스벨트는 노동자들이 불만을 제기할 권리가 있다고 봤기 때문.

5 관련 어록

"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우선 저의 확고한 믿음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first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 forces of selfishness and of lust for power met their 'match'.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Wait a minute!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second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se forces met their 'master.'"

"저의 첫 번째 임기를 말하자면, 저 권력을 탐하는 이기적인 세력들이 적수를 만나게 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군중 환호 후) 그리고! 저의 두 번째 임기는 저 자들이 임자를 만나는 시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ㅡ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대선 연설.[23])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little."

"진보의 시험대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얹어주고 있느냐가 아니라, 적게 가진 자에게 충분히 보태주고 있느냐이다."

"They (who) seek to establish systems of government based on the regimentation of all human beings by a handful of individual rulers...call this a new order. It is not new and it is not order."

"몇몇 개별 통치자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획일화에 기반을 둔 정부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것을 '새 질서'라고 부른다. (허나) 이것은 새롭지 않고, '질서'도 아니다."

"Somoza may be a son of a bitch, but he's our son of a bitch."

소모사는 개새끼일 수도 있지. 하지만 그 자식은 우리 개새끼야.

6 현대 매체에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 129917_f260.jpg
담배를 꼬나문 루스벨트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 이 사진은 루스벨트를 캐리커처할 때 많이 그려진다. 캐리커처로 그려지거나 하면 강조되는 특징은 안경과 애용했던 아이보리 담배, 그리고 애견 팔라가 함께 그려지곤 한다.
  • 영화 웜 스프링즈(Warm Springs, 2005)는 같은 이름의 온천 요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던 시절과 그 이후 정계로 복귀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전기 영화이다.
  • 영화 진주만에서는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로 유명한 존 보이트가 배역을 맡았다. 일본 폭격을 강력히 주장하는 루스벨트에게 참모들이 일본 폭격은 불가능한 작전이라고 만류하자 스스로 휠체어에서 일어나 "내 앞에서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압권. 다만 영화 자체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 keyart_fdr_243.jpg
이런 영화도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무장을 하고 나치 늑대인간을 박멸한다는 내용이다. "나치 늑대인간을 위한 새로운 처리법(뉴딜)!"이라고 써져있는 것이 압권.(...)
  • 당연히 대체역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 그가 1932년 취임 직전에 마이애미에서 암살되어 부통령이었던 존 낸스 가너가 승계했다는 가정 아래 쓰여진 높은 성의 사나이가 있다. 필립 K. 딕의 이 작품은 대체역사소설의 효시격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가장 오래 재임한 대통령인만큼 부통령만 해도 가너, 월리스, 트루먼으로 셋이나 된다. 흥미롭게도 이들 셋의 캐릭터는 삼인삼색으로 워낙 뚜렷한데, 자세한 내용은 부통령 항목 참조.
    • 린드버그가 대선에 나와서 미국을 파시즘 국가화한다는[24] 대체역사소설 "The Plot against America"에서는 린드버그에게 선거에서 발리고 은둔하다가 린드버그가 실종된 후[25] 대선에 나와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 해리 터틀도브[26]의 단편 Stlee에서는 아예 초반에 조지아계 러시아 이민 2세인 조지프 스틸리에게 선거에서 참패하여 대통령이 되지 못한다. 참고로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스틸리의 정체는.(...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미국 사회당 출신 전쟁성 차관으로 잠깐 나온다. 실질적으로 북부의 핵개발을 진두지휘하는 인물. 이 작품에서는 루스벨트가 그렇게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었기에 조지프 대니얼스가 해군성의 거두가 돼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작중 나와서 멕시코와 남부연합령 쿠바에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구축함 이름 자체가 조지프 대니엘스호.
    • 해리 터틀도브의 월드 워 연작에서는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서 미국을 수호하는 대통령으로 나온다. 작중 워싱턴이 핵으로 날라가서(...) 미국 전역에서 지하투쟁하는 모습이 인상적, 후반에 부통령 월레스가 외계인의 핵공격으로 마이애미에서 사망하고 얼마 뒤 루스벨트도 급서하여 코델 헐이 대권을 잡는 것으로 묘사된다.
    • 데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잠시 나오는데, 일본 제국진주만 공습을 미국이 사전에 알고도 개전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방치했다는 설을 택했다. 짤막한 등장이지만 카리스마가 넘친다. '각하, 일본에 대해 채찍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당근을 택하시겠습니까?' 하는 부하의 질문에 물론 채찍 쪽이지.라고 대답하고, 진짜로 일본을 자비없이 후려친다.
    • 감벽의 함대에서는 악의 화신으로 나서서 찌질거리다가 일본제국에게 대패하고 홧병으로 급서한다.(...)
  •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김유식으로 패러디되었다. 여기서는 만두머리. 2권에선 황희 드립을 치기도 한다. 사실은 1945년에 죽은게 아니라 탈세에 대한 조사를 피하기 위해 죽은척 위장하고 소시와 평화로운 노후를 보냈다고 설정되어있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성전기사단으로 등장한다. 아돌프 히틀러와 짜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들 중 한 명이다. 다만 히틀러나 스탈린과 달리 루스벨트는 지금도 존경받는 지도자로 평가받기 때문에, 루스벨트가 성전기사단으로 나오는 설정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제작자가 공화당 지지자인가보다 차라리 성전기사단이든 암살단이든 그냥 아무 관계없는 사람으로 등장했으면 더 나았을듯
  1. 비시 프랑스의 고관으로 전후 처형되었다.
  2.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에티오피아는 1974년 군장교였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쿠데타로 군부 정권을 거쳐 사회주의 공화정이 들어서게 된다.
  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THE BIG THREE 중 하나라고 불리기도 했다. 혹은 히틀러도조 히데키의 원수 D의 일족
  4. 캘빈 쿨리지, 린든 존슨이 3선을 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3선 출마를 고사했고(그나마 쿨리지는 스스로 거절, 참고로 존슨의 첫번째 임기는 원래 케네디 대통령이 수행했어야 할 2년 미만의 임기를 대행한거라 다음 선거에 나와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은 인기가 높았지만 공화당에서 제출한 3선 금지 조항에 발목이 묶여 출마하지 못했다. 닉슨은 3선 출마를 금지하는 조항을 없애려 개헌을 준비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3선에 성공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하야한다.
  5. 재미있는 건 시어도어는 소위 일빠였는데, 프랭클린은 그 시어도어가 좋아하는 일본에게 뒤치기을 당한 후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임기 중에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후임 대통령인 트루먼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게 된다.
  6. 1884~1962년. 반신불구가 된 남편을 대신해 영부인 활동도 활발하게 했고, 1945년부터 1951년까지 국제연합대사를 지내면서 1946년에는 국제연합인권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는 등 인권과 평화활동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7. 재활의 일환으로 온천이 있는 조지아주의 웜 스프링스(Warm Springs)를 방문하여 온천욕을 경험한 후, 사재를 털어서 온천수를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요양원을 세우고 다른 소아마비 환자들과 같이 치료를 받았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임기동안 16차례나 찾았을 정도로 애용하였으며 일종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듯 하다. 이 요양원은 Roosevelt Warm Springs Institute for Rehabili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존재한다.
  8. 루스벨트는 당연히 자력으로 앉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벌어진 기억의 착각이다. (출처: The Roosevelts: An Intimate History, Ken Burns, PBS 다큐멘터리 6화)
  9. 그런데 정부의 경기부양을 지지하는 케인즈 학파도 경기가 호황에 들어서면 흑자재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임은 다르지 않다. 적자재정은 정부부채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끝이 안나는 싸움
  10. 일명 Fourteen Part Message라 불리는 일본의 선전 포고문에는 전쟁을 선포한다는 의미와 관련이 있는 표현(Declare, War against, State of War 등)이 하나도 없었다.
  11. 비유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12. 이 영상에서는 루스벨트는 미국 전함이 어뢰공격을 받았다는 문장 뒤 모든 문구를 생략하고 바로 본인이 통수권자로 행동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영상에서는 저 부분을 낭독한다. 영상 3분 25초부터 4분 43초까지
  13. 루스벨트 대통령이 생략한 문장
  14. 미국의 헌법상 전쟁 개시 권한은 의회에 있으므로 대통령은 의회에 전쟁 개시를 요청하는 절차를 거친다.
  15. 검사로서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인 럭키 루치아노에게 콩밥을 먹인 것으로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또한 루스벨트와 지역 기반이 뉴욕으로 같다.
  16. 스탈린이 대놓고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
  17. 당시 고혈압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혈압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상태였다. 병원에서 측정한 마지막 혈압이 350/190mmHg이라는 것이 흠좀무. 여담으로 기린 혈압도 220정도다.
  18. 잠시 베를린 전체가 이젠 살았다는 열광에 휩싸였지만 후임자 트루먼은 표트르 3세의 삽질을 반복하지 않았고 반복은커녕 본인이 FDR 이상으로 단호하고 호전적인 지도자임을 입증했지 Give'em hell, Harry!망했어요.
  19. 다만 이건 중립정책으로 단물 빨던 미국에겐 아이러니. 즉, 루스벨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여론 자체가 2차 대전 참전에 부정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여론을 돌리는덴 에드워드 머로의 나치-영국 본토 항공전 중계 등 언론이 한몫을 했고, 결정적으로 일본제국의 삽질(...)이 기폭제를 당겼다.
  20. 독일계, 이탈리아계는 구별이 힘들다는 점도 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허나 행정명령 9066호 항목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계도 상대적으로 소수지만 수용소에 갔다는 언급도 있다. 애초에 일본인이여도 다른 황인종과 구분은 힘들다.
  21. 존 F.케네디의 아버지다.
  22. 존 F. 케네디의 동생이자 후에 법무장관이 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도 어렸을 때 우표 수집이 취미였다고 한다.
  23. 연설문 일부 번역은 # 여기에서, 원전문은 # 여기를 참고할 것.
  24. 실제 린드버그는 반전론자 겸 친독인사였으며, 이 때 루스벨트에게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것은 물론 군 지위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가 친독화하는 설정은 좀 다르다. 자세한건 스포일러.
  25. 내전 중인 미국에서 화해의 연설을 하고 귀환 도중 실종된다.
  26. 미국에서 대체역사소설의 거장으로 인정받는 인물. 수십편의 대체역사소설을 썼는데 국내에는 장편 비잔티움의 첩자, 단편 가지 않은 길, 최후의 신조만이 번역출판되었다.